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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의 꿈

꽃구름언덕 5 2043
배추에서 향긋한 향이 난다.
아무도 배추 냄새를 배추향이라 하지 않지만 내게는 복자네 배추로 담은 김치를
다 먹을 때 까지 배추 향기가 날것이다.

그 마을엔 구름이 너무도 하얗게 푸르고 맑은 하늘에  높이 떠 있었고
강물도 예전처럼 메기같은 민물 고기들을  키우며 마을 복판을 흐르는 정말 조용한 산골 마을이다.

여늬 집들은  어린 아이들이 도화지에 산을 기대고 그려 넣은듯, 나직이 꿈을 꾸듯 앉아있었다.
딱 한 집, 복자네 집만 빼고는...... .
 
복자네 집은 빨간 벽돌 이층집이다. 온통 푸른 주변 환경에 빨간 벽돌집은
보기만 해도 주인의 취향이나 사는 모양새가 짐작이 가는, 넓고 둥근 유리 테라스도 있었다.

밤이면 별을 바라보고 달빛도 불러들일 수 있는 볼품 있는 집이다.
안 주인의 취향을 읽을 수 있는 집이다.

삼십년이 훨씬 전에 복자네 집은 초가 지붕에 나무로 엮은 사립문이 항상 열려 있었고,
부엌에 연한 마굿간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랫 층에 농기구를 놓는 곳이며  주차장이 있다.
얼마나 많이 변한 세월이며 또 달라진 주거 환경인가?

마당 입구에는 백일홍 코스모스가 열을 지어 반기고 진돗개 한마리가
알알이 붉어가는 대추나무 아래 게으르게 뒤척일뿐, 이방인에게 짖지도 않는다.
주인을 닮아 저리 순한게지.....  .

복자는 이 산골에서 나고 자라 콜타르를 입힌 조그만 분교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는 서울로가 가수가 되겠다고 날마다 지게를 지고
나훈아 노래를 부르던 착하지만 '허파에 바람든 남자' 성발이 오빠와 결혼해서
삼남매를  낳고 교육시키면서 순박하게 잘 살고 있었다.

이십 여년전 잠깐 만나긴 했지만 오랜 만에 만난 복자도 사십을 넘긴 나이 만큼 세월이 보였다.
얼마나 반가워 하는지 잡은 손을 놓을 줄 모르는 그애 손을 잡고 이층을 오르는데
'저녘 먹고 놀러 나온 아기별님'의 반짝임이  옛날과 변함없다.
복자와 나는 고작 2년을 이 강원도 산골에서 앞 뒷집에 살며 학교를 다녔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났으나 시골 교회서 봉사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번 이사를 다녔고 그 조그만 분교에서도 전학을 했다.
홍수가 엄청나게 많이 나던 해였다.

이층에서 내려다 본 농장은 배추밭이 아니라 배추 바다였다.
하얀 트럭을 몰고 성발이 오빠 아니 복자 남편이 바삐 돌아온다.
농장이 너무 많으니 휴대폰으로 내가 왔다고 연락을 한 모양이다.

어릴적 모습이 조금 보인다며 반긴다.
우리 부모님 안부도 묻고.....
가수가 되겠다고 노래 잘하시는 우리 엄마에게 한수 가르쳐 달라고 오고,
우리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서울서 가수가 될지를 진지하게 상의를 하곤 했던 생각이 난다.

가끔 나를 놀려서 내가 울기도 했지만 겨울이면 강가에서 탈 썰매도 만들어 주고
솜씨 좋게 연날리기 숙제를 해 주기도 하던 얼굴이 하얗던 착한 오빠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저 오빠랑 어떻게 결혼 하게 되었냐고 묻는 내게
"홍수로 사람들 집과 전토를 잃고 모두 떠나서 동리에 젊은 사람들이라곤
우리 둘만 남아서 저절로 살게 됐어" 하면서 옛날처럼 수줍게 웃는다.
그 모습이 어찌나 평화스럽던지....

참 ,  이제 생각하니 어릴 때 복자는 조금 늦되는 아이 였던것 같다.
나는 이 산골에서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으례 손수건을 앞가슴에 매단 "우리들은 일학년'시절이 없다.

일제 시대에 월반을 하신 경험이 있으신 아버지께서 한글을 깨우치고
동화를 읽을 정도가 된 나를 3학년에 편입학을 시킨 것이다.

초미니 분교에서 복자와 나는 3학년에 짝꿍으로 처음 만났다.
학기초 였는데 국어는 '국민 교육헌장'을 산수는 '구구단'을 외우던 때로 기억된다.
나는 외우기는 좀 하는 편이어서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내용을 하루만에 다 외웠다.

복자는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영 외우질 못했고 구구단도 잘 틀려서 혼이 나곤 했는데
지적을 받을때 마다 내가 조그만 소리로 일러 주곤 해서 학교가 파하고
돌아오는 길엔 꼭 지금처럼 웃으면서 들꽃을 한 웅큼씩 꺾어다 내 손에
쥐어 주곤 하였다.

나는 그 때 그애가 왜 내게만 그러는지 정말 몰랐었다.
십리가 넘는 길을 그꽃을 들고 오는 것이 참 쉽지는 않았었지.
너무 꼭 쥐어서 집에 오면 꽃대는 짖이겨지고 패랭이
꽃은 말라 들어 갔었지.
그래도 나는 굳이 복자가 섭섭 할까봐 집에까지 와서 병에다 꽂아 놓곤 했다.

겨울엔 얼음이 언 강에서 지치도록 썰매를 타고 여름이면 냇가에서
수영하고 머루 다래 따 먹던일, 봄이면 산나물 캐러 동네 언니들 쫓아다니고, 
복자와 나는 꿈같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이제사 찾아간 그 마을엔 그렇게 많이 흐르던 강물도 실개천이 되어 버렸고
함께 다니던 학교길은 기름칠을 한듯 반지르르한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다.

이렇게 변한곳에 변하지 않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이곳에
아직도 살고 있어서 고향에 온 듯 너무나 기쁘다.
그러나 내가 정작 행복한 것은 복자의 고운 마음씨 때문이다.
그리고 빛나는 그애의 꿈  때문이다.

12남매가 되는 집에 시집을 간 복자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들 커서
제 삶을 찾아 나갈 때 까지 열심히 일만 했다.
그 많은 식구에 말들은 좀 많았겠는가?

나 어렸을 때 성발이 오빠 집은 너무나 가난했었다.
시모님까지 열 세식구 먹고 사는 일이 신기할 정도라는 어른들의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학교만 갔다오면 막내부터 일손을 거들고 그래서 옥수수 감자로 라도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복자는 일이 힘겹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안되면 습관처럼 도지는
남편의 가수병 때문에 속앓이를 하면서도 억척같이 배추를 가꾸었다.

시어머니의 중풍 수발도 복자의 몫이었지만 전성으로 모셔 효부상을
탔을 정도인데도 더 잘 모시지 못했다고 눈물을 글썽인다.

고냉지 채소라는 것이 투기성이어서 어느 해는 가격이 폭락이고
어느 해는 작황은 안좋은데 가격은 금값일 때가 흔하단다.
굴곡 많은 우리네 인생과도 같은 것이 이 농사라고 한다.


이렇게 돈을 모아 마을을 두고 떠나는 사람들의 밭을 한 뙈기씩 사 모은 것이 팔만평!
자그마치 팔만평이나 된단다.
그 골짜기가 모두 복자네 땅이다. 팔만평의 지주가 키가 자그마한 그애 복자다.
늦게 복을 받아서 복자인가? 
이름을 참 잘 지었다고 웃었지만 정당하게 땀흘린 댓가다.

산골의 팔만평이 도시의 작은 상가 하나에 비할수도 있겠지만
이땅은 복자 부부의 피와 땀이고 인생이다.
지금은 노동 환경도 많이 달라져 인근에서 봉고차로 인부들을 출퇴근 시키며 농사를 지으니
가히 중소기업에 다를바가 없다해도 무리는 아니다.

하루 100명이 넘는 인부에 품삯만도 기백만원이고 음료수며
빵 같이  새참 값이 만만 찮은 액수라고 한다.
이제 복자는 작업복 대신 치마를 입고 이층 거실에서 그저 새파란 배추밭을 바라보면서
배추 시세만 신경을 써도 될 정도가 되었다.

 요즘은 운전을 배워서 대구에서 공부하는 삼남매들 자취방에 자주 드나든다.
그애를 닮아 착한 큰딸이 사회 복지학을 전공해서 엄마의 꿈을 이루려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옛날에 너희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동화도 들려 주시고 옛날 이야기도 해주실 때
나보고 너는 꿈이 뭐니? 꿈을 꾸려면 남을 돕는 꿈이 제일  좋은 거란다." 하고 말씀하셨어.

그런데 배운거 없고 일만 하고 산골에 산 내가 무슨 꿈이 생각나야지...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할일도 없어지고 밭에 나가 일도 안해도 되니
너무 빈 마음이된거야"

그래서 우리 아버지 말씀이 생각났고, 고생하며 살아서 먹고 살만큼 되었고
여태 좁은 산골 집에 살다가 제 작년에 이만한 집도 지었으니
더 바랄것도 없이 그들 부부는 독거 노인들을 돕고 살기로한 그들의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를 복지학을 하게 하고,그들은 이제 저 배추가 잘되면 모두
그 일에 투자를 할 생각이라고 한다.
그이들의 꿈 이야기가  산골 물소리보다 낭랑하게 들려온다.
나는 그만 우리 아버지에게도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부끄러워진다.

"나도 이제 생각만 하지 않고 그렇게 살고 싶어"내말에
"그래,이 많은 땅 지고 가겠니?  안고 가겠니? 
네가 얼마나 내게 도움이 될텐데, 여기서 집짖자" 쉽게 말한다.

나는 복자의 말이 그냥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그애의 맑은 눈빛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그애는 더 이상 배추밭만 매는 시골 아낙이 아니었다.
세간을 놀라게 하는 여성 정치인만이 장하다고 누가 말할것인가?
그 위대한 꿈을 위해서 복자는 이제껏 땀을 흘린것이다.

꿈이 없는 인생은 생존에 불과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흩어진 꿈의 자투리를 발견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현실이라는 바람을 타고 오는 먹구름을 꽃구름 같은 삶으로 바꾸기도 한다.

꿈은 희망이고 삶의 구원이고 에너지이다.
복자의 꿈은 봉사하는 것이다. 사랑의 봉사는 상처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동안 힘겹게 살아온 복자는 온갖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촌부이다.

하지만, 그애의 아담한 집을 볼때와 다르게 꿈을 보는 순간 그것이 비록 금세
이루기 힘들더라도, 나는 그애가 위대해 보이고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아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 넉넉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든  김치거리는 얼마든지 가져 가라고 그 넉넉한 착한 손을 내민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길에서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속이 꽉찬 배추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는 차안엔 무우며 배추가 가득 실려 있었고
그 배추향은 지상의 어느 향기 보다도 그윽하였다.




 






.
 


 











 
5 Comments
바다 2003.09.03 22:11  
  꽃구름피는 언덕님은 참 좋은 추억과 친구를 두셨군요.
저도 그런 추억어린 고향은 있으나 고향에는 반겨줄 친구는
사라진지 오래고 친구들과 숨바꼭질하고 놀았던 동네 골목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고 같이 멱감고 놀았던 냇가는 죽어가고 있었어요.

복자네 배추에서 나는 배추향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꽃구름피는언덕 2003.09.05 01:49  
  바다님! 허전하겠군요.
이은상님의 '옛동산에 올라서'를 가만히 불러 보시면 어떨까요?
복자네 배추밭에서만 아니라 바다님에게서도
고운 글 향기가 나잖아요?
감사합니다.

가객 2003.09.05 10:45  
  흙에서 태어나 흙을 위해 살아 온 꽃구름피는언덕님의 친구,
복자씨에 관한 글을 읽다 보니 문득
펄벅의 '대지'를 읽을 때의 그 진한 감동이 되살아 나는군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며 사는 파라다임 속의 이 시대에
흙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보면 한없는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제가 어리석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복자씨처럼 흙을 사랑하는 오랜 친구를 둔
꽃구름피는언덕님은 참 행복한 분입니다.
두 오랜 친구간의 우정이 평생토록 향기롭게 꽃피우기를 빕니다.


파리넬리 2003.09.08 15:10  
  옛 친구와 어린시절의 선생님 이야기로
우리의 잊고 있었던 추억을 알싸하게 일깨워 주신
꽃구름피는언덕님.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님의 글 속에서 사람사이의 관계를 배웁니다.
진실된 마음을 주고 받는 그런 관계야 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꽃구름피는언덕 2003.09.08 15:17  
  누구에게나 지나온 시간은 아름답습니다.
오늘은 내일의 지나온 시간이니 오늘을
아름다이 살고저 마음 다집니다.

그리고' 내마음의 노래'에 계시는 분들같이
고운시를 노래하는 마음이라면
모두 가능 할거란 희망에 찬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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