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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性을 찾아서....

정문종 2 748
  
本性을 찾아서....
- 석헌/허경용 -



아름다운 경치가 소개되면 
누구나 한 번쯤 그 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팔등신 미인을 보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라도 접하게 되면 
한 입 먹어 맛을 즐기고 싶어 한다. 
이처럼 감각에 대한 욕구는 우리의 본능이다.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자기를 다른 사람  
앞에 내세우고 싶어 하는 것도 하나의 본능일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능력은 외부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거나 유지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 부여한 
이런 능력을 탐닉하며 남용하고 있다. 
그로인하여 감각이 무디어져서 
자칫 그 능력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사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감각능력이 많이 
저하되어있는 상태이다. 
맛이 강한 음식을 많이 맛보게 되면 미각이 둔해지고, 
큰소리를 계속 듣게 되면 청각이 둔해진다. 
아름다운 경치를 많이 보게 되면 
어지간한 경치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강한 빛을 계속 보게 되면 시력이 약해진다. 
이렇듯 감각적인 쾌락에 탐닉하다 보면 모든 감각기관의 
감수성이 떨어져 감각능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매일 바꿔 보라, 
그러면 사랑에 대한 감수성이 사라질 것이다. 
감각기관에 자극이 많을수록, 그 강도가 강할수록, 
그 감각기관은 무디어진다. 
그런 상태에서는 내면의 본성(本性)에 대한, 
신성(神性)에 대한 체험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감각으로 인지가 가능한 것들 속에는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 함께 들어있다. 
이 비감각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의 원천이다. 
그것이 바로 신성(神性)이며 본성(本性)이다.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예민한 
감수성과 깨어있음(覺醒狀態)이 필요하다.그러므로 
감각적 탐닉으로 감각을 무디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표현된 형상들, 감각으로 인식이 가능한 것들은 
신성이 현현(顯顯)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나타난 것만 안다면 그것은 중심은 알지 못한 것이다. 
중심을 아는 것이 신성(神性)의 진면목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중심을 알 수 있을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각을 통해 인식자(認識者)인 자기중심(意識體)에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그 하나이다. 그리고 
무심(無心)상태에서 직관(直觀)을 통해 그것을 체험하고 
더 나아가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 다른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중심에 들어가 
자기의 본성을 체험하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그러면 감각을 통해 중심에 이르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는 중심에 있는 근원 에너지에서 
유래한다. 이 에너지가 마음이나 육체를 통과하는 동안 
각종의 에너지로 변화된다. 예를 들면 그 근원 에너지가 
마음, 중추신경, 말초신경, 근육을 통하면 
운동에너지로 변하거나 열에너지로 변화되어, 우리가 
걷기도 하고 팔 다리를 움직이기도 하며 체온을 유지하거나 
몸에 열이 나게 하기도 한다. 한편 마음을 통과한 에너지는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 분노, 공포, 슬픔, 쾌락, 행복감 등....
감정을 나타내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육체적인 감각이나 마음에 감정이 일어 날 때 
그것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발점인 중심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분노가 일어날 때 그 분노를 다시 마음속으로 
가져가고 마음을 거쳐 중심에 이르게 되면 
변화되기 전 에너지의 근원인 중심과 만나게 되어 
본래의 자기, 즉 본성(本性)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즐거움이 솟는다. 이 즐거움을 
마음속에 가져가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따라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그곳에 있는 인식자(認識者)이며 
의식체(意識體)인 본래의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면 통증을 느낀다. 이때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순간 손가락 조직에 충만 되어 있는 에너지에 
변화를 일으킨다. 생리학적으로 보면 손가락 피부에 있는 
통각수용체(pain recepter)에 에너지 변화가 생겨 
이것이 구심신경인 감각신경을 경유하여 
척수의 후근(後根,dorsal root)을 통해 중추신경의 통각 중추에 
이르게 되고 그곳의 에너지 변화는 마음을 거쳐  
인식자(意識體)로 하여금 통증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때 바늘로 찌르는 자극에 의한 에너지 변화가 통증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마음안의 기억 속에 이전의 경험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그 자극에 대한 기억 상태를 바꾸어 놓는다면 
그 자극은 다른 감각으로 느껴지게 된다. 
그러한 예는 최면(催眠)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놓고 돌멩이를 손 위에 올려놓으면서 
얼음 조각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차가운 느낌을 느끼게 된다. 
손바닥 피부에 작용하는 그 돌멩이 자극에 의한 에너지 변화는 
최면을 걸기전과 똑같을 테지만, 최면에 의해 마음에 입력된 
기억상태가 변화되어 있기 때문에 손바닥의 에너지변화가 
마음을 통과하는 동안 최면상태 이전과 달라져서 
인식자는 그 달라진 상태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인식자가 통증을 느끼게 되면 신체적으로는  
손을 움츠리거나 바늘을 빼내는 행동이 나타난다. 
이 행위는 인식자(意識體)로부터 나온 근원 에너지가 
마음을 통해 변화되고 그것이 중추신경, 
척수의 전근(前根, anterior root), 운동신경을 통해 
근육에 수축과 이완을 일으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외부의 자극이 마음을 통해 인식되는 과정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근원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감각기관의 자극 없이 일어나는 변화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외부적인 어떠한 원인이 없는데도 
생각만으로 감정의 변화가 오는 것을 많이 경험한다. 
이 경우에는 생각이라는 사념에너지가 직접 
마음 에너지에 변화를 일으켜 이것이 인식자에 전달된다. 
생각의 종류에 따라 사념에너지의 양상이 다르고 
이 각각의 다른 에너지가  마음 에너지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 변화된 에너지가 인식자에 전달되면 
인식자는 그 마음의 상태를 인지하게 되어 
슬픔, 즐거움, 괴로움, 행복감등의 감정을 인식하게 된다. 
마음이나 생각은 육체와 구분하여 내적인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로 내면과 외면을 구분한다면 이것들도 
육체처럼 외면에 속하는 것이다. 
인식자인 의식체에 속하지 않는 것은 
모두 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나 생각은 가변적이나 만유(萬有)의 근원이 
되는 의식체만이 결코 변하지 않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자극은 신체의 감각기관의 자극수용체를 통해 
받아들여지고 마음을 거친 후 인식자에 전해지므로 
감각기관이 예민한 상태에 있어야 섬세한 자극도 감지할 
수 있으며, 마음 역시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한편 감각기관을 통하지 않은 사념과 같은 자극도 
결국 마음을 통해 인식자에 전해지므로 마음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그런데 감각적 자극에 탐닉하거나 
즐거움을 주는 감정에 탐닉하게 되면 감각기관의 
감수성이나 마음의 예민성이 무디게 되어 
이 경로를 통해 중심에 이르는 길이 막히게 된다. 
한편 감각기관이나 마음의 상태를 예민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자극을 감지 할 때나, 하나의 행위를 할 때 
모든 의식을 그곳에 집중하여 미세한 자극도 
감지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감각기관과 마음 상태가 
언제나 예민하게 유지될 수 있어 
의식체인 자신의 중심에 쉽게 이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점은 근원에너지는 
이 우주내 어디에나 편재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에너지의 밀도가 일정한지, 곳에 따라 다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공간, 무생물, 생명체, 영(靈)의 순으로 
그 농도가 높아질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 에너지의 전파나 이동에 대한 방해요소나 
보조요인이 있을 것도 같다. 이 방해요소는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변형된 에너지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변형된 에너지가 방해요소로서 더 주요하게 작용할 것 같다.  
순수한 근원에너지가 육체를 통과하는 것보다 사념에너지로 
가득한 마음 층을 통과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에 사념이 없는 무념(無念)상태 일 때 
내면의 의식체는  우주의식(神)으로부터 순수한 
근원에너지를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는 
다른 의식체인 영(靈)과 같은 밀도 높은 에너지체로부터 
밀려오는 에너지파동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영교(靈交)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육체를 가진 사람도 
무심(無心)경지를 이루면 근원에너지원인 우주의식(神)과 
합일(合一)될 수 있으나 
영혼(靈魂;마음을 가지고 있는 靈,혼령)들은 
물질인 육체는 없으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식과 합일 하지 못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마음의 주된 요소인 사념에너지와 같은 변형된 에너지가 
물질보다 근원에너지의 이동에 더 많은 방해 작용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심에 이르는 두 번째 방법은 직관(直觀)을 통한 방법이다. 
명상이나 선(禪)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 이에 속한다. 
이때는 사념이 사라져 마음이 작용하지 않는 무심(無心)상태가 
되므로 우주의식(神)인 근원에너지가 
그 사람의 중심인 의식체에 쉽게 도달하게 된다. 
이런 상태의 초기단계에서는 의식체가 아직 따로 존재하므로 
우주의식의 성상인 지복(至福)상태를 인지할 수 있게 되나 
의식체가 우주의식에 흡수되어 그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면 
인식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고,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느낄 수 없게 된다. 
수많은 세월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신성(神性)을 체험하고 싶고 
깨달음을 얻고 싶어 많은 방법을 통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이룬 사람들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의 마음은 
수많은 생각, 기억, 욕망, 의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유지시키는 에너지는 근원에너지가 변화된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에너지는 근원에너지의 이동을 방해한다.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어떤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때, 
이때 작용하는 의지는 변형된 에너지이다. 
신성(神性)을 체험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그
것을 위해 불굴의 의지력을 발휘하여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이 욕망이나 의지와 같은 
변형된 에너지로 충만하게 된다. 
그래서 우주에너지인 신(神)으로부터 오는 근원에너지를 
순수한 상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근원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신성을 체험하는 것일 텐데, 
그에 대한 욕망과 의지가 그것이 들어오는 길에 
장벽을 치고 있으니 어떻게 들어올 수 있겠는가? 
이 장벽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만들어진 장벽을 없애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대한 욕망을 버릴 때, 
의지적인 것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우리 주변에 충만해 있는 우주에너지(神性)는 저절로 
우리 안에 밀려들어온다. 이런 경우에만 우리는 
신성(神性)을 체험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아(ego)라는 닫쳐진 문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자아(ego)를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아(ego)안에 있는 것 일뿐 다른 것은 불가능하다. 
행위자가 하는 행위는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 범위 내의 것일 뿐이다. 
우리가 마음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신성(神性)은 마음을 초월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음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 
오히려 마음을 버려야만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버릴 것인가? 
무심(無心) 상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그 단계까지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수많은 사념(思念)들로 가득한 마음을 없애는 것은 
참선이나 명상의 기법으로 가능하다. 
먼저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생각들은 없어진다. 
이땐 하나의 생각만 남게 된다. 
마음이 이 하나의 생각에 집중되어있다. 
이 하나의 생각을 계속 주시하게(觀)되면 
나중에는 그 생각마저 사라지고 
마음도 그것과 함께 사라진다. 이런 훈련을 
반복하여 마음을 자유자제로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무심(無心)의 경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한 순간이겠지만 점차 그 시간이 
늘어나고 마침내는 무심(無心)상태를 오랜 시간동안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마음을 이용하여 마음을 없앨 수 있다. 
불교의 선(禪)방법의 하나로  화두선(話頭禪)이 있다. 
그러나 그 화두(話頭)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내용이다. 그 불합리한 내용을 
풀어보려고 모든 생각과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 
몇 년, 아니 평생을 그것에 매달려도 
견성(見性)조차 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한 가지 생각에만 집중하다 보면 
모든 생각이 없어져 버리는 순간이 온다. 이 순간이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심(無心)의 순간이다. 
바로 견성(見性)의 순간이다. 
화두(話頭)는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도록 매달려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화두(話頭)의 역할이다. 
한편 생각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모든 생각이 없어지고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 단계까지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무심(無心)상태가 되면 그 때부터는 
아무 것도 하려고할 필요가 없다.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다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본성(本性)에 의해서 저절로 이뤄지게 
놔둬야 한다. 그러면 점차 나의 인식자인 의식체는 
우주에너지(神)에 흡수되어 그것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 때는 인식자가 없어지니 나와 대상이 모두
없어지게 되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게 되므로 
공(空)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심(無心)상태를 통해서만이 
지복(至福)의 경지, 신성(神性)의 경지, 공(空)의 경지,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음이요, 천국과 열반에 들어감이다. 
나(ego, 마음)를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도(祈禱), 귀의(歸依), 명상(瞑想), 
선(禪)이 바로 나를 버리는 과정이며 그 방편이다. 
신성을 구하지 말고 나를 버려라, 
무심(無心)을 이루어라, 
그것만이 신성에 이르는 길이 될 것이다.        

2 Comments
정영숙 2008.03.05 09:02  
조카님! 길고긴 글을 다 읽으내리는 것 눈이 좀? 하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심리학 공부라 읽으면서 답글을 쓰고있는 중인데 ------아 그리고 < 의사와 환자> 글을 읽고 < 피아노 교사와 학생> 이라는 공통성이 있어 장문의 글을 썻는데 그만 확인란이 보이지 않아 날아가 버렸지요. 공감해요. 아마 위의 글을 다 읽고나면 신성에 이르는 경지에 도달할 것 같네요. 아- 꾹 참으면 본성을 찿게 되는군요.
정문종 2008.03.05 18:10  
광주에서 소아과를 개원하고 계시는 석헌 허경용 선생님의 글 입니다,,, 좀 덜 지루하시라고 꾸며 보았습니다,,, 연배가 꽤 높으신 '명상'의 대가 입니다,,, 바다 박원자 선생님은 잘 아시는 것 같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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