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으로 직접 쓴 청첩장을 받고 싶다
네 손으로 직접 쓴 청첩장을 받고 싶다
수업 중 인터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박 선생님, 잠시 후 졸업식 예행연습이 있는데 식가 지도를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10분 후 쯤에 와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재작년 5학년 때 맡았던 아이들이라 남다른 정이 가고 그 아이들이 졸업하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던 터에 시간이 되어 급식실로 달려갔다.
1년 새에 훌쩍 커버려 이제는 급식실이 좁아져 그들은 거기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곳이었다.
마치 콩나물이 시루에서 더 이상 자랄 수 없어 뽑혀야만 되는 것처럼 그 아이들이 몸담고 자라야
할 곳은 이제는 그 시루가 아니라 더 큰 그릇이었다.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순간 함께 야영 갔던 일, 학예회, 운동회, 체험학습,
청와대, 국회의사당, 서해대교, 공주, 부여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일,
매일 같이 밝고 맑은 노래를 부르고, 그리고 합창을 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긴 이별을 하는 사람처럼 그 아이들을 다 내 눈 안에 넣고 싶어 한 아이씩 눈도장을 찍다가 맨 앞에 앉아있는 한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마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무엇을 바라는지 아는 나이기에 그 아이에게 걸어가 둘이만 아는 ♡를 수없이 그리고 볼을 비비며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재작년 3월 2일(2001년)
교장선생님께서 5학년을 맡은 교사들만 교장실로 불러들이고
어떤 오해도 하지 말라며 아이부모의 입장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말 한 마디 건넬 줄도 모르고 단 한 마디 자기 생각을 적을 수도 없는 아이
외양은 정상이나 학습부진아도 지체부자유자도 아닌 자폐아...
이 아이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학급을 제비뽑기로 하여 자기 반이 결정이 되는데 제일 어른이신 부장님이 자기가 맡겠다고 하시고 제일 위의 언니가 그런 아이를 맡은 경험이 있으니 자기가 맡겠노라. 어느 누구도 마다하지 않고 다 자기가 맡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 하시던 교장 선생님.
그 순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애의 전 담임께서 나에게 그 애를 맡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2월에 하시던 일이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감이라는 게 참 이상했다.
드디어 제비뽑기를 하는데 맨 먼저 내가 뽑았는데 거기에 그 애가 1번으로 올라와 있지 않은가?
그 아이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어느 누구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연필로 쉴 새 없이 공책이나 스케치북에 먹칠 한 것처럼 까맣게 알 수 없는 낙서를 하고 순간적으로 괴성도 지르고 울기도 하고 교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일없이 눈을 깜박거리며 자기 머리를 때리고 울기도 하고 갑자기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기도 하고......
그 아이는 칠순의 할머니께서 그림자처럼 늘 함께 하셨으며 할머니는 그 애의 수족이 되어 공부를 함께 하시는 것이었다. 날마다 써 온 일기는 엄마가 써 준 것을 그대로 보고 써 오는 것이었다.. 보고 쓸 수는 있고 읽을 수는 있으나 의미를 몰랐다.
음악 소리가 나면 귀를 막곤 하였다. 그 애가 언젠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해주려고 날마다 엄마가 대신 쓰는 일기가 눈물겨워 나는 그 일기장에 매일같이 답글을 쓰며 그 애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쉬는 시간이면 그 애 옆에 가서 장난을 하기도 하고 서로 안마도 해가면서 어느 정도 친해 가던 어느 날 .
일기 속에 집에서 ‘아빠와 크레파스’를 불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피아노 앞으로 가 더듬더듬 그 노래를 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이 반짝이며 따라 부르던 그 모습!!!
그 순간 무한히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반 박자 정도 늦지만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아이는 특수아이기 때문에 오전 수업을 마치면 특수교육기관으로 가서 다시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후로 5~6교시에 들어있는 음악시간을 4교시로 옮기고 점심시간에 6개 반이 윤번제로 돌아가며 순서를 바꾸어 가며 식사를 하는데 우리 반은 제일 뒤에 먹자고 반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15분 동안 기다리는 시간을 최대한 아껴 그 애를 위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먼저 보낸 다음 그 아이 하고만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놀라운 사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또는 쉬는 시간에 수업 중에도 내 손을 잡고 피아노를 가리키며 짤막하게
“피아노, 노래...”
“무슨 노래할까?”
“바람이었으면. 우리 집은 동물원. 아이들이 그리는 세상....”.
라고 말하며 동요 책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펴는 것이었다.
그것도 서정적이고 차분한 노래로, 때로는 아주 발랄한 노래를.
그리고 그것도 외워서 부르지 않은가?
말로는 다 표현을 못하지만 마음 속으로 느끼고 있는 그 애만의 아름다운 세상이 있었던 것이다 .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줄만 알았던 그 아이가 음악을 통해서 아름다운 노래를 통해서 녹이 슬어 열지 못한 문을 아니 굳게 잠긴 마음의 문의 열쇠를 찾아 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던 것이다.
아직도 그 아이는 어느 누구하고도 대화를 나눌 줄 모르고 혼자서는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으며 늘 할머니와 함께 학교에 오고 있다. 할머니와 엄마의 말에 의하면 . 단 나하고 노래했던 기억은 오래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도 물어보면 그 때의 노래를 다 흥얼거리고 그 노래와 내 이름을 말하는 순간은 눈이 빛나고 있다고 말씀 하시곤 한다 .
나는 언젠가는 그 아이가 설리반 같은 진정한 선생님을 만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를 바란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 ‘내 마음의 노래’방의 홈지기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사랑하는 아리따운 아가씨와 함께 와서
“선생님, 저 이번에 결혼합니다. 선생님의 축하를 꼭 받고 싶습니다.”
하며 그 애가 제 손으로 직접 쓴 청첩장을 받을 날이 오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수업 중 인터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박 선생님, 잠시 후 졸업식 예행연습이 있는데 식가 지도를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10분 후 쯤에 와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재작년 5학년 때 맡았던 아이들이라 남다른 정이 가고 그 아이들이 졸업하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던 터에 시간이 되어 급식실로 달려갔다.
1년 새에 훌쩍 커버려 이제는 급식실이 좁아져 그들은 거기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곳이었다.
마치 콩나물이 시루에서 더 이상 자랄 수 없어 뽑혀야만 되는 것처럼 그 아이들이 몸담고 자라야
할 곳은 이제는 그 시루가 아니라 더 큰 그릇이었다.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순간 함께 야영 갔던 일, 학예회, 운동회, 체험학습,
청와대, 국회의사당, 서해대교, 공주, 부여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일,
매일 같이 밝고 맑은 노래를 부르고, 그리고 합창을 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긴 이별을 하는 사람처럼 그 아이들을 다 내 눈 안에 넣고 싶어 한 아이씩 눈도장을 찍다가 맨 앞에 앉아있는 한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마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무엇을 바라는지 아는 나이기에 그 아이에게 걸어가 둘이만 아는 ♡를 수없이 그리고 볼을 비비며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재작년 3월 2일(2001년)
교장선생님께서 5학년을 맡은 교사들만 교장실로 불러들이고
어떤 오해도 하지 말라며 아이부모의 입장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말 한 마디 건넬 줄도 모르고 단 한 마디 자기 생각을 적을 수도 없는 아이
외양은 정상이나 학습부진아도 지체부자유자도 아닌 자폐아...
이 아이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학급을 제비뽑기로 하여 자기 반이 결정이 되는데 제일 어른이신 부장님이 자기가 맡겠다고 하시고 제일 위의 언니가 그런 아이를 맡은 경험이 있으니 자기가 맡겠노라. 어느 누구도 마다하지 않고 다 자기가 맡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 하시던 교장 선생님.
그 순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애의 전 담임께서 나에게 그 애를 맡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2월에 하시던 일이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감이라는 게 참 이상했다.
드디어 제비뽑기를 하는데 맨 먼저 내가 뽑았는데 거기에 그 애가 1번으로 올라와 있지 않은가?
그 아이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어느 누구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연필로 쉴 새 없이 공책이나 스케치북에 먹칠 한 것처럼 까맣게 알 수 없는 낙서를 하고 순간적으로 괴성도 지르고 울기도 하고 교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일없이 눈을 깜박거리며 자기 머리를 때리고 울기도 하고 갑자기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기도 하고......
그 아이는 칠순의 할머니께서 그림자처럼 늘 함께 하셨으며 할머니는 그 애의 수족이 되어 공부를 함께 하시는 것이었다. 날마다 써 온 일기는 엄마가 써 준 것을 그대로 보고 써 오는 것이었다.. 보고 쓸 수는 있고 읽을 수는 있으나 의미를 몰랐다.
음악 소리가 나면 귀를 막곤 하였다. 그 애가 언젠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해주려고 날마다 엄마가 대신 쓰는 일기가 눈물겨워 나는 그 일기장에 매일같이 답글을 쓰며 그 애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쉬는 시간이면 그 애 옆에 가서 장난을 하기도 하고 서로 안마도 해가면서 어느 정도 친해 가던 어느 날 .
일기 속에 집에서 ‘아빠와 크레파스’를 불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피아노 앞으로 가 더듬더듬 그 노래를 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이 반짝이며 따라 부르던 그 모습!!!
그 순간 무한히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반 박자 정도 늦지만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아이는 특수아이기 때문에 오전 수업을 마치면 특수교육기관으로 가서 다시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후로 5~6교시에 들어있는 음악시간을 4교시로 옮기고 점심시간에 6개 반이 윤번제로 돌아가며 순서를 바꾸어 가며 식사를 하는데 우리 반은 제일 뒤에 먹자고 반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15분 동안 기다리는 시간을 최대한 아껴 그 애를 위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먼저 보낸 다음 그 아이 하고만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놀라운 사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또는 쉬는 시간에 수업 중에도 내 손을 잡고 피아노를 가리키며 짤막하게
“피아노, 노래...”
“무슨 노래할까?”
“바람이었으면. 우리 집은 동물원. 아이들이 그리는 세상....”.
라고 말하며 동요 책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펴는 것이었다.
그것도 서정적이고 차분한 노래로, 때로는 아주 발랄한 노래를.
그리고 그것도 외워서 부르지 않은가?
말로는 다 표현을 못하지만 마음 속으로 느끼고 있는 그 애만의 아름다운 세상이 있었던 것이다 .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줄만 알았던 그 아이가 음악을 통해서 아름다운 노래를 통해서 녹이 슬어 열지 못한 문을 아니 굳게 잠긴 마음의 문의 열쇠를 찾아 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던 것이다.
아직도 그 아이는 어느 누구하고도 대화를 나눌 줄 모르고 혼자서는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으며 늘 할머니와 함께 학교에 오고 있다. 할머니와 엄마의 말에 의하면 . 단 나하고 노래했던 기억은 오래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도 물어보면 그 때의 노래를 다 흥얼거리고 그 노래와 내 이름을 말하는 순간은 눈이 빛나고 있다고 말씀 하시곤 한다 .
나는 언젠가는 그 아이가 설리반 같은 진정한 선생님을 만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를 바란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 ‘내 마음의 노래’방의 홈지기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사랑하는 아리따운 아가씨와 함께 와서
“선생님, 저 이번에 결혼합니다. 선생님의 축하를 꼭 받고 싶습니다.”
하며 그 애가 제 손으로 직접 쓴 청첩장을 받을 날이 오기를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