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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남 뱃노래의 작시자?

김경선 5 1899
석호 시 조두남 곡 뱃노래에서
석호=조두남인가요?
5 Comments
열린세상 2007.10.19 16:34  
예,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강하라 2007.10.19 22:42  
석호가 조두남 선생님의 호가 맞는지- 찾다가 이글을 다 올립니다-

다들 잘아시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면 좋을듯 해서요-

바람도 쌩쌩 불고 추워지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내용출처 -  http://blog.naver.com/kwank99?Redirect=Log&logNo=30022116809

                → 재봉틀의 국어방에서 퍼왔습니다



▶ 조두남(趙斗南.1912.10.9∼1984)

 
작곡가ㆍ피아노 교육자. 평양 출생. 미국인 신부 J. 캐논스에게 6세 때 작곡을 배운 뒤,

1923년 11세 때 가곡 <옛이야기>를 작곡, 작곡가로 데뷔하였다.

청년기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滿洲)에 가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8ㆍ15 직후 귀국,

6ㆍ25 후에는 마산(馬山)에 정착하여 피아노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장, 한국음악협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평소 민족주의적 정서가 가득한 가곡을 많이 작곡하였으며, 1933년 윤해영(尹海榮)의 시에

곡을 붙인 <선구자>는 한국인의 대표적 애창가곡이다.


 작곡가. 민족의 가곡 <선구자>의 작곡가. 호 석호(夕湖). 평양에서 태어나 6세 때 미국인

신부 조지프 캐논스에게 작곡 공부를 시작하였다. 1923년 가곡 <옛이야기>를 작곡하였는데

이때가 나이 11세였다. 평양 숭실학교에서 수학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용정 등지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서울에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6ㆍ25전쟁 후 마산에 정착, 피아노 교육에 주력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청년기에는 주로 서정적인 우국의 노래를, 장년기에는 민족교육의 장단과 가락이 어우러진

민족주의적인 노래를 많이 작곡하였다.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 마산지부초대지부장을 역임했고, 경상남도문화상 심사위원,

한국음악협회 고문 등을 지내며 지역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경상남도문화상(1962), 눌원문화상(1976), MBC창사20주년기념 가곡공로상(1981) 등을

수상하였다.


【가곡】<선구자> <그리움> <제비> <접동새>

【교성곡】<농촌>

【오페레타】<에밀레종>

【피아노곡】<환상무곡>

【가곡집】<옛이야기>(1962) <분수>(1962) <산도화>(1970)

【피아노 작품집】<환상무곡>(1970)

【음반】<조두남가곡집>(1973) <조두남가곡선집>(1979)

【수상집】 <선구자>(1975) <그리움>(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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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작곡자 조두남> - [동아일보](1979. 5. 30)

  조두남이 2년 동안의 끈질긴 투병 끝에 다시 일어나 오선지를 펼치고 마지막 작품 구상에

여념이 없다. 조씨가 중풍 증세로 피아노 앞에 쓰러졌던 것은 1977년 3월 6일.

마산 파티마병원에 입원한 조씨는 온 수족이 굳으며 말문을 닫은 채 10여 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조씨가 사경을 헤매자 부인 김민혜(金敏惠)씨와 평소 그를 따르던 마산의 많은

음악도, 예술인들은 한마음으로 그의 조속한 회복을 빌었다.

그들의 기원과 자신의 의지로 조씨는 다시 의식을 되찾았다.

그 후 조씨는 2년 동안에 걸친 투병생활에 작년말부터 청각, 시각, 기억력과 사고력을 차례로

되찾게 되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先驅者)>를 작곡한 것은

22세 때인 1932년 10월. 가을도 늦어 드센 북만주 바람이 창문을 두들기던 목단천변(牧丹川邊)

서장안가(西長安街)의 어느 싸구려 여관방이었다.

망국의 한을 안고 이국땅에서 청년기를 보내던 조씨는 어느 날 그의 여관방으로 찾아온 같은

또래의 ‘윤해영(尹海榮)’이라는 청년으로부터 이 가사를 건네받고는 독립투사들이 드나들던

간도 일송정(一松亭) 용정(龍井) 고개와 그들의 말발굽 소리가 스쳐간 해란강(海蘭江)

모래톱 등에서 밤이면 망국의 가슴을 달래주던 용주사(龍珠寺) 종소리를 회상하면서 밤새워

오선지에 곡을 붙여 나갔다는 것.

당초 <용정의 노래>라고 곡명을 붙였던 이 노래가 <선구자>로 바뀌어진 것은 해방 이후.

고향이 평양인 조씨는 6ㆍ25 때 마산으로 피난 나와 지금까지 그대로 정착, <제비>,

<그리움>, <접동새>, <산촌> 등 2백여 곡에 이르는 주옥같은 노래와 <에밀레종> 등

오페레타, 환상곡 등 피아노협주곡 등 많은 작품을 지었고 그간 수많은 문하생도 길러냈다.
鄭宇東 2007.10.23 15:47  
조두남 선생은 호가 석호인데
자기의 시에 작곡하면 예술가 특유의 분류-차별벽 때문에
작사자에는 자신의 아호를 이름 대신 썼습니다.
이런 일은 이흥렬 선생과 구두회 선생에게도 있었는데
이흥렬 선생은 호가 만향이었고
구두회 선생은 호가 향파이었습니다.
김경선 2007.10.24 07:46  
감사합니다.
석호 시 뱃노래,
향파 시 사우월,
만향 시 고향 그리워
.........................
확인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김동연 2007.10.24 14:55  
덕분에 저도 좋은글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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