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탄 기차
조그만 시골 역사를 약간의 설레임으로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여행을 위한 여행길이다.
온갖 국화가 역사내에 향기를 품으며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왕복 승차권을 구입해 고입 준비하는 둘쨰 녀석과
바람을 쐬고 오라며 등을 떠미는 남편 배려에 시간을 내어
봉화역을 나가 정동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흑백사진 처럼 정이가는 한적한 정동진은 심신이 피곤할때나
결혼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 남편과 함께 찿아가던
내 나름의 기쁨을 주던 바닷가였다.
요즘은 명소로 알려져 번잡해 졌지만 그곳은 십 수 년전 부터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도와 주던 정다운 곳이였다.
철로옆을 흐르는 정화수 같은 계곡물과 만산 홍엽을 이룬
태백산의 절경을 보며 삶의 무게가 폭설처럼 내 어깨를 눌렀지만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마치 새털 구름처럼 가벼워졌다.
가을 산의 풍경을 바라보니 여름산의 그 푸른 기개는 덜하지만
낙엽마져 꽃으로 만드셔서 감동케 하시는 분께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넘친다.
과학이 바벨탚처럼 뻐기는 시대지만 누가 푸르던 저 숲에
찬란한 색을 입히겠는가?
해변가 특유의 내음과 생동감으로 숨쉬는 작은 마을 정동진이다.
바다를 면한 역사앞 은모래 위에서 하햫게 포말되는 파도며 하늘을 비상하다
쏜살 같이 급강하 하는 갈매기의 자유를
부러워 하기도 하고 아들과 조가비도 줍고 솜사탕을
사먹으며 망중한을 즐기는 중년이 된 여인인 내게 모든
사물은 은총이었다.
오후 3;30분, 차표를 예매해 놓은 터여서 망설임없이
플랫 홈에 들어섰다.
이윽고 인파 속으로 빨간 우등 열차가 도착 했고
아들과 나는 아쉽지만 열차에 올랐다.
차창밖으로는 아침에 봉화에서 같은 여정에 나섰던 젊은 엄마를
비롯한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고 정동진 시비를 읽는 등 여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민박이라도 하려는 것이려니 생각하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맡겼다.
아들은 일찌 감치 잠을 청하는 눈치였다.
어디에도 얼마 후에 있을 낭패의 조짐은 없었다.
옥계를 지나 동해의 등대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무궁화호 열차엔 여행뒤에 오는 차분한 정적이 맴돌고 있었다.
나한정 역까지 이런 저런 사념들 사이로 가을 경치를 구경하던
나도 어느 순간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긴 기적 소리에 눈을 뜨니 어느 듯 열차는 통리역을 지나는 중이었다.
이제 잠시 후면 철암을 지나 석포로 접어 들겠지
생각하며 해질녘 신비스런 자작나무에 정다운 눈길 보내며
무심히 앉아 있었다.
문득 창박으로 [고한 석탄연구소]가 보인다.
전에 못보던 건물이라 조금 이상했고 까닭 모를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태백은 탄광이 많은 지역이니 무관히 보아 넘긴 곳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익숙치 않은 산천이 게릴라 처럼 불쑥 불쑥
얼굴을 들이 밀더니 사북역이라는 팻말이 보이는게 아닌가?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 심장이 뛰고 정신이 아찔 하다.
차창 밖은 이미 칠 흙 같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차륜의 규칙적인 진동조차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황망히 옆좌석의 승객에게
물으니 영월을 경유, 청량리로 향하는 열차란다.
아뿔사! 태백선이구나.
정동진 같은 작은역에 기차가 자주 있으리란 생각을 못한데다
열차 시간 또한 영동선과 십 여분 차이로 비슷했던 터라
행선지 확인도 않고 무작정 탄것이 실수였다.
낮선 곳에서의 방향감각 상실과 오랜만의 여행으로 이완된 신경을
감안 하더라도 황당한 실수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승무원에게 어째서 검표나 안내 방송을 하지 않았느냐는
원망섞인 내 물음에, 검표는 평일 인데다 손님이 적어 안했지만
안내 방송은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잠든 사이에.
당황하는 내게 승무원은 오승(誤乘 )이라는 글자를 승차권에
큼직하게 써 주면서 제천서 내렸다가 서울서 오는 영주행 기차로
갈아 타야 한다는 설명을 잊지 않는다.
봉화가는 기차는 그 시간엔 없으므로......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통리 역에서만 내렸어도 13분쯤 뒤에 오는 봉화 행 열차를
탈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은 떄늦은 후회일 뿐이다.
그랫구나 그래서 봉화서 같이 탓던 승객들이 함께 승차하지 안았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바다를 많이 볼 요량으로 출발 두 시간 전부터
부지런을 떨며 역에 미리 들어가 있었던 것도 후회되고
설상가상 가까운 여행이라 수중엔 돈도 없었다.
저녁은 고사하고 간단한 얼 요기조차 지난한 일이 아닌가?
더구나 6시 45분 봉화역으로 마중을 나오기로 했던 남편이
걱정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콩 튀듯 했다.
연락할 휴대폰도 증산,예미, 영월등 험산 준령을 통과 하는
태백선 기차 안에선 무용지물로 변했다.
객실에 비치된 무선 공중전화기 조차 상대편에게 연결이 안되고
끊기기를 수 십번, 전화기를 잡고 씨름한 한 시간이 길게만 느껴 졌다.
결국 승무원의 도움으로 봉화 역으로 무전을 보내 아무개씨 남편은
밤9시 30분 영주 역으로 마중 나오시기 바람식의 방송 부탁을 하고
나서야 약간 안도를 했다.
가볍게 시작해서 정신없이 마무리한 이날의 여행은 제천역 대합실에서 두 시간 기다리다 오승(誤乘)이
적힌 차표를 내고 밤11시가 넘어서야 영문도 모르는 남편이 놀라 영주역으로 마중을 나와서
허기진채로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가을날 추억이라면 추억일 여행이었지만 기차 여행에서의 오승(誤乘)
이었기 망정이지 내 삶에 여정에 오승(誤乘)이 었으면
돌이킬 수도 없고 아찔한 일 아닌가?
바른 길인줄 알고 정직하게 믿고 간 길이 결국 목적지가 잘못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인생의 종착지에서 맞게 될것인가?
이쯤해서 나는 여러 갈래길, 지엽적인 것들의 옳다고 믿었던
모든 일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인생 여정에서는 오승(誤乘)이
없기를 기원 할 일이다.
다소 황당한 이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가끔 나태한 내 의식의 촉매가 되기도 한다.
오직 편도 밖에 허용되지 않는 엄숙한 인생 여정에서
나는 오승(誤乘)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냉철한 이성과 생각으로 살아가야 될 이유는 어찌 보면
오승(誤乘)을 수정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장엄한 역사 앞에 인생이 올 곧게 되기를
기대하는 자신에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
오늘도 많은 사연을 가진 여행객들을 태운 강릉행 무궁화 열차가 들국화 만발한 가을 산천을
제 괘도에서 긴 기적을 울리며 늦 가을 찬 공기를 가른다.
온갖 국화가 역사내에 향기를 품으며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왕복 승차권을 구입해 고입 준비하는 둘쨰 녀석과
바람을 쐬고 오라며 등을 떠미는 남편 배려에 시간을 내어
봉화역을 나가 정동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흑백사진 처럼 정이가는 한적한 정동진은 심신이 피곤할때나
결혼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 남편과 함께 찿아가던
내 나름의 기쁨을 주던 바닷가였다.
요즘은 명소로 알려져 번잡해 졌지만 그곳은 십 수 년전 부터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도와 주던 정다운 곳이였다.
철로옆을 흐르는 정화수 같은 계곡물과 만산 홍엽을 이룬
태백산의 절경을 보며 삶의 무게가 폭설처럼 내 어깨를 눌렀지만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마치 새털 구름처럼 가벼워졌다.
가을 산의 풍경을 바라보니 여름산의 그 푸른 기개는 덜하지만
낙엽마져 꽃으로 만드셔서 감동케 하시는 분께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넘친다.
과학이 바벨탚처럼 뻐기는 시대지만 누가 푸르던 저 숲에
찬란한 색을 입히겠는가?
해변가 특유의 내음과 생동감으로 숨쉬는 작은 마을 정동진이다.
바다를 면한 역사앞 은모래 위에서 하햫게 포말되는 파도며 하늘을 비상하다
쏜살 같이 급강하 하는 갈매기의 자유를
부러워 하기도 하고 아들과 조가비도 줍고 솜사탕을
사먹으며 망중한을 즐기는 중년이 된 여인인 내게 모든
사물은 은총이었다.
오후 3;30분, 차표를 예매해 놓은 터여서 망설임없이
플랫 홈에 들어섰다.
이윽고 인파 속으로 빨간 우등 열차가 도착 했고
아들과 나는 아쉽지만 열차에 올랐다.
차창밖으로는 아침에 봉화에서 같은 여정에 나섰던 젊은 엄마를
비롯한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고 정동진 시비를 읽는 등 여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민박이라도 하려는 것이려니 생각하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맡겼다.
아들은 일찌 감치 잠을 청하는 눈치였다.
어디에도 얼마 후에 있을 낭패의 조짐은 없었다.
옥계를 지나 동해의 등대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무궁화호 열차엔 여행뒤에 오는 차분한 정적이 맴돌고 있었다.
나한정 역까지 이런 저런 사념들 사이로 가을 경치를 구경하던
나도 어느 순간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긴 기적 소리에 눈을 뜨니 어느 듯 열차는 통리역을 지나는 중이었다.
이제 잠시 후면 철암을 지나 석포로 접어 들겠지
생각하며 해질녘 신비스런 자작나무에 정다운 눈길 보내며
무심히 앉아 있었다.
문득 창박으로 [고한 석탄연구소]가 보인다.
전에 못보던 건물이라 조금 이상했고 까닭 모를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태백은 탄광이 많은 지역이니 무관히 보아 넘긴 곳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익숙치 않은 산천이 게릴라 처럼 불쑥 불쑥
얼굴을 들이 밀더니 사북역이라는 팻말이 보이는게 아닌가?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 심장이 뛰고 정신이 아찔 하다.
차창 밖은 이미 칠 흙 같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차륜의 규칙적인 진동조차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황망히 옆좌석의 승객에게
물으니 영월을 경유, 청량리로 향하는 열차란다.
아뿔사! 태백선이구나.
정동진 같은 작은역에 기차가 자주 있으리란 생각을 못한데다
열차 시간 또한 영동선과 십 여분 차이로 비슷했던 터라
행선지 확인도 않고 무작정 탄것이 실수였다.
낮선 곳에서의 방향감각 상실과 오랜만의 여행으로 이완된 신경을
감안 하더라도 황당한 실수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승무원에게 어째서 검표나 안내 방송을 하지 않았느냐는
원망섞인 내 물음에, 검표는 평일 인데다 손님이 적어 안했지만
안내 방송은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잠든 사이에.
당황하는 내게 승무원은 오승(誤乘 )이라는 글자를 승차권에
큼직하게 써 주면서 제천서 내렸다가 서울서 오는 영주행 기차로
갈아 타야 한다는 설명을 잊지 않는다.
봉화가는 기차는 그 시간엔 없으므로......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통리 역에서만 내렸어도 13분쯤 뒤에 오는 봉화 행 열차를
탈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은 떄늦은 후회일 뿐이다.
그랫구나 그래서 봉화서 같이 탓던 승객들이 함께 승차하지 안았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바다를 많이 볼 요량으로 출발 두 시간 전부터
부지런을 떨며 역에 미리 들어가 있었던 것도 후회되고
설상가상 가까운 여행이라 수중엔 돈도 없었다.
저녁은 고사하고 간단한 얼 요기조차 지난한 일이 아닌가?
더구나 6시 45분 봉화역으로 마중을 나오기로 했던 남편이
걱정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콩 튀듯 했다.
연락할 휴대폰도 증산,예미, 영월등 험산 준령을 통과 하는
태백선 기차 안에선 무용지물로 변했다.
객실에 비치된 무선 공중전화기 조차 상대편에게 연결이 안되고
끊기기를 수 십번, 전화기를 잡고 씨름한 한 시간이 길게만 느껴 졌다.
결국 승무원의 도움으로 봉화 역으로 무전을 보내 아무개씨 남편은
밤9시 30분 영주 역으로 마중 나오시기 바람식의 방송 부탁을 하고
나서야 약간 안도를 했다.
가볍게 시작해서 정신없이 마무리한 이날의 여행은 제천역 대합실에서 두 시간 기다리다 오승(誤乘)이
적힌 차표를 내고 밤11시가 넘어서야 영문도 모르는 남편이 놀라 영주역으로 마중을 나와서
허기진채로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가을날 추억이라면 추억일 여행이었지만 기차 여행에서의 오승(誤乘)
이었기 망정이지 내 삶에 여정에 오승(誤乘)이 었으면
돌이킬 수도 없고 아찔한 일 아닌가?
바른 길인줄 알고 정직하게 믿고 간 길이 결국 목적지가 잘못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인생의 종착지에서 맞게 될것인가?
이쯤해서 나는 여러 갈래길, 지엽적인 것들의 옳다고 믿었던
모든 일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인생 여정에서는 오승(誤乘)이
없기를 기원 할 일이다.
다소 황당한 이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가끔 나태한 내 의식의 촉매가 되기도 한다.
오직 편도 밖에 허용되지 않는 엄숙한 인생 여정에서
나는 오승(誤乘)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냉철한 이성과 생각으로 살아가야 될 이유는 어찌 보면
오승(誤乘)을 수정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장엄한 역사 앞에 인생이 올 곧게 되기를
기대하는 자신에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
오늘도 많은 사연을 가진 여행객들을 태운 강릉행 무궁화 열차가 들국화 만발한 가을 산천을
제 괘도에서 긴 기적을 울리며 늦 가을 찬 공기를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