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연주.감상후기, 등업요청, 질문, 제안, 유머, 창작 노랫말, 공연초대와 일상적 이야기 등 주제와 형식,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회원문단은 자유게시판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조병화님의 모든것

싸나이 7 2845

먼저 급하게 많은 분량을 조사하다 보니까
오타나 miss가 많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점 양해해 주시고
님을 칭송하는 윤영자님의 시로 시작해서
선생님의 (총75쪽,)프로필,한편의 강의, 그리고 83세 타계를 기리는 의미에서
83편의 주옥같은 시를 꼬박이틀을 허비해서 찾아냈습니다.
대부분의 것들은 직접 워드로 처리해야 됐기에 미숙함이 많이 드러날겝니다.
즐감하시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조병화 시인의 '시'


윤영자
-그 세월을 축하하며-


당신은 천성이 예술가입니다.
그렇게 타고나온 사람입니다.

당신 머린엔 조몰주로부터 위탁받은
창조물로 가득하고
당신 손과 몸엔
그걸 뽑아내는 기술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평생을
세월 모르는 불멸의 생명으로
예술을 살아오며 쉴 새 없이
조물주의 위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매듭이 있는 인간들의 세월
 그 인간의 세월을 당신도
살아야 함을 어찌 하리

오늘 당신의 한 매듭의 날을 같이 함에
오히려 기쁘다! 이렇게 축하함은
당시에게 완전한 자유의 하늘이 열림이요,
그 무한한 비상이 시작됨이 옵니다.

당신은 천성이 예술가요.
세월이 없는 사람이요.
(1989년, 정년을 축하하며)









조병화

1921년 경기 안성 출생
1943년 경성사범학교 졸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수상
1972년 경희대 문리대학장
1982년 한국시인협회장
1989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1999년 50번째 시집 「고요한 귀향」 출간
   
주요작품 「버리고 싶은 유산」,「밤의 이야기」,
            「순간처럼 영원처럼」,「먼지와 바람 사이」, 
            「어머니」,「따뜻한 슬픔」,「고요한 귀향」 등


수      상    아시아자유문학상,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등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강의)

 

조병화(시인)

 

  저는 대학까지는 문학을 하지 않고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서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다.' 중학교 4학년(현재의 고1) 때 거기에 매혹되어서 {파우스트}를 줄을 쳐가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맨 끝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노력한 사람은 노력한 만큼의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구원을 받은 인간은 얼마나 행복한 인간입니까. 인간은 노력하면 할수록 방황하기도 하지만,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을 찾는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것이 문학이 아닙니까. 맨 먼저 문학을 할 생각이 없이 자연과학을 공부하다가, 큰 꿈이 무너지는 좌절과 아픔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민 끝에 문학의 길에 접어들어 고맙게도 팔십까지 일관되게 걸어온 결과, 이제 여러분 앞에까지 서게 되었으니 저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낸 시집 {고요한 귀향}은 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곳까지 오는 길 험했으나
        고향에 접어드니 마냥 고요하여라.
        비가 내리다 개이고
        개다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다 폭설이 되고
        폭설이 되다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홍수가 되고 가뭄이 되고
        가을 겨울이 되면서
        만남과 이별이 세월이 되고
        마른 눈물이 이곳이 되면서
        지나온 주막들이 아련히
        고향은 마냥 고요하여라.
        아! 어머님 안녕하셨습니까.
 

  이런 글로써 내 시 생활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그려 보았습니다만, 돌아보면 폭설이 되고 홍수가 되듯 무상하고 변화무쌍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경기도 안성의 난실리라는 작은 마을에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홉 살 되던 해에 어머님이 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줘 준 땅을 팔아서 서울에 왔으니까 무척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어머니들은 누구나 강하고 부지런하지만 "어머님, 좀 쉬어가면서 일하십시오." 하고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늘 "야, 살은 죽으면 썩는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가실 때마다 "쉬어가며 일하세요. 우리들이 민망합니다." 하고 말씀드려도 어머니는 역시 "살은 죽으면 썩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담담한 표정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아! 사람은 죽는구나." 하는 죽음의 철학이 몸에 배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각자 주어진 인생을 부지런히 빈틈없이 즐거운 긴장감으로 살고자 한다면 '언젠가 나는 죽는다.'고, 죽음을 의식해서 살아갈 때 삶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향기있는 말, 끌어주는 말을 찾아
 

  은근히 '아, 인간은 죽는구나.'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니까 어머님처럼 부지런하게 살게 되고, 학업에서도 1등만 하는 등 항상 다른 아이들보다 앞서가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학비를 내지 않는 학교에서만 공부를 했었는데, 어느 날 교장 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우리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도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했으면 좋겠다."고 권하셨습니다. 경성사범학교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입니다. 들어가기도 힘들거니와 한국 학생들 가운데에는 가난한 수재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과 치열하게 겨루어 들어가야 하는 학교였습니다. 일본인 학생들도 들어가기 힘든 학교였지만, 나는 거뜬히 합격이 되었습니다.
  그 학교는 1학년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기숙사에 들어가 보았더니 일본인 학생들이 80%, 한국 학생들이 20%로 거의 왜색 일색이었습니다. 이부자리는 각자 마련해서 들어가는데 일본 아이들은 좋은 이부자리에서 기거하고, 가난한 한국 아이들은 초라한 이부자리에서 기거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면 '왜 하필이면 우리 어머님은 가난한 일본의 식민지 아들로서 나를 낳아주셨을까.' 하고 원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 이건 내 숙명이다.'는 걸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럼 이 숙명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죽을 때까지 어머님 말씀대로 '살은 죽으면 썩는다. 나의 생명의 한도까지 많은 인생을 살자. 외길로만 살지 말고 이것만이 인생이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대로 하고 싶은 욕망대로, 살고 싶은 꿈대로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뜻대로는 다 못 이루더라도, 맨 처음 소년 시절에는 작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적지를 좁혀, 마지막에는 자기 꿈에 도달하겠지요.
  왜곡된 우리 교육 제도와 사회 환경을 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넌 법과다, 의과다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좁혀지고 강요된 삶의 목표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것은 처음부터 목표를 정해서

사는 게 아니라, 많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취미나 꿈에서 시작되지만, 점점 좁아져서 피라미드형 인생이 되는 게 옳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경성사범 1학년 때 많은 인생을 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많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많은 여행을 하자. 많은 여행을 어떻게 하느냐? 우선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를 되도록 많이 후회 없이 죽을 때까지 여행을 한다. 나에게 주어진 건강과 금전으로 되도록 많은 여행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많은 인생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의 여행, 영혼의 여행을 되도록 많이 하는 것입니다. 상상의 세계와 영혼의 세계를 많이 여행하려면 책을 많이 읽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서적들이 많은데 무슨 책을 읽느냐? 우선 상상의 세계를 넓혀주는 종교, 철학, 문학의 서적들입니다. 내가 공부한 자연과학은 상상보다는 지식을 쌓아가는 세계입니다. 종교, 철학, 문학의 세계는 마음대로 생각하고 상상하고 마음대로 방황하고 마음대로 모색하고, 항상 빙빙 도는, 결말이 없는 상상의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폭이 넓은 세계지요. 책을 되도록 많이 읽고 상상의 얘기를 많이 하는 게 곧 많은 인생을 사는 첫걸음입니다.
  종교, 철학, 문학서적 중에서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고 많은 상상력을 얻어낼 수 있는 독서물이 뭔가를 생각해 보니 시였습니다. 소설이나 종교서적은 산문으로 되어 있으니까 학업에 지장이 많지요. 짧은 독서 시간에 많은 상상력을 얻어내면서, 넓은 세계를 상상력으로 두루 여행할 수 있는 독서물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중1 때부터 시작하여 대학 시절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늘 시집을 끼고 다니면서 읽었습니다. 내가 시집을 탐독하고 암송하고 한 것은 그 속에 있는 좋은 말들, 나를 키워주는 말들, 나를 감동시키는 말들, 힘을 주는 말, 위안을 주는 말… 그런 걸 찾아서 읽었지, 시인이 된다거나 시를 읽음으로써 멋을 부린다는 생각에서가 아니

었습니다. 짤막한 시 속에서 나를 끌어 올려주는 말, 힘차게 나를 끌어 올려주는 에너지 같은 말들을 골라서 읽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나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시집이면 돈이 있는 대로 사서 읽어보다가 좋은 말이 있으면 줄을 그어가며 읽었습니다. 그때부터 일관된 생각입니디만 시는 억지로 읽으면 안 되고, 또 시는 어려워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키워가고 여러분의 인생을 고양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을 읽어야 됩니다.
  평론가들이 괜히 어설프게 센티멘털하다고 혹평을 한다 하더라도, 그 말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된다면 그런 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하지, 엘리어트나 발레리 등 평론가들 입에 오르내리는 서구의 시인들에만 경도될 필요는 없습니다.


시는 읽어서 절실한 감동이 와야

  시는 지식이 아니라 읽어서 직접 감동이 와야 합니다. 그게 곧 좋은 시입니다. 말하자면 말이 퉁기는 느낌의 폭이 넓을수록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시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짐에 따라 얼마간 조금 차이가 있겠지만, 좋은 시는 누구에게나 큰 감동으로 직접적으로 확 들어옵니다. 영국의 시인 C. D. 루이스(Cecil Day Lewis,1904~1972).<註: 영국의 시인. 통칭  시 데이 루이스로 알려졌다. 일찍부터 시의 사회성을 주장한 그는 29년의 세계공황으로 유럽이 위기에 처하자 W.H.오든, S.H.스펜더, 맥니스 등과 함께 반(反)파시즘 전선에 적극적으로 참가, 이른바 30년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에스파냐 시민전쟁을 계기로 정치활동에서 손을 떼었고, 사회개혁에 의한 인간재생의 정열을 상실함으로써 초기의 실험성과 풍자는 희박해지고 차차 개인적·내면적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시에 《이탈리아 방문》(1953) 《문》(62), 평론에 《시에의 희망》(34)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44) 《시의 이미지》(47), 등이 있다.>는 그의 시론을 통해 '시의 전달을 소외시키는 건 평론가'라고 지적했습니다. 좋은 시를 평론가 자신이 멋대로 해석을 해서 독자들에게 얘기하면, 독자들에게는 잡음이 들어가서 시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겁니다. 시는 여러분이 직접 읽고 거기서 직접 감동을 끌어내고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에 피가 되어야만 좋습니다. 좋은 시는 모든 사람에게도 다 좋은 겁니다. 여러분은 시를 읽을 때 선택을 해서 그거야말로 짧은 시간에 힘을 얻기 위해서 청춘을 길러 올리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되는 말들을 골라서 읽어야 합니다.
  저 자신 참 많은 시집을 읽었습니다. 스물다섯 살까지 대학에 다니면서 시를 읽었는데, 문학부 학생들이 읽은 시집보다도 더 많이 읽었습니다. 자연과학도로서 늘 시를 가까이 하면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시를 읽으면 즐겁고 감동을 얻고 새로운 세계

를 발견할 수가 있고 참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럭비 선수와 늦은 밤 독서실과 시
 

  중학교 3학년 때 럭비부 선수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때 공부와 운동 사이에서 여간 고민이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좀더 깊이 하려면 운동을 버려야 되겠고, 그냥 선수 생활을 하면 공부할 시간을 많이 빼앗기겠고…. 그런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문득 전에 읽었던 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먼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면 등불을 켜가지고 간다'. 아, 등불이구나! 등불을 찾아다니면 내가 더 나아갈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숙사에는 아침 6시까지 불을 켜주는 독서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서실을 찾아다니면 운동장에서 빼앗긴 시간만큼 보충할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양립을 시킬 수 있으리라 마음먹고 그날부터 독서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는 시간을 줄이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운동 선수로서도 일본을 왔다갔다 하는 대표 선수가 되고, 공부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니 그렇게 밝고 긴장된 학창 시절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4학년 때까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지를 못했었는데,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소개하면서 그 가운데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다' 라는 얘기가 실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황'이라는 말에 나는 굉장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께서는 "노력하면 할수록 그 대가로 인간은 노력한 만큼의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에 아주 흥분을 해서 운동 연습 하기 전에 서점에 가서 {파우스트}를 사서 읽기 시작을 했습니다. 과연 그 속에는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를 벗삼아서 학창생활 내내 운동은 운동대로 하고, 등불을 아끼며 독서실을 다닌 덕분에 그 학교도 수석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졸업을 하면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까 어머니를 모시고 농촌으로 가서 교원 생활을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에도 문득 {파우스트}에서 나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파우스트}에는 두 사람의 대표적인 인간형이 나오지요.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인물과 '파우스트'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인물은 현실적이고 인간의 관능을 대표하는 인물인 반면, 파우스트는 사색하는 인간, 지성적인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어느 날 메피스토펠레스가 사색을 하고 있는 파우스트의 서재에 들어가서 "너는 항상 뭘 그렇게 일생 동안 꾸물꾸물 생각만 하고 있느냐. 사색하는 놈들은 창 밖에 새파란 목초가 있는 것도 모르고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시든 목초를 씹고 있는 어리석은 양과 같은 존재다."는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는 그걸 생각하며, '아! 그렇구나. 나에게도 푸른 목초가 있는데, 그걸 내가 상실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어머니가 조금 고생이 되지만 나의 생명을 더 연장시키는, 말하자면 나의 꿈을 더 연장시킬 수 있는 푸른 목초밭을 찾으러 가자.' 이렇게 마음먹고 동경 고등사범학교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과에 진학할 것인가. 체육과는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되도록 인생을 많이 살자는 그 꿈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그 많은 지식을 주는 과가 뭘까 고심한 끝에 물리화학과로 정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물리화학과를 공부하면 천문학, 기상학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학까지 한번은 훑어볼 수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들어가기도 힘들었지만 떨어지면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에 가서 교사를 할 생각으로 시험을 봤더니 합격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은 역시 시였습니다. 푸른 목초밭을 찾아 나는 바다를 건넜습니다. 동경사범에 들어가서도 럭비부 학생들이 같이 운동하자고 해서, 럭비부에 있으면서 공부도 하다가 해방이 되어서 나왔어요. 내가 다니던 경성사범학교에서 물리 선생으로 오라고 해서 부임했습니다. 물리선생으로 가서 몇 달 가르쳐보니까 이건 내가 청춘시대

꿈을 꾸었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학자들이며 선철(先哲)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지식의 부스러기들을 모아서,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밖에 안 되었습니다. 내가 실험을 한다든지 내 땀이 묻은 지식이 아니라 뉴턴이나 코페르니쿠스가 한 말들을 주워 모아 가르치자니, '야, 이건 허수아비의 인생을 사는 거다. 꿈이 없는 인생을 사는 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 일이었습니다. 그건 월급을 받는 노예생활로 비쳤습니다. 내 것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같이 인생처럼 비참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현대인들은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서 월급쟁이를 해야 되겠지만, 월급쟁이를 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꿈을 이루는 방향으로 일을 해나가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런데 즐거움이 없는 현실 생활에서 돈을 타서 먹고 사는 것은 노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때 꿈의 좌절을 느꼈습니다. 어려움을 이기고 동경사범학교까지 다닐 때는 월급쟁이로 남지 않고 뭔가 내것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니까 출구가 막힌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이라는 건 육군사관학교 앞에 경성 제국대학 이공학부가 하나 있었습니다만, 다 망가지고 해방 직후에 자연과학을 공부할 만한 분위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동안 막힘 없이 활발하게 꿈을 펼쳐왔지만, 별안간 해방이 되어서 돌아온 조국에서 나로서는 오히려 절망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것 같은 생각에 망막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시를 나오는 대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시의 형태로 나오게 된 것은 다행이지요. 왜냐하면 그만큼 학생시절에 시를 읽었으니까 그게 노하우가 되어 자연스럽게 일기 같은 것이 그냥 그대로 시의 형태로 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해 겨울에 월미도를 찾았습니다. 제방 너머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변에 조그마한 소라가 꿈틀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까, 내가 꼭 소라의 신세 같았습니다. 겨울 바닷가에서 연한 생명체를 유지하려고 꿈틀꿈틀 움직이는 소라새끼를 보며, 즉흥시로 [소라]라는 시를

 하나 썼습니다.
 

        바다에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이렇게 쓰고 나니까 뭔가 속이 후련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걸 쓰고 자기의 고민 같은 것이 쏟아져 나와서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된 거죠. 그 다음 시가 또 하나 나옵니다. 노래로 만들어진 [추억]이라는 시입니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당대의 모더니스트 김기림의 후원을 얻다
 

  나 자신이 작품으로써 뭔가 위안을 얻으면서, 신세 타령 같은 것이 자꾸 나왔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경성사범학교가 대학으로 승격이 된다 안 된다 할 무렵에 시인 김기림이 경성사범학교의 선생으로 왔어요. 그분은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와서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쳤는데, 김기림 교수가 어느 날 나한테 오더니 조선생도 시를 쓰느냐면서 좀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가 그렇게 거대한 한국의 시인이요, 모더니즘의 거장인지도 몰랐습니다. 작품을 쓴 것이 더 있느냐고 해서 갔다 드렸더니 그분이 시집을 내겠다고 했어요. 그것이 [버리고 싶은 유산]입니다. 그게 1949년에 나왔어요.
 그래서 점점 시야가 넓어지고 위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센티멘털한 시들을 쓰면서 김기림이라는 은인을 만나서 {버리고 싶은 유산}을 내니까, 또 욕망이 많아져서 '이게 내가 살 길이다. 이것이 내일을 뚫고 가는 길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반년도 되기 전에 {하루만의 위안}이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하루만의 위안], [잊어 버려야만 한다]… 이런 시들이 실려 있지요. 그때 첫 시에 한 대목에 이런 게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전에 내가 사냥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평 들에 가서 총을 쐈는데 빗맞아서 할딱할딱하고 달아나는 걸 쫓아가서 본능적으로 또 쐈어요. 그 새는 죽어가면서 나를 크게 저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눈을 감는 걸 보고 인간이 할 짓은 아니다. 그때 총을 버리고 얻은 철학이,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생명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적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더 유망한 사람일수록 적이 많은 겁니다. 반성을 하면서 얻은 철학이 그거에요. 생명을 가진모든 것은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거죠.
  그 전까지는 나는 몸을 사리고 있었어요. 교수들 사이이지만 서로 좌익 우익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교무실에 무서워서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사람이 참 무서웠습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내편 네편 하면서 흑백으로 갈라지는 시대를 살아오면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4시집에 {인간 고도}라는 게 있는데, 인간이 무리를 잃어버리거나 단체에 끼지 않으면 굉장히 외로운 시대였습니다. 그래도 단체에 끼면 이득을 얻어서 뭔가 안심이 되는 시대, 그걸 다 버리고 이런 시를 썼습니다.
 

        아무 데도 끼지 않는 외로움
        무리를 잃어 버린 인간들은 외로움을 안다.
        무리를 잃어 버린 외로움을 아는 사람은 너 하나가 아니다.
 

  무리를 잃어 버린 인간들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그 인간들이 합해지면 단체를 구성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하나의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시를 머리에 써서 시집 [인간 고도]를 펴낸 겁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부산에 피난 갔다가 올라와서 폐허의 명동에서 만나던 시절이었습니다. 폐허 속에서 주막이 하나 생기고 다방이 하나 생기면 문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들면 돈있는 사람이 물주가 되어서 오늘 돈 얼마 있으니 술 한 잔 먹자고 해서 몰려다니곤 했습니다. 그렇듯 빙빙 돌면서 느끼는 것은 '아! 너도 외로운 섬이고 나도 외로운 섬이다.'라는 거였습니다. '이 폐허에 외로운 그 시대의 물결을 타고 물결 속에 둥둥 떠있는 외로운 섬들이다.'라는 발상에서, [인간 고도]라는 시집을 냈어요. 그 무렵 대학에서 현대시를 가르치라는 제의가 와서, 과거에 읽었던 중학교 1학년부터 읽었던 그 모든 시가 자연히 노하우가 되어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며 오늘날까지 걸어왔습니다.
  1986년에 인하대학 대학원 원장으로서 그만뒀지만 그 이후도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내 서재에서 많은 시집을 냈어요. 50권의 창작 시집 그게 나의 오리지널이지요. 그 50권으로 무얼 했느냐 하면, 나의 꿈을 길러온 과정을 쭉 쓴 거지요. 문학을 했다는 것보다도 나의 인생을 철학해 온 기록으로서 작품집을 펴내 왔습니다. 맨 먼저 시집을, 내 영혼이 묵었다 떠난 숙소, 즉 여인숙이라고 해서 제1숙(宿), 제2숙, 제3숙…제50숙, 50번째 내 영혼의 숙소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초등학교 때 그림을 잘 그려서 경성사범학교에서 미술부에 들어가, 3학년 때 럭비 선수가 되기 전까지는 미술부에도 왔다 갔다 했지만 미술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했습니다. 경희대 문리대 학장이 되니까 넓은 방을 주어서 귀퉁이에 아틀리에를 만들어 놓고, 그 때부터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어요. 그때가 72년도에요. 한 1년쯤 부지런히 그려서 많이 모았어

요. 최덕주라는 미술학부 교수가 그 그림을 보더니 그림 전람회 한번 하자고 해서 그림 전람회 제1회를 73년도에 서울신문사의 서울 갤러리에서 했어요. 거기서 그림이 많이 팔리니까 미도파에서 초대 전람회를 열어준다고 하고 다음은 신세계에서, 종로에 있는 선화랑에서 하자 이렇게 해서 그림 전람회도 한 20회 했습니다.


자기만의 빛깔있는 시를 써야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바빠서 자기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발굴 못하고 그냥 주어진 현실을 살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일 거에요. 그러지 말고 한번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딘가, 이게 만족한 생활인가, 정말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얘기했듯이 창밖에 푸른 목초가 있는 것도 모르고 내가 꿈도 없는 현실 생활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뭔가 영혼의 창 밖에 나에게도 푸른 풀밭이 있는 게 아닌가. 이런 것도 좀 생각을 해보고 자기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재능을 발휘하여 취미 생활로 연결해 보기 바랍니다. 취미 생활이야말로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겁니다. 취미 생활이 자기의 직업과 일치가 되고 가정 생활과도 일치가 되고 자기의 인생관과도 일치가 되면 그처럼 좋은 인생이 없지요.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즐거운 것을 발견해서 아, 나에게 이런 소질이 있었다. 이걸 한번 개척해 봐야 되겠다던지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산다는 것은 무의미한 겁니다.
  우리 어머님 말씀처럼 죽는 생명을 가지고, 한도가 있는 생명을 가지고 나왔으니까 자기대로 자기를 만들어야만 되지 않을까요? 나는 창작 생활로써 물리화학을 포기하고 돈도 생기지 않는, 이 시의 길을 걸어오면서 충분한 나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만큼 세계여행도 많이 했고 상상의 세계를 많이 여행해, 지금은 젊은 영혼들에게 상상의 세계를 상상시키기 위해서 정신의 지도도 만들어냈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뜻대로 꿈대로 살아와 후회 없이 고요하게 고향으로 가는 그런 시도 만들어 내고 있는 겁니다. 일관되게 살아왔다는 기쁨이 있는 거지요.
  자기가 왜 문학을 하게 됐는가? 문학을 해야만 되는가? 자기의 깊은 속에 철학이 있어야 됩니다. 그 철학을 풀어 나가는 길을 찾아 나가야 되지요. 상상적으로 화려한 세계, 낭만적인 세계, 다른 사람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세계, 이런 허망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아픈 자기의 고뇌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끌어내는 생각을 가지고 문학을 하면,

자기의 목소리가 묻어 나오는 문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시가 왜 안 읽히느냐 하면 조작적이에요. 그리고 만들어내는 것들이에요. 시대에 맞는 단어들로 엮어내는 말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영혼이 없어요. 시를 쓰는 젊은 사람의 철학이 없어요. 그건 문학이 아닙니다. 문장이 좀 서툴더라도 그 속에 진실한 자기의 인생이 들어있을 때는 전달이 되는 겁니다. 전달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진실하게 자기를 산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영국의 현대시인 스펜더(Stephen Harold Spender,1909~1995)<註:영국의 시인. 런던 출생. 옥스퍼드대학 졸업. 1930년대 W.H.오든, C.D.루이스, L.맥니스 등과 더불어 좌익적인 시를 발표하여, T.S.엘리엇 이후의 새로운 시단(詩壇) 세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시풍은 같은 그룹의 다른 시인과 비교하면 두드러지게 개인적·고백적이고 서정성이 짙다. 또한 시법에 있어서도 각운(脚韻) 등에 구애되지 않은 솔직한 시형이 본바탕으로 되어 있다. 발표된 작품은 상당히 수정이 가해진 뒤에 《전시집(全詩集)》(1955) 속에 수록되었다. 자서전 《세계 속의 세계:World Within World》(51)도 1930년대의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를 솜씨 있게 재현하는 동시에 당시 지식인들의 내면적인 취약점을 실토하였다. 53년에 종합잡지인 《엔카운터:Encounter》를 창간하였다.>는 '인간은 누구나 태양에서 나와서 태양으로 돌아가는 짤막한 여정을 사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진실하게 자기를 산 사람은 자기의 흔적을 하나 남기고 간다.'고 노래했습니다. 중앙대 교수 시절에 읽으면서 저를 전율시킨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도 뭔가 정신적인 자기 흔적을 하나 남기려면 여러분 자신의 시를 써야 합니다. 어느 물결을 타고서 물결에 맞는 시를 쓰면 안됩니다. 모더니즘이다, 다다이즘이다, 쉬르다… 그런 이즘의 물결을

 타지 말고 흘러가는 물결을 견디면서 자기 자신을 확립해야 됩니다. 물론 시를 만드는 수법으로 다다이즘도 이용할 수가 있고 쉬르레알리즘(초현실주의)도 이용할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이즘을 이용할 수가 있지만, 다다이즘의 시가 되어서도 안 되고 쉬르레알리즘의 시가 되어서도 안 되고 여러분 각자의 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들의 흔적으로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나름의 흔적으로서 있을 때 이웃 사람, 친구들에게도 '아, 참 좋더라. 니가 생각하는 철학이 참 좋더라.' 등 뭔가 이야깃거리가 되고, 이런 게 문학하는 재미요 또 문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젊었을 때 나는 자연과학을 하면서 정말 즐거워서 시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럭비를 하면서도 즐겁게 읽었어요. 정신의 양식으로 정신의 기쁨의 근원으로 시를 읽었는데, 그런 게 요즈음 젊은 사람들에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시를 쓰는 시인들 자체가 뭔가 그런 힘을 줄 수 있는, 기쁨을 줄 수 있는 언어 작업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연대는 읽히는 시들을 발견하고 있지만 젊은 20대, 30대, 40대의 시인들은 조작적이고 유행을 타고 빨리 매스컴을 타려고 하고, 이상한 단어들을 구사하려고만 라고 있습니다. 즉 순간적인 장난 같은 언어들로 오히려 모국어마저 해롭게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모국어를 육성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말을 부숴가는 거지요. 자꾸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젊은 연대에 있어서는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확립하는 길로서 시작업을 해 나가야 됩니다. 그럼으로써 위안을 받고 기쁨을 얻고 삭막한 현실과 싸워 나가는 하나의 정신의 무기로써 시를 써 나가고 읽기 바랍니다. ◈
 

 




(순서)

노을
사랑하면
해마다 봄이되면
서시
인생은
초상
하루만의 위안
바다

고독하다는 것은
사랑은
망매한 세상에서
공존의 이유
이렇게 될줄알면서
너와나는
먼곳에서
가을
낙엽끼리 모여산다
남남
남남

소라
외로운 영혼의 섬
잎떨어진 나무와 같이

사랑
나의 죄와벌
사랑의 노숙
헤어져야 할 날이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고요한 사랑
낙엽
옛업서
언제 이세상을 떠나더라도
사랑은
첫사랑
사랑의 숙박
언젠가 그눈물 마르지 않는 날을 위하여
남남43
니에게 잃어버릴 것을
잎떨어진 나무와같이
하나의 꿍인듯이
기다림
물망초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
사랑하면
세월은
숙명
어머님
오히려 비내리는 밤이면
황혼의 노래73
황혼이 노래74
황홀한 모순
나무-외로운 사람에게
안개로 가는길
공존의 이유
고독하다는 것은
하루만의 위안
하루하루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낮과밤
사랑
진종일을
생각을 돌려도
존재, 그순간
밤의 이야기
고개
하루만의 위안
사람이 한번 작별을 하면
외생각
고요한 사랑
공일
의자
인생
내가 시를 쓰는건
이별
가을바람
늘 혹은
의자7
노란 들꽃을 만지며
추억
고독하다는 것은   
준埈에게 보내는...





 노을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사랑하면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 알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는 한 인연이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서운해지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슬픔이 되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알게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것도
어쩔수 없는 한 운명이라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 만큼 슬퍼지려니
이거 어쩔 수 없는 아픔이 되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사랑하게 되어
서로 더욱 못 견디게 그리워지면, 그것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으로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뜨거운 눈물이려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흐느낌이 되려니


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게 될수록
이별이 그만큼 더욱더 애절하게 되려니
그리워지면 그리워질수록, 그만큼
이별이 더욱더 참혹하게 되려니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헤어져야 할 날이


 이젠 새로 만나서 사귀는 것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아진다
쉬이 헤어져야 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일들 하나하나 떠나가고
앞으로 나도 떠나가야 할 날들 짐작하면서


이젠 새로 만나서 정드는 것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앞서진다
쉬이 헤어져야 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정들면 정들수록 그만큼 슬퍼질 것이려니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만큼 가슴 아파질 것이려니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만큼 눈물 많아질 것이려니


아, 이젠 서로 만나서 사랑하는 것이
기쁨보다도 슬픔이 많아진다
쉬이 헤어져야 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서시

 먼 훗날 어느 사랑하는 애인이
당신과 나의 이 사랑을 찾으면
당신과 나의 다 하지 못한 이 사랑은
향기로운 술이 되어 고여 있으리


먼 훗날 어느 그리운 애인이
당신과 나의 이 그리움을 찾으면
당신과 나의 다 이루지 못한 그리움은
고운 술이 되어 고여 있으리


먼 훗날 어느 사랑을 아파하는 애인이
당신과 나의 이 아픔을 찾으면
당신과 나의 다 풀지 못한 이 아픔은
투명한 짙은 술이 되어 고여 있으리


아, 그렇게
당신과 나의 이 사랑은,
순결한 영혼, 영혼이 흘리고 있는 이 사랑,
이 그리움, 이 아픔은
먼 훗날
당신과 나의 존재의 술이 되어
면면히 이어질 애인들의 빈 가슴을
훈훈히 취하게 하리 







인생은


 인생은 생명으로 시작하여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리움은 뜨거운 사랑이며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인 것을
하늘은 영원한 것이며
영원은 항상 고독한 것을
아, 그와도 같이 인생은
사랑으로 이어지는 황홀한 희열이며
아름다운 적막인 것을 






초상

 내가 맨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 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듯이 바다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인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사랑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바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리운 사람아
먼 곳에 있는 사람아


바다가 우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흐느끼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혼자서 혼자서
스스로의 가슴을 깎아내리는
그 흐느끼는 울음 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


네게로 영 갈 수 없는
수많은 세월을
절망으로 깨지며 깨지며
혼자서 혼자서 사그라져 내리는
그 바다의 울음 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 









섬은
그리움을 갖게 하는 거리에 있어 좋다


섬은
그리움을 이어 주는 거리에 있어 좋다


섬은
그렇게 가고 싶은 거리에 있어 좋다


사람이 사는지, 누가 사는지
무어가 있는지, 그건 몰라도


섬은, 항상
그리움이 어려 있어 좋다 







고독하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고요한 사랑


 나의 기도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신이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습니다


나의 사랑으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당신이 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사랑은 아름다운 구름이며
보이지 않는 바람
인간이 사는 곳에서 돈다


사랑은 소리나지 않는 목숨이며
보이지 않는 오열
떨어져 있는 곳에서 돈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
받아도 받아도 모자라는 마음
사랑은 닿지 않는 구름이며
머물지 않는 바람
차지 않는 혼자 속에서 돈다



망매한 세상에서

망매한 세상에서
너를 찾음에
네가 그 자리에 있더라


진실로 망매한 이 세상에서
깃들일 곳 찾음에
네가 그 자리에 있더라


그림자 같은 이 세상
망매한 자리
너를 찾음에
네가 그 자리에 있더라


이 세상, 잠시 깃들일 곳 찾음에
맑은 자리, 고인 자리
네가 있더라







공존의 이유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당신을 생각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에 간다는 것을 보일 수 없으며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만큼 사랑합시다


우리앞에 서글픈 그날이 오면
가벼운 눈 웃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이렇게 될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의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벗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을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너와나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버린 캘린더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랑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는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샹들리에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먼 곳에서



이젠 먼 곳들이 그리워집니다
먼 곳에 있는 것들이 그리워집니다


하늘 먼 별들이 정답듯이
먼 지구 끝에 매달려 있는 섬들이 정답듯이
먼 강가에 있는 당신이
아무런 까닭 없이 그리워집니다


철새들이 날아드는 그곳
그곳 강가에서 소리 없이 살아가는
당신이 그리운 것 없이 그리워집니다


먼먼 곳이 날로 그리워집니다
먼 하늘을 도는 별처럼




노을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피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가을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 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낙엽끼리 모여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남남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
그 기쁨이었으면 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번뇌라든지, 일상의 그 아픔을
맑게 닦아낼 수 있는 네 그 음악이었으면 했다
산지기가 산을 지키듯이
적적한 널 지키는 적적한 그 산지기였으면 했다
가지에서 가지로
새에서 새에로
꽃에서 꽃에로
샘에서 샘에로
덤불에서 덤불로
숲에서 숲에로
골짜기에서 골짜기에로
네 가슴의 오솔길에서 익숙턴
충실한 네 산지기였으면 했다
그리고 네 마음이 미치지 않은 곳에
둥우릴 만들어
내 눈물을 키웠으면 했다
그리고 네 깊은 숲에
보이지 않는 상록의 나무였으면 했다
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남남


널 위해서 시가 씌어질 때
난 행복했다
네 어둠을 비칠 수 있는 말이 탄행하여
그게 시의 개울이 되어 흘러내릴 때
난 행복했다
널 생각하다가 네 말이 될 수 있는
그 말과 만나
그게 가득히 꽃이 되어, 아름다운
시의 들판이 될 때
난 행복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너와 나의 하늘이
널 생각하는 말로 가득 차서
그게 반짝이는 넓은 별밤이 될 때
난 행복했다
행복을 모르는 내가
그 행복을 네게서 발견하여
어린애처럼 널 부르는 그 목소리가
바람이 되어
기류 가득히 내게 전달이 될 때
난 행복했다
아, 그와 같이, 언제나
먼 네가 항상 내 곁에 있는 생각으로
그날 그날을 적적히 보낼 때
공허空虛처럼
난 행복했다.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머리 속에서
넌 그자리에서 좋은 거다.

때론 연하게, 때론 짙게
아롱거리는 안개
밋밋한 자리
감돌며
밤 낮을 나보다 한발 앞자리
허허
떠 있는 그 "있음"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충만히
머리 속에서
넌 그 거리에서 좋은 거다
항상.






소라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외로운 영혼의 섬


내 마음 깊은 곳엔
나만이 찾아갈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쓸쓸할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버립니다
 
내 마음 가려진 곳엔
나만이 소리없이 울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고독할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버립니다
 
아, 이렇게 내 마음 숨은 곳엔
나만이 마음을 둘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만사가 싫어질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버립니다
 
내 마음 보이지 않는
나만이 숨을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쓸쓸하고 쓸쓸할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버립니다








잎떨어진 나무와 같이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와 내가 유리되어
그냥 멍하니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잎새들이 사라진 나무 그대로
그냥 언제까지나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눈이 내리어
고요한 당신의 마음과 같이 눈이 내리어
마냥 그대로 하얀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미지근한 이 외로운 자리에서
깨지지 않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가랑잎들이 내린 나무 그대로

멍하니 마냥
당신과 같이 고요한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 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먼 아지랑이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사랑





사랑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워지는 거


한없이 그리워지는
그 그리움을 앓는 거

가까이 있어도, 살며시 손을 만져도




                나의 죄와 벌

         

            한량없이 시를 담아올려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이 무한
            아, 이 무한을 다 퍼올리면
            나에게도 휴식이 있을는지,
            퍼올리면 올릴수록
            더 맑게 깊어지는 이 외로움
            이 외로움은 무슨 벌인가요
            보이는 것이 무한한 하늘,
            충만한 것이 무한한 시간,
            다 풀 수 없는 것이 무한한 허무,
            나는 이곳에서 생존의 무기수올시다
            사형수보다 무거운.

 

                          사랑의 露宿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쁜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생존의 기억이다       

 



                  헤어져야 할 날이     

 

          이젠 새로 만나서 사귀는 것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아진다
            쉬이 헤어져야 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일들 하나하나 떠나가고
            앞으로 나도 떠나가야 할 날들 짐작하면서

            이젠 새로 만나서 정드는 것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앞서진다
            쉬이 헤어져야 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정들면 정들수록 그만큼 슬퍼질 것이려니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만큼 가슴 아파질 것이려니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만큼 눈물 많아질 것이려니

            아, 이젠 서로 만나서 사랑하는 것이
            기쁨보다도 슬픔이 많아진다
            쉬이 헤어져야 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나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고요한 사랑

 

나의 기도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신이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습니다 

나의 사랑으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당신이 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낙        엽


당신 생각만 했지요 
당신께만 할 이야기가 많았지요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지요 
초록색 몸차림을 하고 단장을 하고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당신 생각만 했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내 그늘 아래 쉬었을 때 
그때 내 마지막 그 말을 당신에게 주는 걸 그랬어요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잊어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만 했어요 
당신께만 할 말이 많았어요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도 먼 이 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어요   

 




옛 엽서


온 종일 비가 내렸읍니다 
연락선이 왔다 간다는 항구로 
남행열차는 쉴새없이 달렸읍니다 
삼등실 좁은 차창에 
빗물이 흐르고 흐르고 
수족관에 뜬 어린 시같이 
싹 튼 보리밭이 보이고 
포플라가 보이고,늙은 산맥이 보였읍니다 
말소리도 잠들어버린 차간에 
나는 
중앙 아시아 어느 바다로 가는 것일게니 하고 
졸음 없는 눈을 감아 보았읍니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세상 어지럽게 많은 말들을 뿌렸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밀 한마디 
"당신의 사랑의 은혜 무량했습니다" 
보답 못 한 거 다 잊어 주십시오 

아,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다 잊어 주십시오. 





사랑은


사랑은 아름다운 구름이며
보이지 않는 바람
인간이 사는 곳에서 돈다. 
사랑은 소리나지 않는 목숨이며 
보이지 않는 오열 
떨어져 있는 곳에서 돈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
받아도 받아도 모자라는 목숨

사랑은 닿지 않는 구름이며 
머물지 않는 바람
차지 않는 혼자 속에서 돈다.

 


 

첫사랑


밤나무숲 우거진
마을 먼 변두리
새하얀 여름 달밤
얼마만큼이나 나란히
이슬을 맞으며 앉아 있었을까
손도 잡지 못한 수줍음
짙은 밤꽃 냄새 아래
들리는 것은
천지를 진동하는 개구리 소리
유월 논밭에 깔린
개구리 소리

아, 지금은 먼 옛날
하얀 달밤
밤꽃 내
개구리 소리.
 


사랑의 숙박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때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쁜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생존의 기억이다 


 


언젠가 그 눈물    - 마르지 아니하는 한 방울의 눈물을 위하여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눈물이옵니다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젖은 별이옵니다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젖은 빛이옵니다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젖은 말이옵니다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젖은 밤이옵니다
 

 


 


남남 43
 
너의 말이 들리지 않는 곳에
나는 있다
너의 마음이 닿지 않는 곳에
나는 있다
너의 상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나는 있다

존재에 취하며
밝음에 취하며
너무나 가혹한 이 부재
살을 대며
넌 날 감지하지 못한다
호,
호,
네가 마신 공기 밖에
나는 있다
네가 묻은 바람 밖에
나는 있다
네가 닿은 하늘 밖에
나는 있다.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와글와글 타오르던 무성한 여름은
제 자리 자리마다 가라앉아
귀중한 생명들을 여물게 하였습니다.

보시다시피
이젠 담당할 수 없이 숨찬 계절이었습니다.

이제 돌아갈 것을 돌아가게 하여 주시고
총총히 서 있는
잎 떨어진 나무 수리를 지나는 바람에도

생명을 알알이 감지할 수 있는
소리없는 가을을 나에게 주십시오.

기름진 미운 얼굴을 거두고
기도를 올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수수 세월이 지나가는 나의 자리
검은 수림처럼 그대로 말없이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잎 떨어진 나무와 같이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와 내가 유리되어
그냥 멍하니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잎새들이 사라진 나무 그대로
그냥 언제까지나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눈이 내리어
고요한 당신의 마음과 같이 눈이 내리어
마냥 그대로 하얀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미지근한 이 외로운 자리에서
깨지지 않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가랑잎들이 내린 나무 그대로

멍하니 마냥
당신과 같이 고요한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꿈인 듯이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잎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랭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냇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이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 하는 것은

가시는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다림
 
기다는 게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비밀인가
가쁘게 목타게 살아가는 나날을
이어 주는 숨은 지하수가 아닌가

먼 곳에서 아물아물
가물거리며 다가오는 듯한
기별 같은 거, 소식 같은 거
기다리는 게 있다는 건
얼마나  아련스러운 위안이랴

사방천지, 모두 차단된 거 같은
멍멍한 이 세상에서, 엄동설한에
겨울 물처럼 숨쉬고 있는
기다림 같은 게 있다는 건
얼마나 애절로운 사랑이랴

무수한 사람들에게 채여
얼 얼 방향을 잃고 허둥거리는
이른 봄 아찔거리는
기다림 같은 게 있다는 건
얼마나 보살 같은 따사로움이랴

보일 듯이, 잡힐 듯이, 들릴 듯이
가까운 어느 곳에
기다림 같은 것이 아롱거리는 건
얼마나 잔인한 그리움이랴

아, 기다림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독한 긴, 긴, 벌인가.
 

 

물망초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오

 나아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이지만
 혹시는 잊으려 원하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아 언제나 못잊는
 꽃이름의 물망초이지만

 깜깜한밤에
 속이 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때
 미소와 도취만이 큰 배같던 길

 당신이 간 후 바람 곁에 내 버린
 꽃길 연보라는 못잊는 물망초이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이지만......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이 어려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오늘이 지루하지 않아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을 늦춰서 기쁘리

 

이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먼저 떠나

이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얼마나 행복하리

 

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날이 가고 오는 먼 세월이

그리움으로 곱게 나를 이끌어 가면서

 

다하지 못한 외로움이 훈훈한 바람이 되려니

얼마나 허전한 고마운 사랑이런가 
 
 
 


내일
 
걸어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다는 날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꿈으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내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 알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는 한 인연이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서운해지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슬픔이 되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알게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한 운명이라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슬퍼지려니

그거 어쩔 수 없는 아픔이 되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사랑하게 되어

서로 더욱 못견디게 그리워지면, 그것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으로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뜨거운 눈물이려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흐느낌이 되려니

 

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게 될수록

이별이 그만큼 더욱더 애절하게 되려니

그리워지면 그리워질수록, 그만큼

이별이 더욱더 참혹하게 되려니
 
 
 
 
세월은
 
세월은 떠나가면서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남기고 갑니다

 

봄 여름이 지나가면서

가을을 남기고 가듯이

 

가을이 지나가면서

겨울을 남기고 가듯이

 

만남이 지나가면서

이별을 남기고 가듯이

 

사랑이 지나가면서

그리움을 남기고 가듯이

 

아, 세월 지나가면서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빈 자리를 남기고 갑니다
 
 
 
 
숙명
 
지금 내가 사랑한다, 한들

또 하나의 이별을

당신에게 주게 되는 것을

 

지금 이렇게 늦은 세월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 한들

머지 않아 내게 생명이 끝이 와서

어진 당신에게

또 하나의 쓰라린 이별이 되는 것을

 

아, 이렇게 늦게 서로 만나서

숨어서 뜨거워지는 이 그리움,

 

어쩔 수 없이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한다, 한들

나의 세월의 끝에서

서로 헤어져야 하는 것을

 

속절없이
 
 

어머님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은 세상에 계시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하얀 제 생각 속에 계시옵니다.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의 귀론 들리지 않는 세상에 계시 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하얀 제 혼자 속에 계시옵니다.
 
 


오히려 비내리는 밤이면
 
오히려 비 내리는 밤이면

귀를 기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려 주오

비가 궂이게 쏟아져야

그대에게 가까이 가는 길을 나는 찾아 간다오

나보다 더 큰 절망을 디디고

진정 이 지구를 디디고 나는 찾아 가리오

내가 살아가기에 알맞은 풍토는

비 많이 쏟아지는 밤

이러한 밤에 절망을 뒤적거려 보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무슨 주변에 내가 더 큰 것을 바라오리오

내 것인 것만 주오

진정 내 것인 절망만 주시고

나를 괴롭지 않은 이 자리에 머물게 하여 주오

비내리는 밤을 기다리는 사람의 절개는

그대 것인 가는 호흡을 호흡하는 것이라오

비내리는 밤이면

귀를 귀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어주오

영 멀리 가는 그대여
 
 
 
 황혼의 노래 73
 
헤어진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면서 헤어진다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헤어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헤어지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며 사랑하며 헤어져야 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련가
 
 


황혼의 노래 74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못 살게 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황홀한 모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르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나무 - 외로운 사람에게

외로운 사람아,
외로울 때 나무 옆에 서 보아라
나무는 그저 제자리 한평생
묵묵히 제 운명, 제 천수를 견디고 있나니
너의 외로움이 부끄러워지리

나무는 그저 제자리에서 한평생
봄, 여름, 가을, 겨울, 긴 세월을
하늘의 순리대로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으면 입은 대로 참아 내며
가뭄이 들면 드는 대로 이겨 내며
홍수가 지면 지는 대로 견디어 내며
심한 눈보라에도 폭퐁우에도 쓰러지지 않고
의연히 제 천수를 제 운명대로
제자리 지켜서 솟아 있을 뿐

나무는 스스로 울질 않는다
바람이 대신 울어 준다
나무는 스스로 신음하질 않는다
세월이 대신 신음해 준다

오, 나무는 미리 고민하지 않는다
미리 근심하지 않는다
그저 제 천명 다하고 쓰러질 뿐이다







안개로 가는길


              안개로 가는 사람
              안개에서 오는 사람
              인간의 목소리 잠적한
              이 새벽
              이 적막
              휙휙
              곧은 속도로 달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한마디로 말해서
              긴 내 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지금 말할 수 없는 이 해답
              아직 안개로 가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던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나는
              이 길로 왔을까
 
              피하며, 피하며
              비켜서 온 자리
              사방이 내 것이 아닌 자리
 
              빈 소유에 떠서
              안개로 가는 길
              안개에서 오는 길
              휙휙
              곧은 속도로 엇갈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공존의 이유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 간다는 것을 얘기할 수 없으며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합시다
 
      우리 앞에
      서글픈 그 날이 오면 가벼운 눈웃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고독하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 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이나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 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인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하루하루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떠나며 산다
너와 작별을 하며 산다
나를 버리며 산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스스로의 보이지 않는 줄에매여
스스로의 운명을 살다가
스스로의 사그라진 문명 끝에서

그 멍에를 벗고
훌 훌
또 다른 곳에서 떠나는 거지만
이 떠남
이 작별

가까운 거리에서
너와 나

하루를 너를 생각하며
열흘을 너를 생각하며
한해를 너를 생각하며
시시각각 너를 생각하며

소리없이 소리없이,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생각하며 산다
너와 작별하며 산다
멍,나를 버리며 산다

아,이 적막
너는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낮과 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다만
멀 뿐이다
너를 잃은 것이 아니다.다만
멀 뿐이다
마음이 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다만
멀 뿐이다


사랑
가다린다는 건
차라리 죽음보다 더 참혹한 거

매일 매시 매초, 내 마음은
너의 문턱까지 갔다간
항상 쓸쓸히 되돌아 온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이 기다리는 고통은
아직 네가 있기 때문이다
비굴을 넘어서



7 Comments
수선화 2003.03.10 19:17  
  님은 가셨지만..
남기고 가신 아름다운 시들이
우리곁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군요.

그 분을 추억하며..
마음에 소중하게 담아봅니다.

이것만으로도
싸나이님은 약속하신 시 100편을
거의 달성하신 것 아닐까요.

감사드리며..
신재미 2003.03.10 20:35  
  선생님 님은 가셨지만 남겨 두신것이 많아
힘이 됩니다.
늘 고운 빛이 되어 살다가신 님처럼 님을 사랑하는 모든분들이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자료 빌려갑니다
평화 2003.03.10 23:02  
  싸나이님 힘드셨지요....

제가 특히나 좋아하는 조병화님의 시는 초상, 헤어져야 할 날이,
하루만의 위안, 고독하다는 것은, 공존의 이유, 이렇게 될줄 알면서도,
남남,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입니다.

싸나이님!
글을 읽으며 조병화시인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시라는것을
더 깊고 진하게 느낍니다.
참으로 본받고싶은 인생을 사신 보배로운분이시네요.

좋은글과 시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날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유성-━☆ 2003.03.10 23:06  
  고인의 프로필과 함께 님의 사랑과 허무가 짙게 배어있는
주옥같은 시 잘 감상 했습니다
시집 몇권을  읽은듯 합니다 
우선 한번만  읽었으니 두고두고 감상 하겠습니다 
싸나이님  대단 하십니다  이 많은 분량을 어디서 발췌 하셨는지요?
다시한번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수선화 2003.03.11 01:05  
  시를 다시한번 깊이 음미해 가면서..
고인이 되신 님의 아름다운 영혼과 만나봅니다.

프린터로 출력하여..
두고두고 그 님을 추억하려고 해요.

새삼..
이렇게 의미있는 수고를 기꺼이 자청하신
싸나이님께 거듭거듭..  감사드려요. 
 

 
흰들레 2003.03.11 05:46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그 열정보다 더한 자료 같습니다.
조병화 선생님의 향기가 가득합니다.
미리내 2003.03.11 09:30  
  싸나이님^^
저~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몽땅 읽을려니  눈도 아프고 ,많은양에  분량을  볼수가 없었답니다,,
하지만,
이렇게  수고로움이  존경스럽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데로  잘~음미하지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