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70년대 (수필)
우리의 70년대.
대학생인 내 딸들은 아무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도 있어서겠지만 내가 적극 권장해서 그러는 것이다. 나는 딸들에게 수시 때때로 그 어떤 자리에서건 별로 “친해지지” 않았을 적에 술 먹지 못하노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하라며 거절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다행히 요즈음은 몇 년 전과 달리 신입생 환영회 때 억지로 술을 먹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그러자니 나또한 당연히 알코올을 입에 대지 않는다. 때로 특별한 자리에서 사람들이 흔치않은 술이라고 권할 때면 한 모금 해볼까 싶은 생각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싶어서 사양 한다.
내가 딸들에게 금주를 권장하는 것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상처 입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이다. 지금도 늦은 밤이면 술집이 즐비한 골목이건 대로변이건 술 먹고 웩웩거리는 여자 친구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젊은 녀석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저거 저러다가 어디 여관으로 끌고 가는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내 자식이 아니지만 몹시 언짢다.
그러니까 내가 아이들에게 금주를 강력히 권장하는 것은 건강을 생각하는 면도 있지만 오로지 그 문제 때문이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개방적이며 무질서하고 순결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알코올을 접하면 당연히 실수가 있을 것 같아서 두려운 것이다. 때론 이렇게 심하게 구는 게 아이들에게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한 단면을 빼앗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지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른 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음주 문화를 생각하면 우리의 70년대는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때엔 술을 마셔도 요즈음처럼 폭음은 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처럼 소주를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그때 처음 나온 쌀 막걸리도 더러 마셨지만 주로 생맥주를 많이 마셨다. 그것은 알코올 도수도 높지 않고 양도 많아서 배고플 때 한 잔씩 들이키기도 했었다.
그 시절 술집에서 개그맨 주병진씨를 봤던 생각이 난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주병진씨는 자신의 이름 풀이를 이렇게 하고 있었다. “술 주자, 병 병자, 진로 진짭니다.” 그러자 사람들 와하 웃고 박수를 치고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술을 권했다. 세상에나! 주병진씨 그 술을 사양않고 다 받아 마셨다. 정말 이름값을 톡톡히 한 사람으로 기억난다.
70년대를 묘사한 최인호씨의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소설에 보면 한쪽 뒷주머니엔 “갈매기의 꿈”을 또 한쪽에는 “어린왕자”를 꽂고 한 손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고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그때엔 실제로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라켓을 들고 운동복 차림으로 시내를 활보하다니! 내 말을 들은 아이들이 그게 뭐냐고 막 웃는다.
일전에 애들 아빠와 함께 대학로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 아직도 레스토랑 “오감도”가 있었다. 20몇 년 전에 보던 간판이 아직도 있다는 게 신기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결혼 후 줄곧 시골에 살았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몇 해가 지났건만, 바쁘기도 하고 딱히 그쪽을 갈 일이 없어서 모르고 살았었는데. 그 장소에 아직 그 찻집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간판을 새로 설치한 것도 같고, 그사이 주인이 몇 번 뀌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곳을 보고 있자 우리의 젊은 시절이 생각나서 잠시 미소가 떠올랐다.
1층에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던 그 집은 순전히 이름 때문에 찾게 되었다. “오감도”는 젊은 날 몸살 나게 좋아했던 천재 작가 “이상”의 시 제목이 아니던가! 그런데 “오감도”를 글자 한자도 안 빼먹고 끝까지 읽거나, 그 뜻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그 길 건너 “샘터” 건물에 “난다랑”이라는 찻집도 아직 그대로였다. 그곳에 유럽의 카페 골목처럼 옥외에 탁자를 설치해 놓았을 때가 기억난다. 그날 우린 밥 먹을 곳을 찾다가 그 특이한 광경에 이끌려 밥 먹을 돈으로 차를 마셨다. 물론 비스킷 몇 쪽이 나오긴 했지만 그 시절 우린 주린 배를 채우는 일보다 남다른 분위기에서의 차 한 잔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그곳을 천천히 걸으며 그때에만 존재했었던 우리의 꿈과 젊은 날의 고뇌와 친구들을 더듬어보는 좋은 시간을 가져봤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내 남편은 유일하게 젊은 날 청바지를 입지 않았던 사람이다. 지방의 여유 있는 집 장남인 남편은 데이트 시에도 언제나 정장차림이었다. 반면 나는 언제나 청바지 차림이었다. 데이트할 때면 이따금 내 청바지를 못마땅해 했지만 나는 전혀 굴하지 않고 거의 1년 내내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청바지는 참 편하다. 아무데나 뒹굴어도 되고, 몇날 며칠 갈아입지 않아도 티도 안 나고 또 위에다 무엇을 걸쳐도 폼이 났다. 그러니 용돈이나 옷이 궁했던 그 시절엔 제격이었다. 그래서 구박을 받는 면도 있었다. 데이트 할 때 아무데나 털썩 앉아도 무심했던 남자가 어느 날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자, 공원의 의자에 앉는데도 얼른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서 깔아주는 것이었다. 흰 원피스에 뭐가 묻을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내친구중 한명은 야외에서 데이트할 때 남자친구가 손수건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자켓을 벗어서 깔아주더라는 친구도 있었다. 그때의 남자들은 여자를 보호해주는 걸 신사도의 척도로 삼았던 걸까.
초등학교 동창인 남편과는 어영부영 만난 것까지 치면 7년을 사귀다 결혼했다. 연애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이라면 어쩔 수 없이 둘이 밤을 보낸 사건일 것이다. 2년여를 사귀면서도 손만 잡고 다녔던 우리가 첫 키스를 나눈 것은 술 때문이었다. 법대생이었던 남편은 대학 입학 때부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우린 한 번 만나면 정말 헤어지기가 싫었다. 특히 남편이 군대 영장을 받은 날은 생맥주를 진창 들이키고 취해서 늦도록 앉아 있다가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집엘 가는데 도중에 통금 싸이렌이 울리는 것이었다. 정말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찰서 신세를 지지 않으려면 중간에 내려서 모텔을 찾아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내게 돈이 없었다. 평소엔 비교적 여유 있게 돈을 가지고 다니던 남편도 술값을 내느라 그랬는지 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가뜩이나 처음 들어간 모텔이 부끄럽기도 한데 돈조차 없었으니 더 부끄러웠다. 남편이 별수 없이 차고 있던 시계를 맡겼다.
그때의 우린 촌스러울 정도로 순수해서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웠다. 사건이라고 해야 새벽녘이 되자 조급해진 듯 남편이 갑자기 입술을 부딪쳐왔다. 물론 그 이상은 없었다. 그 키스도 불같은 열정과 생기로 가득한 젊은 시절이었지만 술의 힘이 아니었음 불가능했을 것이다. 힘들게 시도한 그 키스는 서툴러서 달콤함 보다는 어색함만을 남겼다.
다음날 다시 만났는데 차마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찻집주인이 가져다주는 물을 탁자에 부어놓고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키스를 하고나니 갑자기 그의 여자가 다 된 것 같기도 하고 어찌나 마음이 이상하던지, 그날 무슨 말을 했었고, 어떻게 헤어졌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때 부끄러워서 차마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노라고 고백하자 남편 왈.“니도 그랬냐?..나도 그랬는디..”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우린 그랬다. 지금 부쩍부쩍 커가는 네 딸들을 보고 있노라니 남편이 나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내 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상대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대학생인 내 딸들은 아무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도 있어서겠지만 내가 적극 권장해서 그러는 것이다. 나는 딸들에게 수시 때때로 그 어떤 자리에서건 별로 “친해지지” 않았을 적에 술 먹지 못하노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하라며 거절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다행히 요즈음은 몇 년 전과 달리 신입생 환영회 때 억지로 술을 먹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그러자니 나또한 당연히 알코올을 입에 대지 않는다. 때로 특별한 자리에서 사람들이 흔치않은 술이라고 권할 때면 한 모금 해볼까 싶은 생각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싶어서 사양 한다.
내가 딸들에게 금주를 권장하는 것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상처 입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이다. 지금도 늦은 밤이면 술집이 즐비한 골목이건 대로변이건 술 먹고 웩웩거리는 여자 친구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젊은 녀석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저거 저러다가 어디 여관으로 끌고 가는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내 자식이 아니지만 몹시 언짢다.
그러니까 내가 아이들에게 금주를 강력히 권장하는 것은 건강을 생각하는 면도 있지만 오로지 그 문제 때문이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개방적이며 무질서하고 순결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알코올을 접하면 당연히 실수가 있을 것 같아서 두려운 것이다. 때론 이렇게 심하게 구는 게 아이들에게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한 단면을 빼앗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지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른 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음주 문화를 생각하면 우리의 70년대는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때엔 술을 마셔도 요즈음처럼 폭음은 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처럼 소주를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그때 처음 나온 쌀 막걸리도 더러 마셨지만 주로 생맥주를 많이 마셨다. 그것은 알코올 도수도 높지 않고 양도 많아서 배고플 때 한 잔씩 들이키기도 했었다.
그 시절 술집에서 개그맨 주병진씨를 봤던 생각이 난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주병진씨는 자신의 이름 풀이를 이렇게 하고 있었다. “술 주자, 병 병자, 진로 진짭니다.” 그러자 사람들 와하 웃고 박수를 치고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술을 권했다. 세상에나! 주병진씨 그 술을 사양않고 다 받아 마셨다. 정말 이름값을 톡톡히 한 사람으로 기억난다.
70년대를 묘사한 최인호씨의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소설에 보면 한쪽 뒷주머니엔 “갈매기의 꿈”을 또 한쪽에는 “어린왕자”를 꽂고 한 손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고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그때엔 실제로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라켓을 들고 운동복 차림으로 시내를 활보하다니! 내 말을 들은 아이들이 그게 뭐냐고 막 웃는다.
일전에 애들 아빠와 함께 대학로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 아직도 레스토랑 “오감도”가 있었다. 20몇 년 전에 보던 간판이 아직도 있다는 게 신기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결혼 후 줄곧 시골에 살았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몇 해가 지났건만, 바쁘기도 하고 딱히 그쪽을 갈 일이 없어서 모르고 살았었는데. 그 장소에 아직 그 찻집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간판을 새로 설치한 것도 같고, 그사이 주인이 몇 번 뀌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곳을 보고 있자 우리의 젊은 시절이 생각나서 잠시 미소가 떠올랐다.
1층에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던 그 집은 순전히 이름 때문에 찾게 되었다. “오감도”는 젊은 날 몸살 나게 좋아했던 천재 작가 “이상”의 시 제목이 아니던가! 그런데 “오감도”를 글자 한자도 안 빼먹고 끝까지 읽거나, 그 뜻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그 길 건너 “샘터” 건물에 “난다랑”이라는 찻집도 아직 그대로였다. 그곳에 유럽의 카페 골목처럼 옥외에 탁자를 설치해 놓았을 때가 기억난다. 그날 우린 밥 먹을 곳을 찾다가 그 특이한 광경에 이끌려 밥 먹을 돈으로 차를 마셨다. 물론 비스킷 몇 쪽이 나오긴 했지만 그 시절 우린 주린 배를 채우는 일보다 남다른 분위기에서의 차 한 잔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그곳을 천천히 걸으며 그때에만 존재했었던 우리의 꿈과 젊은 날의 고뇌와 친구들을 더듬어보는 좋은 시간을 가져봤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내 남편은 유일하게 젊은 날 청바지를 입지 않았던 사람이다. 지방의 여유 있는 집 장남인 남편은 데이트 시에도 언제나 정장차림이었다. 반면 나는 언제나 청바지 차림이었다. 데이트할 때면 이따금 내 청바지를 못마땅해 했지만 나는 전혀 굴하지 않고 거의 1년 내내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청바지는 참 편하다. 아무데나 뒹굴어도 되고, 몇날 며칠 갈아입지 않아도 티도 안 나고 또 위에다 무엇을 걸쳐도 폼이 났다. 그러니 용돈이나 옷이 궁했던 그 시절엔 제격이었다. 그래서 구박을 받는 면도 있었다. 데이트 할 때 아무데나 털썩 앉아도 무심했던 남자가 어느 날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자, 공원의 의자에 앉는데도 얼른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서 깔아주는 것이었다. 흰 원피스에 뭐가 묻을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내친구중 한명은 야외에서 데이트할 때 남자친구가 손수건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자켓을 벗어서 깔아주더라는 친구도 있었다. 그때의 남자들은 여자를 보호해주는 걸 신사도의 척도로 삼았던 걸까.
초등학교 동창인 남편과는 어영부영 만난 것까지 치면 7년을 사귀다 결혼했다. 연애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이라면 어쩔 수 없이 둘이 밤을 보낸 사건일 것이다. 2년여를 사귀면서도 손만 잡고 다녔던 우리가 첫 키스를 나눈 것은 술 때문이었다. 법대생이었던 남편은 대학 입학 때부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우린 한 번 만나면 정말 헤어지기가 싫었다. 특히 남편이 군대 영장을 받은 날은 생맥주를 진창 들이키고 취해서 늦도록 앉아 있다가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집엘 가는데 도중에 통금 싸이렌이 울리는 것이었다. 정말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찰서 신세를 지지 않으려면 중간에 내려서 모텔을 찾아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내게 돈이 없었다. 평소엔 비교적 여유 있게 돈을 가지고 다니던 남편도 술값을 내느라 그랬는지 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가뜩이나 처음 들어간 모텔이 부끄럽기도 한데 돈조차 없었으니 더 부끄러웠다. 남편이 별수 없이 차고 있던 시계를 맡겼다.
그때의 우린 촌스러울 정도로 순수해서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웠다. 사건이라고 해야 새벽녘이 되자 조급해진 듯 남편이 갑자기 입술을 부딪쳐왔다. 물론 그 이상은 없었다. 그 키스도 불같은 열정과 생기로 가득한 젊은 시절이었지만 술의 힘이 아니었음 불가능했을 것이다. 힘들게 시도한 그 키스는 서툴러서 달콤함 보다는 어색함만을 남겼다.
다음날 다시 만났는데 차마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찻집주인이 가져다주는 물을 탁자에 부어놓고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키스를 하고나니 갑자기 그의 여자가 다 된 것 같기도 하고 어찌나 마음이 이상하던지, 그날 무슨 말을 했었고, 어떻게 헤어졌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때 부끄러워서 차마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노라고 고백하자 남편 왈.“니도 그랬냐?..나도 그랬는디..”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우린 그랬다. 지금 부쩍부쩍 커가는 네 딸들을 보고 있노라니 남편이 나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내 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상대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