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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불고호텔 앞에서

별헤아림 10 4422
인터불고호텔 앞에서
권선옥(sun)

서늘한 가을 바람이 곁에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가을은 나의 마음에 색색의 나뭇잎으로 한 잎 두 잎 그 잎사귀를 떨구며 나를 물들인다. 저녁 식사 후 읽지 않을 책 한 권을 들고서 집을 나선다. 집에서 가까운 인터불고호텔 앞 공원길이 나의 산책로가 된 지는 이미 몇 달 전부터이다. 여름의 뙤약볕을 피하다 운동하는 걸 거른 적도 많았었지만 오늘같은 저녁 때야말로 그저 부담 없는 친구랑 살아가는 얘기 나누며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터불고호텔의 대표 권영호씨는 원양업으로 사업 기반을 일구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로 스페인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자신이 번 돈으로 스페인에 '애국가'를 작곡하신 안익태 선생이 살던 집을 125억에 인수하여 130억을 들여 수리를 한 후 안익태 선생의 부인의 사후에는 박물관으로 보존하는 방향으로 문화사업에도 기여하시는 분이시라는 기사를 떠올려 본다. 호텔 주인이 세금을 포탈해서 조사를 받는 기사를 읽었다면 호텔건물만 보여도 찜찜했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인지 이 공원을 오가면서도 좋은 생각들을 더 많이 하게 된다. 호텔 앞에는 공원 주차장과 호텔 주차장도 있지만 주차장을 이용하는 차량 외에도 공원을 통과해서 고모령으로 향하는 길가엔 불법 주차 차량도 즐비한 편이다. 공원 안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불법 주차 차량들이 그리 흉하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사람 살아가는 정다운 풍경이고 하나의 배경처럼 여겨진다.
오늘은 어제보다 약간 일찍 공원으로 나왔다.
일찍이라고 해도 시간은 밤 8시 30분. 이제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 오는데 산책과 운동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해 본다. 800M의 공원 산책길을 다섯 바퀴 돌면 50분 가량이 걸린다. 두세 바퀴 도는 동안은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면서 산책을 한다. 그 다음으로 자판기의 커피를 한 잔 빼어서는 자동차문을 열고 들어가서 의자를 편하게 젖힌다.
차창 밖의 무성한 가로수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자연을 느낀다.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은은하게 불 밝힌 가로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대로 밤이라도 샐 것만 같다.붉그레한 가로등이 빛을 잃어가는 새벽이 올 때까지. 차량의 라디오를켠다. KBS 제1FM에서 흘러나오는 <정다운 가곡>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신다. <정다운 가곡>이 끝나는 밤 10시에는 <당신의 밤과 음악>시간이다. <당신의 밤과 음악>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한 곡 듣고는 다시 밖으로 나온다. 훌라후프와 윗몸 일으키기를 50분간 하고는 운동을 마친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 몇 년을 하루같이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성실하게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때로는 밤 깊은 그 시간에도 친구랑 통화를 하기도 한다. 밤을 낮 삼아 일을 하고, 공부를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때로는 통화 중에 엘리베이터다 지하철이다 해서 통화가 끊기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를 알면서 제대로 된 삶의 깊이를 배우고 제대로 된 삶의 무게를 느낀다.
내 앞에 놓여진 시련 앞에서 나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이것저것 챙겨 주는 그녀를 보면서 고마움 이상의 그 무엇을 가슴으로 싸 안는다. 늦은 나이에 돈을 벌어서 학교를 다니고 글을 쓰고 직장에 관련된 연수를 위해 밤을 밝혀 일하는 그녀를 생각하며 너무 늦은 나이에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 본 적도 없고, 돈을 모아 본 적도 없고, 병원 가는 길에 한 번 태워 드리고 보살펴 드린 일도 없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돈을 번다면서도 대학원 입학금과 논문학기 등록금을 부모님께 부담지운 철없는 행동을 한 일이 왜 지금에야 생각이 나는 걸까. 서러운 서른 살까지 공부시키고 혼수 마련해서 시집 보낸 맏딸. 그 딸이 마흔 여덟이 된 지금 어두운 인생의 길목에서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다.

<2004. 9. 16.>
10 Comments
김환주 2004.09.17 17:28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필가로도 대성하겠습니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안익태선생님이 사시던 곳이 스위스인가요? 혹시 스페인이 아닌지요? 저 기억으로는 그분이 스페인 여자와 결혼 하셨고, 주로 스페인에서 거주 하신 걸로 아는데, 저의 기억이 맞는지는 저도 저으기 의심이 갑니다. 좋은 저녁 맞으세요.
바다 2004.09.17 22:47  
  우리는 왜 이 나이에야 철이 들고 또 방황해야 하는가?
이 글을 읽어가며 그냥 눈물이 나왔습니다.
마치 인터불고호텔 앞에 서 있는 그 중년의 여인이 또 다른 나 같아서.....
별헤아림 2004.09.17 22:53  
 
김환주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안익태 작곡가님 부인께서는 아직 그 곳에 생존해 계신다고 하더군요. 권영호 회장님도 한국보다는 주로 스페인에 거주하시구요. 한강 이남에서 가장 최근에 지은 큰 호텔이라 시설이 좋은 대신 뷔페 식사값도 맛에 비해 센 편입니다.
별헤아림 2004.09.17 22:54  
  그리고 김환주님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는 순수 풋내나는 아마추어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춘다>는 책도 있더군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화 2004.09.18 00:20  
  아름다운 별헤아림님! 정말 진솔되고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살면서 매일 인생을 배우고 통찰할 수 있음은 신의 축복인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중년이 되기전에 돌아가신 분이시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중년은 제대로 인생을 이해할만한 나이라서 그런가봅니다.

님! 운동도 열심히 하셔서 육체의 건강도 지키시고, 아름다운 노래 들으면서 감성지수도
더욱 높이시고, 깊은 신앙생활 안에서 영혼도 건강하시기를 저도 님을 위한 묵주기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밤 저는 심리상담 수업중에 우리곁에 늘 계시는 신의 존재를
더욱 실감나게 느끼며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별헤아림님! 평화를 빕니다.
다가오는 추석 행복하시고 님의 모든일들이 한가위 만월같기를....*^_^*
오숙자.#.b. 2004.09.18 08:29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시작입니다
별 헤아리님 의 아름다운 그마음
이제 부터 펼치셔도 늦지 않습니다
나 역시도그것을 위안삼아

"" 그래 지금은 늦지않았어,하지만 내일은 아예 늦을 수 있어 ''''
하며 마음 고쳐먹을 때가 많아요.

나를 다시한번 돌아보게 하네요......
별헤아림 2004.09.18 10:57  
  평화님으로부터 신 앞에서 겸손해지는 마음,
아름다움을 가꾸어 가는 정겨운 마음을 배워 갑니다.
평화님은 한 통의 전화로도 몇 구절의 글로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불어넣는
귀여운(?) 요술쟁이입니다.
별헤아림 2004.09.18 11:02  
  오숙자 교수님 ...!
감사합니다.
9월 4일 저녁의 화사한 미소.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은 처음이었죠.
청순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 그래 지금은 늦지않았어,하지만 내일은 아예 늦을 수 있어 ''''
전 그 내일이 너무 멀러져 버린 탓에 , 게으름 탓에 잃어 버린 일이 많습니다.
나비 2004.09.28 20:48  
  여자들!특히 우리 어머니들은 나이 들어 가면서
어머니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나지요!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건강하시고 힘내세요!이 아름다운 가을에...
별헤아림 2004.10.04 12:05  
  나비님 용기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연 그리고 어머니, 고향같은 그리움이
더욱 짙어지는 나이이고, 계절입니다.
다음에 공연장에서 뵈면
잠시라도 얘기 나눌 수 있을 시간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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