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회 내 마음의 노래 창작 가곡 발표회 '너에게 노래가 되어' 를 보고
제 4회 내마음의 노래 창작 가곡 발표회 '너에게 노래가 되어'를 보고
탁계석(음악평론가)
음악회 제목이 이처럼 멋진 게 또 있을까. '너에게 노래가 되어'는 매우 잘 뽑아진 시적 카피이자 콘서트 제목이다.
'내마노 음악회'가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모습은 세상 모든 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축적되면서 발전하는 것이란 진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토요일 (7월 7일)오후 4시의 명동 꼬스트홀은 성당의 다소 혼잡스런 분위기를 뚫고 들어가 가득한 청중속에서 다시 장소가 협소해 북적거렸다.
연주회 시작 전의 술렁거림은 마치 찬양의 밤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전도대회에 온 듯한 분위기였다. 무릇 모든 행사에 청중 동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때 청중이 가득 온 것은 일단은 성공이었다.
정보형 피아노에 박원자 시인이 낭송을 했다. '소년, 너를 보면', 콘서트 컨셉에 맞는 좋은 착상이고 시의 전달이다. 그런데 음향이 이를 받쳐주지 못했다. 조명과 음향의 관계를 미처 치밀하게 측정하지 못한 탓에 서시의 전달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 잡지 못했다.
'서시' 전에 청중을 안정시키고 집중력을 강화 시켜 놓는 인트로 장치가 있어야 했다.
육군 군악대의 꽃구름 속에 환희의 서곡, 도라지 타령, 메들리는 음악의 친근감을 위해서도 깜짝 이벤트 같은 호기심과 청중의 반응으로 마음을 열어준 역할을 했다.
청중과의 소통을 위해서 청소년들의 음악적 호기심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었다. 다음, 정다운 가곡 오태훈 어나운서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해설이 있고 음악회가 시작되었는데
객석의 완전 소등으로 답답함이 느껴졌다. 주어진 프로그램이나 악보를 읽을 수 없어 답답했다. 프로그램을 읽을 수 없다면 비오는 날 펴지지 않는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명은 관객의 입장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무대에서 있는 사람들도 객석이 깜깜하면 객석의 반응이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평자도 그곳에서 여러번 진행을 해 보아 알고 있고 그곳이 스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조명, 음향 등의 문제가 적지 않게 노출되는데 이번 기회에 성당에서 하지 않는다면 모르되, 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적인 콘서트 진행이 되도록 배려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성당이니 모든 것이 불편해도 이해해야 하고 잘못되어도 그냥 넘어가야 한다는 너그러움은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북적거리는 토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의 꼬스트홀은 여느 장소에서 느낄 수 없는 성당의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작지만 알차고 훌륭한 연주회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그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런 것들부터 하나씩 고쳐가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아무튼 기능을 상실한 팜플렛은 후반에 이르르서 개선을 요구해 시정되긴 했지만 지금까지 수백회의 진행을 했을 코스트홀이 조명의 기본 기능 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당장 고쳐야 할 부분이다.
사실 음악회를 해 보면 알지만 챙겨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잘한 것은 표가 나지 않지만 사소한 실수가 그 날 음악회를 망치는 것은 다반사다.
다시 프로그램 내용으로 돌아와 전체 음악회에 대한 것을 말하자면 '너에게 노래가 되어'의 주제나 컨셉은 좋았지만 내용물은 청소년을 배려하고 청소년의 눈높이, 입맛에 맞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예전에 하던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했다.
청소년을 두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오늘의 청소년들이 소화하고 있는 음악 형태는 어떤 것인가의 심각한 진단이 결여된 무늬만 '너에게 노래가 되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청소년들이 실제 부르고 들을 수 있는 곡들이 너무 적었다. 마치 이솝우화의 '두루미의 식사초대' 가 될뻔했다. 바라건데 . 와. 나 꼬스토홀 가서 감동 먹었다! 가곡 음악회, 클래식 음악회가 우리가 매일 듣는 음악과 다른 무엇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려면 상업주의 음악의 치열함 보다 우리가 이를 이겨내야 한다.
백석학교 중창단 .이런 앙상블 단체를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큰 합창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레퍼토리도 구성도 재미있다. 좀 앙상블이 단단하지 못했지만.. 그것 대로 의미가 있다.
특히 강북청소년 실내악단은 이 음악회의 성격과 방향을 잘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악 앙상블은 전문가들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쉬운 터에 학생들의 앙상블 연주는 시가하는 바가 크다.
테너 문상준이 출연해 노래도 설득력있게 불렀고 그의 프로필에 '우리은행'도 빛나 보였다. 동호인과 아마추어가 격의 없이 무대를 만든 것은 우리 클래식의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다.
그리고 전 출연진이 악보 보면대를 놓고 노래를 부른 것은 잘못이다. 시간적으로 충분치 않아서 였겠지만 창작을 부를 땐 기존의 곡 보다 3-4 배 더 온 정성을 기울여 불러야 한다.
이미 기존의 창작 가곡 발표회회에서도 암보가 굳어져 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창작은 '보고 해도 된다'는 구습을 버려야 창작이 발전할 수 있다.
뻔하지 않는가. 부르는 사람도 알딸딸 하고 듣는 사람도 난생 처름 듣는 것이라면 전달이 되겠는가.
또 팜플렛에 가사 한번 보고 연주자 한번 보고 하는 식은 마치 병아리가 물한 모금 먹고 하늘 보고 하는 식이어서 고개가 아프고 공연 관람이 불편하다. 무대 옆에 환등 자막을 하면서 송월당님이 하는 것처럼 가사를 흘려 내리거나 비춰줄 수 있지 않으냐 하는 말이다.
내마음의 노래 합창단 연주가 좋았다. 노래 두곡 부르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다해준 단원들, 화합이 잘 된 합창단의 진정성이 돋보였다.
구청의 어머니 합창단들은 '나 예뻐' 하는 식의 과시적 행태가 눈에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비하면 내마노 합창단은 훨씬 예술적 응집력이 강한 단체로 바람직한 합창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출연 성악가들은 진지했다. 특히 김현주의 음악 전달력이 분명하고 세련된 발성과 노래 솜씨가 창작곡 같지 않게 익숙한 표현력을 보여 주었다. 같은 곡이라도 곡은 누가 부르느냐, 또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났다. 창작 곡의 반은 연주자에게 있는 것이다.
마지막 전체 합창단과 함께 하는 님이 오시는지, 원로 김규환 선생님을 모시고 부른 것도 의미가 큰 의미가 있다. 이런 것을 청소년들에게 좀 강하게 심어주는 맨트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슈베르트와 함께 그의 가곡을 불렀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오늘 오신 훌륭한 작곡가 분들. 특히 교과서에나 보던 김규환 선생님을 여러분이 직접 모시고 노래를 한다는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일 것이다 하는 식의 정확한 메시지를 줄수도 있을 것이다.
정동기 운영자가 말없이 사이트를 이끌고 음악회 까지 진행하느라 참으로 노고가 많다. 이에 스텝들이 구성되어 음악회를 보다 조직적으로 이끌어가려는 단계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런 조직을 더욱 발전, 강화 시키면 아마 머지 않아 어슬픈 나홀로 조직 단체들이 자극을 받게 될 것이다.
팜플렛이 너무 고급스럽다. 나중에 어디 가서 스폰서 구하려고 해도 포장이 되어 있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것은 이해하지만 회원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구해 한다면 거품을 빼고 실용적, 보급형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말그대로 청소년을 겨냥한 음악회는 청소년을 주인으로 하자는 음악회다. 청소년이 어른들의 행사에 들러리가 되어선 안된다.
더 눈눞이를 낮추고, 더 청소년의 입맛에 맛게 그들을 설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간격이 좁혀질 수 있다.
그리해서 이 음악회에 제목 그대로 '너에 노래가 되어' 야 한다. 그들의 가슴속을 파고 들어가 클래식, 가곡이 어렵지도, 불편하지도 않고 너희들의 가슴속에서 미래를 향해 피는 한 그루 생각하는 나무, 마음을 밝게 하는 꽃이 란 사실을 말이 아닌 자기 체험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정말 힘든 가운데 음악회를 마련하는 것인 만큼 우리가 조금만 더 정성을 기울이고 세심하게 배려하고
우리 어께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지를 살펴 가면서 음악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참으로 많은 수고와 경비 조달을 위해 발로 뛰고 행사에 보지이 않는 수고의 손길에 격려와 큰 박수를 보낸다. (오늘 발표 개개 곡의 리뷰는 생략!)
모든 것이 한걸음씩 희망을 향해 달리고 있음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