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함박눈
'순아! 빨리 일어나 냇갈에 (시냇물) 멱감으로 가거라"
반세기가 훨씬 지난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겨울 방학 때의 추억이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랑채에 들러 오시면서 아직도 아랫목에 누워있는 저를 보시더니 친구들 모두 다 냇갈에가서 멱을 감고 있다는 말씀이시다. 그때는 제가 막내여서 아버지께서 항상 저를 건드리며 장난을 잘 하셨는데 중학교 갈 무렵 바다가 태어나는 바람에 그만 막내의 사랑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날따라 함박눈이 많이 내린 추운 겨울 아침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냇갈에서 멱을 감고 있다고 하시는 아버지...
언제나 재치있는 유모어로 항상 웃음을 자아 내시던 아버지...
올 겨울들어 모처럼 오늘 아침 눈이 소복히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성당엘 갔는데 신부님 강론말씀은 하나도 들리지 아니하고 내 머리에는 아버지 생각으로 가득하여 갑자기 너무나 뵙고 싶은 생각에 어떻게 미사가 끝났는지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의 우리동네 냇갈은 태봉산에서 내려오는 물 줄기로 창포바다를 향해 늘 맑게 흐르고 있어서 여름이면 모두들 멱을 감고 수영도 하면서 물속기기 연습도 하고 때로는 붕어나 장어도 잡고 갈이라는 깨끗하고 날쌘 물고기들의 고향이던 우리 동네 냇갈.
언제부터인지 공해로 인해 오물만이 가득한 냇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나 많이 아프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태봉산은 가수 남진씨 가문의 선산으로 산 일을 할 때는 그 근방 잔칫날이었다
그리고 그 산줄기를 쭉 이어가면 산봉우리에 어마어마하게 큰 절구통처럼 생긴 모습의 바위가 묻혀 있는데 주민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모두 힘을 합해서그 바위 뚜껑을 열고보니 그 속에는 고려정종 24년 이라고 쓰여 있었고 왕자의 태를 담은 옥항아리가 있었다 (뚜껑을 열때가 1954년경)
지금 생각해보면 그 높은 산꼭대기까지 그 큰 바위를 어떻게 운반했을까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는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유모어가 넘치신 분이셨고 누구나 친구처럼 대해 주셨다.
우리집엔 사랑채에 상하방이 있었고 마루가 뺑둘러 있어서 우리동네의 휴게소처럼 사용하고 언제나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공동쉼터이기도 했었다.
우리 가족끼리 있어 본 기억이 없다 .
언제나 이웃과 함께 살았었고 찬 물이라도 이웃과 함께 나누시려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늘 아침 모처럼 내려 쌓여있는 눈을 보니 아버지께서 지금도 생존해 계시다면 지역사회를 위하여 무슨 구상을 하시고 계실까?
그시절 학교를 더 보내주지 아니한다고 무척이나 투정을 부리고 아버지를 원망도 많이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여자들은 여학교만 나와서 결혼을 잘하면 제일 잘하는 일이라며 여자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반대하시더니 시대가 바뀌니 바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공직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셨다
언제나 우리 가족보다는 이웃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시려는 아버지 나름데로 사회에 공헌한 점을 지역주민들이 높이 평가하여 돌아가신 후 18년이 지난 1988년 12월 28일에 서울에서~목포가는 청계북교 뒷 동산 고속도로 승강장 옆에는 "덕 암 선 생 박양규 의 공적비" 라고 세워져 있다. 학교를 안보내 준다고 원망스럽던 아버지...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서인지 공적비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존경스럽습니다.
하필이면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아침 아버지께서
" 순아! 냇갈에 친구들 멱감고 있으니 얼릉 일어나서 너도 가서 멱감고 오너라"
하시던 아버지...
많이 보고싶어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겨울 방학 때의 추억이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랑채에 들러 오시면서 아직도 아랫목에 누워있는 저를 보시더니 친구들 모두 다 냇갈에가서 멱을 감고 있다는 말씀이시다. 그때는 제가 막내여서 아버지께서 항상 저를 건드리며 장난을 잘 하셨는데 중학교 갈 무렵 바다가 태어나는 바람에 그만 막내의 사랑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날따라 함박눈이 많이 내린 추운 겨울 아침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냇갈에서 멱을 감고 있다고 하시는 아버지...
언제나 재치있는 유모어로 항상 웃음을 자아 내시던 아버지...
올 겨울들어 모처럼 오늘 아침 눈이 소복히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성당엘 갔는데 신부님 강론말씀은 하나도 들리지 아니하고 내 머리에는 아버지 생각으로 가득하여 갑자기 너무나 뵙고 싶은 생각에 어떻게 미사가 끝났는지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의 우리동네 냇갈은 태봉산에서 내려오는 물 줄기로 창포바다를 향해 늘 맑게 흐르고 있어서 여름이면 모두들 멱을 감고 수영도 하면서 물속기기 연습도 하고 때로는 붕어나 장어도 잡고 갈이라는 깨끗하고 날쌘 물고기들의 고향이던 우리 동네 냇갈.
언제부터인지 공해로 인해 오물만이 가득한 냇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나 많이 아프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태봉산은 가수 남진씨 가문의 선산으로 산 일을 할 때는 그 근방 잔칫날이었다
그리고 그 산줄기를 쭉 이어가면 산봉우리에 어마어마하게 큰 절구통처럼 생긴 모습의 바위가 묻혀 있는데 주민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모두 힘을 합해서그 바위 뚜껑을 열고보니 그 속에는 고려정종 24년 이라고 쓰여 있었고 왕자의 태를 담은 옥항아리가 있었다 (뚜껑을 열때가 1954년경)
지금 생각해보면 그 높은 산꼭대기까지 그 큰 바위를 어떻게 운반했을까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는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유모어가 넘치신 분이셨고 누구나 친구처럼 대해 주셨다.
우리집엔 사랑채에 상하방이 있었고 마루가 뺑둘러 있어서 우리동네의 휴게소처럼 사용하고 언제나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공동쉼터이기도 했었다.
우리 가족끼리 있어 본 기억이 없다 .
언제나 이웃과 함께 살았었고 찬 물이라도 이웃과 함께 나누시려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늘 아침 모처럼 내려 쌓여있는 눈을 보니 아버지께서 지금도 생존해 계시다면 지역사회를 위하여 무슨 구상을 하시고 계실까?
그시절 학교를 더 보내주지 아니한다고 무척이나 투정을 부리고 아버지를 원망도 많이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여자들은 여학교만 나와서 결혼을 잘하면 제일 잘하는 일이라며 여자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반대하시더니 시대가 바뀌니 바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공직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셨다
언제나 우리 가족보다는 이웃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시려는 아버지 나름데로 사회에 공헌한 점을 지역주민들이 높이 평가하여 돌아가신 후 18년이 지난 1988년 12월 28일에 서울에서~목포가는 청계북교 뒷 동산 고속도로 승강장 옆에는 "덕 암 선 생 박양규 의 공적비" 라고 세워져 있다. 학교를 안보내 준다고 원망스럽던 아버지...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서인지 공적비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존경스럽습니다.
하필이면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아침 아버지께서
" 순아! 냇갈에 친구들 멱감고 있으니 얼릉 일어나서 너도 가서 멱감고 오너라"
하시던 아버지...
많이 보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