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잘 계시지요?
그의 눈썹은 유난히 짙었다.
살짝 치켜올라간 긴 속눈섭을 지닌 아름다운 눈과, 환하게 웃는 모습은 갸름하고 거므스레한 얼굴을 빛나게 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손과 체구를 지녔지만 성정은 급하고 불 같았다.
나는 그처럼 적당하고 보기좋은 손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그는 그 손으로 못하는 게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별나게 장미를 잘 가꾸던 그는 우리 아버지다.
오월!
동네에 빈 집이 한 채 있는데 음울한 침묵과 시나브로 사위어 가는 퇴락을 못견뎌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담 너머로 붉디붉은 장미꽃이 얼굴을 내밀었다.
초록 덤불에 뒤덮인 낡은 담이 금새 활기를 띤다.
흔히 화원에서 파는 장미꽃 말고 저렇게 피어나는 장미를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가 책을 좋아하고 문학적인 감수성이 풍부했던 반면 손으로 하는 일에 그리 섬세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가슴으로 느끼는 감성 대신에 손으로 하는 어떤 일에도 어려움을 몰랐으며 특히 꽃을 가꾸는 일은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지금 그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많은 꽃들이 자라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제일 공을 들여 가꾸던 장미꽃밭은 그 중 으뜸이었다. 요즘은 장미의 품종이 수없이 시도된 개량으로 그 색깔이며 모양이 다양해졌지만 그 시절에만 해도 주로 홍장미가 많았고 백장미는 참으로 귀했었다.
아버지가 피워낸 백장미의 그 순결하고 보드랍던 꽃잎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붉다 못해 검은 빛을 띤 흑장미도 참 고혹적이었다.
아버지의 장미 사랑은 각별해서 밤마다 꽃밭에 전깃불을 끌어내 불빛에 따라나온 진딧물을 잡아내는 일이 큰 일과였다. 꽃송이 송이마다 조심스럽게 잎을 벌려 속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있는 진딧물들을 나무젓가락으로 집어내시던 모습은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했다.
동네 어귀에 자리잡은 우리집에 장미꽃이 만발하면 동네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의 찬탄이 끊이지 않았다. 한 번은 우리 집 앞을 지나던 할머니 한 분이 문득 굽은 허리를 쭈욱 펴며 '하~ 고것참 이쁘구나' 하고 다시 구부정한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고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셨다.
학교가 멀어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데 늦잠이라도 잔 날이면 지각을 각오해야 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한아름 장미꽃다발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내가 들고 간 풍성하고 화려한 장미꽃다발은 선생님의 꾸중을 감탄과 기쁨으로 바꾸어 놓는 마술 지팡이가 되리라는 걸 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일로 집안이 기울고 뜰도 없는 집에 살게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처마 밑에 나팔꽃을 심어 지붕위로 넝쿨을 올려 꽃을 피워내셨다. 나는 마음이 아파 속으로 생각했다. 얼른 돈을 많이 벌어 뜰이 넓은 집에서 살게 해드려야지.
그래서 옛날처럼 온갖 화초를 다 심고 장미꽃도 마음껏 가꾸며 사시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럴만큼 돈을 벌어본 적도 없지만 그럴 새도 없이 아버지는 그 급한 성격처럼 빨리 우리 곁을 떠나버리셨다.
여기저기 담장 너머 초록 수풀 사이로 요요히 피어있는 붉은 장미는 내게 그리움이다.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를 어떻게 무장해제 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섯 자식 가운데 유난히 내 앞에서는 봄눈 녹아버리듯 누그러지던 아버지의 기억은 내게 늘 다사롭기만 했다.
아버지의 초상은 그리하여 내게 아름다운 눈웃음과 햐얀 이가 드러나는 환한 미소, 어느날인가 무엇때문인지 내게 대한 미안함으로 꼭 쥐어주던 따스한 손길로 남아 있다.
엄마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지만 나는 그럴 때조차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립고 엄마는 가슴 아프다.
오월, 모두 다투어 부모님의 좋은 기억을 얘기하기 바쁘고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인품으로 묘사한다.
우리 엄마, 아버지는 결점도 인간적인 실수도 많았던 분들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마음에 사무친다. 부모가 잘 나고 훌륭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공이가 많이 박힌 나무등걸이라도 그늘은 짙고 넓듯이 부모는 부모니까 좋은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눈물을 안습이라 한다 해서 어이없어 했는데 어쩐지 자꾸 안습이 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 엄마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해드린 적도 없는 딸이 고작 혼잣말을 해볼 뿐이다.
거기서 잘 계시지요? 엄마,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