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경북 영양 문학 기행기. 끝. -하회마을-
‘청송군 진보면 신촌리’, “세미정식당” 에서 닭죽과, 닭갈비를 먹었습니다. 닭죽은 국물이 뽀얗고 입술이 쩍쩍 달라붙으며 어찌나 고소하던지 식당을 나서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짝짝 박수를 치며 “아주 잘 먹었습니다”가 튀어나왔습니다. 그쪽을 들르게 되면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입니다.
그곳은 약수가 유명한 곳으로 도로가에도, 식당 마당에도 철분이 많이 든 약수가 철철 넘쳤습니다. 약수는 예상했던 대로 한모금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어찌나 톡! 쏘는지 겨우 병아리 눈물만큼만 맛을 봤습니다. 저는 못 먹어도 남편 주려고 작은 물병에 하나 가득 담아왔습니다.
2시 16분, <하회마을>
든든한 중식으로 포만감을 느끼며 다음 장소인 하회마을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부지런한 이명순차장님 어느새 작업을 해놨는지 차에 오르자 모두에게 수건과 고추장, 그리고 영양군의 선물인 우산이 든 봉지를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저는 자신이 좀더 낭만적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하루 반나절 동안 집 떠나있으면서 그걸 알았습니다. 모든 낯섦이 불편했습니다. 늘 일탈을 꿈꾸면서도 그 정도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강렬한 태양아래 고독이 느껴지는 시골의 한적함은 내가 늘 꿈꾸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졸다 시계를 보니 2시 54분, 커튼을 걷자 뭔가 익숙한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건 바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아파트와 집들이 조밀한 도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버스가 안동시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다리를 건너서 시내를 조금 빠져나가자 마을 입구에 갖가지 모양의 천하대장군과 상품들이 즐비한 하회마을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은 많은 자동차와 사람들이 붐비고 있어서 평소 서울 근교의 유원지처럼 느껴졌습니다.
정확한 지명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마을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습니다. 이모저모 역사와 인물에 박식한 “이기순”선생님께서 “하회마을은 낙동강물이 이곳에서 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이선생님만 따라다니면 많은 것을 듣게 되겠구나 싶어서 곁에 따라붙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곳들처럼 그곳도 몇 번을 다녀가신 듯 아무것에도 호기심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그냥 획획 지나가셨습니다. 그나마 따라다니며 메모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저 혼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어서 그때부터는 혼자 돌아다녔습니다.
구경하기전 이선생님께 들었던 대로 일반 가정집들도 간판을 내걸고 민박이나 전통 물건을 팔고 있었습니다. 워낙 수입원이 없어서 그러려니 싶어서 이해는 됐지만, 집 앞에 내건 간판들이 하나같이 플라스틱이어서 그건 화가 나려했습니다.
하회마을은 우리나라에서도 전통 가옥이 많은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말 문화재청에 따지고 싶어졌습니다. 플라스틱 간판을 다 떼어내고 나무로 만들어 달거나, 한지에 붓글씨로 멋지게 써서 붙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선생님과 일행 몇이서 본 게 “삼신당”이라는 무지무지 큰 느티나무였습니다. 소원을 비는 나무랍니다. 그래서인지 나무 둘레에 쳐진 새끼줄에는 수많은 하얀 편지가 끼여 있었습니다. 저도 식구 모두의 안녕을 비는 종이를 끼워놓고 돌아섰습니다. 이선생님과 헤어진 게 거기서부터 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외롭거나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부터는 어느 단체 관광객들 틈에 끼여서 많은 상식을 주워듣기도 했으니까요.
<충효당>
서애 “유성룡” 선생님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종가랍니다. 유성룡 선생님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랍니다. 선생님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답니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들어섰을 때, 대청마루에 젊은 세 녀석이 무릎을 꿇고 후손이신 듯한 할아버지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루에 오르지 마세요.”라는 푯말은 뭐고 쟤네들은 뭐야? 그들은 곧 일어섰고, 보니까 커다란 촬영용 특수 카메라를 메고 있었습니다. 단순 관광객이 아닌듯해서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한국종합예술대학” 영상학부 학생들이랍니다.
정원에는 간지럼 타는 나무도 있어서 몸통을 살살 긁어봤더니 신기하게 저 나무 위 잎까지 잘게 흔들렸습니다. 나무 밑동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나눠진 굉장히 큰 소나무도 있었습니다. 그곳은 두 번이나 들락거렸습니다. 처음 우리 일행 누군가를 따라서 들렀을 때는 마당만 한바퀴 돌다 나오기에 따라 나왔다가 일행과 헤어지게 되자, 다시 혼자 들어가서 여러 유품들을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유품을 전시해놓은 “영모각”에는 선생님의 필첩과 임금으로부터 받은 교지와 수많은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키가 아주 크셨는지 가죽신은 완전 항공모함이었습니다. 문득 키가 큰 탈랜트 류시원이 생각났습니다.
장원 급제 시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어사화”도 봤습니다. 그 막대기는 TV 사극에서 보던 것 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그 옛날엔 영롱하게 흔들거렸을 종이꽃은 무슨 색인지 조차 구분키 어렵게 누렇게 변해있었습니다. 접혀있는 꽃잎은 끝이 뾰족하게 잘린 게 꼭 카네이션을 닮았습니다. 사건이나 날씨 등을 기록했다는 “구주대통력”은 요즈음의 일기장 같은 것이랍니다. 유성룡선생님은 1607년에 사망했으니, 올해가 딱 400년이 되는 해랍니다. “충효당” 건너편에 있는 “양진당”은 시간이 없어서 대문만 쳐다보고 왔습니다.
탈렌트 류시원의 집도 봤습니다. 그 집은 별장 용도로 쓰이고 있으며, 이따금 외국 관광객이 오면 묶게 하기도 한답니다. 말이 드나들 수 있다는 높은 소슬 대문이었는데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내부가 궁금해서 담 너머로라도 보려고 했더니, 담들이 유난히 높아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 불친절합니다.
짚공예 체험장도 있었으나 아줌마 두어 명이 아이들에게 지게를 지우고 사진을 찍느라고 애쓰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다른 팀들 속에 끼여 혼자 다니다가 문득 시계를 보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데 강미희선생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다들 왔는데 저만 빠졌답니다. 헐레벌떡 달려갔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
우리의 참석 인원 면면을 보자면 여타의 모임 같지 않고 직업군이 그다지 다양하지 않습니다. 연령층도 다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로 중, 노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나이든 사람은 누가 봐줘도 그만 안 봐줘도 그만인 시와 수필, 소설들을 쓰지만, 젊은 친구들은 실력이 있다 해도 돈벌이도 괜찮고 이름도 널리 알릴 수 있는 드라마 대본이나 영화 시나리오에 매달립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문인회 두어 군데를 참석해봤을 때 다들 머리가 희끗한 중, 노년층이셨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때 생의 보람을 느낍니다. 문인들은 삶의 노정에서 느끼고 깨우친 것을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도 안 되는 이 일에 매진하는 가 봅니다. 인생의 최대 목표는 우리의 영혼을 업그레이드 시켜서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뉘엿뉘엿 해가 집니다. 차도를 따라 곁을 흐르는 작은 강줄기, 부드러운 미풍이 물 위를 스쳐 잔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물은 작은 파편으로 반짝이며 끝없이 흘러 흘러 먼 곳의 사념과 유쾌한 소식을 전해줍니다.
저는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수고하신 김창동사장님, 김진시회장님 그리고 오가며 가장 애쓰신 권재도선생님, 이명순선생님 및 많은 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상으로 경북 영양 문학기행 후기를 마칩니다.^^
그곳은 약수가 유명한 곳으로 도로가에도, 식당 마당에도 철분이 많이 든 약수가 철철 넘쳤습니다. 약수는 예상했던 대로 한모금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어찌나 톡! 쏘는지 겨우 병아리 눈물만큼만 맛을 봤습니다. 저는 못 먹어도 남편 주려고 작은 물병에 하나 가득 담아왔습니다.
2시 16분, <하회마을>
든든한 중식으로 포만감을 느끼며 다음 장소인 하회마을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부지런한 이명순차장님 어느새 작업을 해놨는지 차에 오르자 모두에게 수건과 고추장, 그리고 영양군의 선물인 우산이 든 봉지를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저는 자신이 좀더 낭만적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하루 반나절 동안 집 떠나있으면서 그걸 알았습니다. 모든 낯섦이 불편했습니다. 늘 일탈을 꿈꾸면서도 그 정도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강렬한 태양아래 고독이 느껴지는 시골의 한적함은 내가 늘 꿈꾸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졸다 시계를 보니 2시 54분, 커튼을 걷자 뭔가 익숙한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건 바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아파트와 집들이 조밀한 도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버스가 안동시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다리를 건너서 시내를 조금 빠져나가자 마을 입구에 갖가지 모양의 천하대장군과 상품들이 즐비한 하회마을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은 많은 자동차와 사람들이 붐비고 있어서 평소 서울 근교의 유원지처럼 느껴졌습니다.
정확한 지명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마을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습니다. 이모저모 역사와 인물에 박식한 “이기순”선생님께서 “하회마을은 낙동강물이 이곳에서 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이선생님만 따라다니면 많은 것을 듣게 되겠구나 싶어서 곁에 따라붙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곳들처럼 그곳도 몇 번을 다녀가신 듯 아무것에도 호기심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그냥 획획 지나가셨습니다. 그나마 따라다니며 메모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저 혼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어서 그때부터는 혼자 돌아다녔습니다.
구경하기전 이선생님께 들었던 대로 일반 가정집들도 간판을 내걸고 민박이나 전통 물건을 팔고 있었습니다. 워낙 수입원이 없어서 그러려니 싶어서 이해는 됐지만, 집 앞에 내건 간판들이 하나같이 플라스틱이어서 그건 화가 나려했습니다.
하회마을은 우리나라에서도 전통 가옥이 많은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말 문화재청에 따지고 싶어졌습니다. 플라스틱 간판을 다 떼어내고 나무로 만들어 달거나, 한지에 붓글씨로 멋지게 써서 붙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선생님과 일행 몇이서 본 게 “삼신당”이라는 무지무지 큰 느티나무였습니다. 소원을 비는 나무랍니다. 그래서인지 나무 둘레에 쳐진 새끼줄에는 수많은 하얀 편지가 끼여 있었습니다. 저도 식구 모두의 안녕을 비는 종이를 끼워놓고 돌아섰습니다. 이선생님과 헤어진 게 거기서부터 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외롭거나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부터는 어느 단체 관광객들 틈에 끼여서 많은 상식을 주워듣기도 했으니까요.
<충효당>
서애 “유성룡” 선생님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종가랍니다. 유성룡 선생님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랍니다. 선생님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답니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들어섰을 때, 대청마루에 젊은 세 녀석이 무릎을 꿇고 후손이신 듯한 할아버지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루에 오르지 마세요.”라는 푯말은 뭐고 쟤네들은 뭐야? 그들은 곧 일어섰고, 보니까 커다란 촬영용 특수 카메라를 메고 있었습니다. 단순 관광객이 아닌듯해서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한국종합예술대학” 영상학부 학생들이랍니다.
정원에는 간지럼 타는 나무도 있어서 몸통을 살살 긁어봤더니 신기하게 저 나무 위 잎까지 잘게 흔들렸습니다. 나무 밑동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나눠진 굉장히 큰 소나무도 있었습니다. 그곳은 두 번이나 들락거렸습니다. 처음 우리 일행 누군가를 따라서 들렀을 때는 마당만 한바퀴 돌다 나오기에 따라 나왔다가 일행과 헤어지게 되자, 다시 혼자 들어가서 여러 유품들을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유품을 전시해놓은 “영모각”에는 선생님의 필첩과 임금으로부터 받은 교지와 수많은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키가 아주 크셨는지 가죽신은 완전 항공모함이었습니다. 문득 키가 큰 탈랜트 류시원이 생각났습니다.
장원 급제 시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어사화”도 봤습니다. 그 막대기는 TV 사극에서 보던 것 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그 옛날엔 영롱하게 흔들거렸을 종이꽃은 무슨 색인지 조차 구분키 어렵게 누렇게 변해있었습니다. 접혀있는 꽃잎은 끝이 뾰족하게 잘린 게 꼭 카네이션을 닮았습니다. 사건이나 날씨 등을 기록했다는 “구주대통력”은 요즈음의 일기장 같은 것이랍니다. 유성룡선생님은 1607년에 사망했으니, 올해가 딱 400년이 되는 해랍니다. “충효당” 건너편에 있는 “양진당”은 시간이 없어서 대문만 쳐다보고 왔습니다.
탈렌트 류시원의 집도 봤습니다. 그 집은 별장 용도로 쓰이고 있으며, 이따금 외국 관광객이 오면 묶게 하기도 한답니다. 말이 드나들 수 있다는 높은 소슬 대문이었는데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내부가 궁금해서 담 너머로라도 보려고 했더니, 담들이 유난히 높아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 불친절합니다.
짚공예 체험장도 있었으나 아줌마 두어 명이 아이들에게 지게를 지우고 사진을 찍느라고 애쓰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다른 팀들 속에 끼여 혼자 다니다가 문득 시계를 보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데 강미희선생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다들 왔는데 저만 빠졌답니다. 헐레벌떡 달려갔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
우리의 참석 인원 면면을 보자면 여타의 모임 같지 않고 직업군이 그다지 다양하지 않습니다. 연령층도 다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로 중, 노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나이든 사람은 누가 봐줘도 그만 안 봐줘도 그만인 시와 수필, 소설들을 쓰지만, 젊은 친구들은 실력이 있다 해도 돈벌이도 괜찮고 이름도 널리 알릴 수 있는 드라마 대본이나 영화 시나리오에 매달립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문인회 두어 군데를 참석해봤을 때 다들 머리가 희끗한 중, 노년층이셨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때 생의 보람을 느낍니다. 문인들은 삶의 노정에서 느끼고 깨우친 것을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도 안 되는 이 일에 매진하는 가 봅니다. 인생의 최대 목표는 우리의 영혼을 업그레이드 시켜서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뉘엿뉘엿 해가 집니다. 차도를 따라 곁을 흐르는 작은 강줄기, 부드러운 미풍이 물 위를 스쳐 잔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물은 작은 파편으로 반짝이며 끝없이 흘러 흘러 먼 곳의 사념과 유쾌한 소식을 전해줍니다.
저는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수고하신 김창동사장님, 김진시회장님 그리고 오가며 가장 애쓰신 권재도선생님, 이명순선생님 및 많은 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상으로 경북 영양 문학기행 후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