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 김채원의 <겨울의 幻 >을 읽고 ②
김채원의 <겨울의 幻 >을 읽고 ②
권선옥(sun)
나는 그 날 두 시간의 수업을 남겨 두고 당장 시내로 책을 사러 가고 싶은 충동에 그만 조급증이 생겼다. 17년 전, 1989년 9월에 나온 책을 이제 겨우 읽어 보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단 두 시간이 마치 건너지 못 하게 가로 놓여진 강처럼 여겨졌다.
대구백화점에 주차시킨 후, 지하철 2호선이 새로 개통되면서 반월당 지하에 새로 생긴 영풍서점으로 찾아갔다. 아무래도 큰 서점이 나을 듯 싶어서이다. 그러나 <겨울의 幻>을 찾지 못 했다. 주문을 하라는 것을 바로 사고 싶은 마음에 그냥 나왔다. 전에 가끔씩 가던 제일서적 1호점과 2호점도 작년인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전에 있었음직한 하늘북서점을 찾았더니, 그 자리도 역시 다른 업종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서점을 찾았으나, 그곳은 매장을 줄인 후 학생들 참고서 위주의 전문서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젠 서점 구경하기 힘들겠구나. 일전에 어떤 행사에서 황금찬 시인께서 ‘글을 쓰는 여러분들이라도 1년에 책 50권은 사서 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다. 나야말로 책과 무관하지 않는 일에 종사하면서도 공짜 책 빼고 나면 1년에 책 5권도 살까 말까이다. 그러니 책방들이 문을 닫을 수밖에. 그래도 책이란 책방에서 둘러보기도 하고 뒤적거리기도 하면서 구경하다가는 마지막으로 한두 권만 사서 거리를 나서는 재미도 솔솔한 법인데 아쉽다고나 할까 뭐 그랬다. 앞으로는 인터넷에서 회원제를 겸해서 운영하는 한두 개의 점포 외에서는 '요즘 어떤 책들이 나왔을까?'하고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은 사라질 전망이다. 낭만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
찾는 책은 없었지만 서가에 꽂혀 있는 새로운 책들의 제목들만 죽 읽어보아도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 떨림은 마치 가슴 속에 애타게 그리던 연인을 만난 듯 그 자리에 나를 멈춰 서게 만들었다. 밤늦게 주문을 했는데도 이튿날 낮에 들르니, 벌써 책이 도착해 있었다.
김채원의 <겨울의 幻>은 주인공 ‘나’는 43세가 될 때까지 한번도 스스로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지도 못 했으며, 그저 여자 흉내를 내는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32세에 이혼을 한 후, 홀로인 어머니와 살고 있으면서 3년 전에 옛집을 찾아온 남자와 별 진전 없는 만남을 계속하던 중, 그로부터 ‘나이 들어 가는 여자’의 떨림’에 관하여 써 보라는 말을 듣는다. 줄곧 글로 쓰진 못 하고 생각만 해 오던 터엿다.
그러던 중 낮에 집안 아저씨와 할머니의 산소에 갔다 온 그날, 그 산소가 있는 산에서 산불이 번져 새벽까지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불길이 타고 있는 동안 고백체의 문장으로 서술하는 주인공. 새벽같이 경찰에 다녀왔다는 아저씨. 불은 할머니 무던 반대편 등성이에서 붙기 시작했으므로 우리가 낸 것이 아니라는 내용을 쉰 목소리로 전하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지금 밖에는 눈이 온다는 얘기를 한다. 눈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차문을 열고 눈을 보는 순간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순백의 느낌을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의 집에서 울면서 작은 보퉁이 하나를 들고 이모네 집으로 아픈 다리를 어기적어기적 떼어 놓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때문에 주인공은 자주 할머니를 쫓아냈다고 어머니에게 그 일을 들추며 달겨들곤 한다.
혼자 된 외할머니가 6.25 전쟁 중에는 피난도 가지 않고 빈 동네 빈집에 홀로 남아 망나니 외삼촌을 기다리던 모습을 통해서 겹쳐지는 두 개의 영상이 그것이다.
<할머니가 군불을 지피며 밥상을 차리는 모습입니다. 소박한 나무 상. 칠이 번쩍이지 않는 다갈색 메모진 조그만 소반 위에할머니는 아들의 수저를 놓고 콩자반, 무말랭이, 호박오라기 등의 밑반찬을 놓으십니다. 국이 끓고 있고 밥도 뜸이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삼촌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 중략..... 전쟁 당시, 모두가 피난을 떠난 후의 아무도 없는 빈 동에 빈집에서 할머니는 삼촌을 만나 보았던 것일까요? ...... 중략...... 혹시 아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마음. 그리고 그 밤 다시 떠나는 삼촌을 문 앞에 서서 배웅하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할머니는 문 앞에 붙박이듯 서 있습니다.>
바로 이 두 개의 영상. ‘밥상을 차리는’과 ‘싸립문을 여잡고 기다리는’ 이 두 개의 영상을 끌어내기 위해 밤새 진통하며 찾은 삶의 열쇠. 그것은 누구인가 자기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고 끝까지 기다려 주었으면 하는 그런 소망의 마음을 이제 제 편에서 누군가에게 해주는 사람으로 자리 잡은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가장 공감되는 부분은 '먹을 수 있게 차려진 밥상'이란 대목이다. '밥을 먹고 사는 일상의 그 사소함'이 어쩌면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가장 사소하지 않은 그 무엇이란 생각에서 비롯한다. 정성을 쏟아 붓고, 대접을 하고 대접을 받는 관계야말로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끌림의 계속됨이다.
다음으로 '싸립문에 붙박이된 기다림'이다. '오지 않는다 혹은 죽었다'의 개념이 아닌 그래서 기다림의 계속됨과 '기다릴 것이다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사이의 갈등 속에서 '붙박이 되어 기다릴 것'이란 믿음의 지속성이다.
이 소설에서 '나이 들어 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한 삶의 열쇠를 뚜렷하게 제시한 영상에서 할머니와 외삼촌은 인물 간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말하자면 천륜이다. 그래서 할머니를 통한 두 개의 영상은 어쩌면 의무인 동시에 일방 동행이 가능한 관계이다. 이는 곧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주인공과 옛집을 찾아온 남자와의 사이는 천륜도 아니고, 관계를 지속해야할 의무 관계도 아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독백처럼 반문한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왜 옛집을 찾아 오셨나요?
(저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실향민이라고 느껴집니다.) >
그리고는 '일방 통행'이 아닌 '일방 통행'일 수 없는 '선택의 관계'에서 '혹시'라는 완곡함과 '만약'이라는 가정이 따른다.
<혹시 당신도 저와 같은 소망을 품고 지내 온 것이라면 당신은 그런 사람을 이제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만약 당신이 원하신다면 원하실 때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으세요.>
끝으로 주인공은 여자로서 서는 것뿐만 아니라, 피난 가던 때 본 눈 속에 서 있는 나무와 같이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가능성 위에서 굳건히 서고자 한다. 겨울. 들창를 열고 눈의 세계를 아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 소설에서 김채원은 주로 대상의 ‘실체 없음’과 ‘모호함’이 결국은 삶임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소설이 단순한 삶의 표현이 아니다.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자기 고백을 통해 한 개인이 자신의 내적인 열망과 현실적 삶의 관계 속에서 사색의 단계를 한 차원 끌어 올린다. 결국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인식과 함께 순수한 열망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구성 단계의 흐름에 진한 매력을 느낀 작품이다. 또한 작품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을 위에 제시한 내용 외에는 새로이 추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작품을 읽고 난 후의 나의 감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작품 속에 작가가 있고 작가의 표현이 바로 독자의 가슴으로 이어진다. 다만 글의 내용을 얼마나 깊이 있게 읽느냐, 어떻게 독자의 삶 속에 반영되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때문에 보통 때는 책만 들면 눈이 내리 깔려서 잠이 빠지기 다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75쪽 분량의 중편임에도 단숨에 읽어 내려간 단 하나의 작품이다.
<2006. 8. 20.>
권선옥(sun)
나는 그 날 두 시간의 수업을 남겨 두고 당장 시내로 책을 사러 가고 싶은 충동에 그만 조급증이 생겼다. 17년 전, 1989년 9월에 나온 책을 이제 겨우 읽어 보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단 두 시간이 마치 건너지 못 하게 가로 놓여진 강처럼 여겨졌다.
대구백화점에 주차시킨 후, 지하철 2호선이 새로 개통되면서 반월당 지하에 새로 생긴 영풍서점으로 찾아갔다. 아무래도 큰 서점이 나을 듯 싶어서이다. 그러나 <겨울의 幻>을 찾지 못 했다. 주문을 하라는 것을 바로 사고 싶은 마음에 그냥 나왔다. 전에 가끔씩 가던 제일서적 1호점과 2호점도 작년인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전에 있었음직한 하늘북서점을 찾았더니, 그 자리도 역시 다른 업종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서점을 찾았으나, 그곳은 매장을 줄인 후 학생들 참고서 위주의 전문서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젠 서점 구경하기 힘들겠구나. 일전에 어떤 행사에서 황금찬 시인께서 ‘글을 쓰는 여러분들이라도 1년에 책 50권은 사서 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다. 나야말로 책과 무관하지 않는 일에 종사하면서도 공짜 책 빼고 나면 1년에 책 5권도 살까 말까이다. 그러니 책방들이 문을 닫을 수밖에. 그래도 책이란 책방에서 둘러보기도 하고 뒤적거리기도 하면서 구경하다가는 마지막으로 한두 권만 사서 거리를 나서는 재미도 솔솔한 법인데 아쉽다고나 할까 뭐 그랬다. 앞으로는 인터넷에서 회원제를 겸해서 운영하는 한두 개의 점포 외에서는 '요즘 어떤 책들이 나왔을까?'하고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은 사라질 전망이다. 낭만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
찾는 책은 없었지만 서가에 꽂혀 있는 새로운 책들의 제목들만 죽 읽어보아도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 떨림은 마치 가슴 속에 애타게 그리던 연인을 만난 듯 그 자리에 나를 멈춰 서게 만들었다. 밤늦게 주문을 했는데도 이튿날 낮에 들르니, 벌써 책이 도착해 있었다.
김채원의 <겨울의 幻>은 주인공 ‘나’는 43세가 될 때까지 한번도 스스로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지도 못 했으며, 그저 여자 흉내를 내는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32세에 이혼을 한 후, 홀로인 어머니와 살고 있으면서 3년 전에 옛집을 찾아온 남자와 별 진전 없는 만남을 계속하던 중, 그로부터 ‘나이 들어 가는 여자’의 떨림’에 관하여 써 보라는 말을 듣는다. 줄곧 글로 쓰진 못 하고 생각만 해 오던 터엿다.
그러던 중 낮에 집안 아저씨와 할머니의 산소에 갔다 온 그날, 그 산소가 있는 산에서 산불이 번져 새벽까지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불길이 타고 있는 동안 고백체의 문장으로 서술하는 주인공. 새벽같이 경찰에 다녀왔다는 아저씨. 불은 할머니 무던 반대편 등성이에서 붙기 시작했으므로 우리가 낸 것이 아니라는 내용을 쉰 목소리로 전하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지금 밖에는 눈이 온다는 얘기를 한다. 눈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차문을 열고 눈을 보는 순간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순백의 느낌을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의 집에서 울면서 작은 보퉁이 하나를 들고 이모네 집으로 아픈 다리를 어기적어기적 떼어 놓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때문에 주인공은 자주 할머니를 쫓아냈다고 어머니에게 그 일을 들추며 달겨들곤 한다.
혼자 된 외할머니가 6.25 전쟁 중에는 피난도 가지 않고 빈 동네 빈집에 홀로 남아 망나니 외삼촌을 기다리던 모습을 통해서 겹쳐지는 두 개의 영상이 그것이다.
<할머니가 군불을 지피며 밥상을 차리는 모습입니다. 소박한 나무 상. 칠이 번쩍이지 않는 다갈색 메모진 조그만 소반 위에할머니는 아들의 수저를 놓고 콩자반, 무말랭이, 호박오라기 등의 밑반찬을 놓으십니다. 국이 끓고 있고 밥도 뜸이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삼촌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 중략..... 전쟁 당시, 모두가 피난을 떠난 후의 아무도 없는 빈 동에 빈집에서 할머니는 삼촌을 만나 보았던 것일까요? ...... 중략...... 혹시 아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마음. 그리고 그 밤 다시 떠나는 삼촌을 문 앞에 서서 배웅하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할머니는 문 앞에 붙박이듯 서 있습니다.>
바로 이 두 개의 영상. ‘밥상을 차리는’과 ‘싸립문을 여잡고 기다리는’ 이 두 개의 영상을 끌어내기 위해 밤새 진통하며 찾은 삶의 열쇠. 그것은 누구인가 자기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고 끝까지 기다려 주었으면 하는 그런 소망의 마음을 이제 제 편에서 누군가에게 해주는 사람으로 자리 잡은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가장 공감되는 부분은 '먹을 수 있게 차려진 밥상'이란 대목이다. '밥을 먹고 사는 일상의 그 사소함'이 어쩌면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가장 사소하지 않은 그 무엇이란 생각에서 비롯한다. 정성을 쏟아 붓고, 대접을 하고 대접을 받는 관계야말로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끌림의 계속됨이다.
다음으로 '싸립문에 붙박이된 기다림'이다. '오지 않는다 혹은 죽었다'의 개념이 아닌 그래서 기다림의 계속됨과 '기다릴 것이다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사이의 갈등 속에서 '붙박이 되어 기다릴 것'이란 믿음의 지속성이다.
이 소설에서 '나이 들어 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한 삶의 열쇠를 뚜렷하게 제시한 영상에서 할머니와 외삼촌은 인물 간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말하자면 천륜이다. 그래서 할머니를 통한 두 개의 영상은 어쩌면 의무인 동시에 일방 동행이 가능한 관계이다. 이는 곧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주인공과 옛집을 찾아온 남자와의 사이는 천륜도 아니고, 관계를 지속해야할 의무 관계도 아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독백처럼 반문한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왜 옛집을 찾아 오셨나요?
(저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실향민이라고 느껴집니다.) >
그리고는 '일방 통행'이 아닌 '일방 통행'일 수 없는 '선택의 관계'에서 '혹시'라는 완곡함과 '만약'이라는 가정이 따른다.
<혹시 당신도 저와 같은 소망을 품고 지내 온 것이라면 당신은 그런 사람을 이제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만약 당신이 원하신다면 원하실 때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으세요.>
끝으로 주인공은 여자로서 서는 것뿐만 아니라, 피난 가던 때 본 눈 속에 서 있는 나무와 같이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가능성 위에서 굳건히 서고자 한다. 겨울. 들창를 열고 눈의 세계를 아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 소설에서 김채원은 주로 대상의 ‘실체 없음’과 ‘모호함’이 결국은 삶임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소설이 단순한 삶의 표현이 아니다.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자기 고백을 통해 한 개인이 자신의 내적인 열망과 현실적 삶의 관계 속에서 사색의 단계를 한 차원 끌어 올린다. 결국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인식과 함께 순수한 열망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구성 단계의 흐름에 진한 매력을 느낀 작품이다. 또한 작품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을 위에 제시한 내용 외에는 새로이 추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작품을 읽고 난 후의 나의 감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작품 속에 작가가 있고 작가의 표현이 바로 독자의 가슴으로 이어진다. 다만 글의 내용을 얼마나 깊이 있게 읽느냐, 어떻게 독자의 삶 속에 반영되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때문에 보통 때는 책만 들면 눈이 내리 깔려서 잠이 빠지기 다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75쪽 분량의 중편임에도 단숨에 읽어 내려간 단 하나의 작품이다.
<2006.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