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캐러밴 (칠장산)
길고 긴 캐러밴
(칠장산)
높은 산이 반드시 좋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높은 곳을 향한 산 나그네의 마음을 어찌 나쁘다하랴.
산이 많아도 높은 산이 없는 우리나라, 1,500미터를 넘는 고봉 아홉 좌에 이미 문안드리고, 1,000미터 이상 되는 200여 좌의 산도 거의 찾아뵈었으니 전국 각시도 명산들을 어지간히 오른 셈인데 한두 번 오른 산을 가리다보니 자연 낮은 산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안성시에 있는 칠장산(七長山)은 500미터에도 못 미치는 작은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죽산현 불우 조에 보면, 현 남쪽 15리 칠현산(七賢山)에 칠장사가 있는데 신우(辛禑)9년에 왜적이 함부로 내지에 들어오므로 충주 개천사에 감추어둔 사적을 여기에 옮겼다고 하였다.
안성시청 홈페이지에 의하면 이산은 원래 아미산(蛾眉:미인의 눈썹)인데
고려 때 혜소(慧炤)국사가 수도하며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한데 연유하여 칠현산(七賢山:516m)이라 한다 하였는데, 칠장사의 현판에는 높을 아(峨)자 산이름 미(嵋)자를 썼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 가릴 수가 없다.
어쨌든 지금은 안부 하나를 사이에 둔 492봉을 독립하여 칠장산(七長山)이라 부르는데 그 기슭에 칠장사가 있어 모두 이를 주봉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조선 중기의 의적 임꺽정의 일곱 의형제가 이 가람에서 결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명희의 대하역사소설 「임꺽정」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칠장사 서쪽기슭 편편한 땅에 새로 세운 소도바 속에 들어있는 한줌 재는 85세 일생을 이 세상 천대 속에서 보낸 사람이 뒤에 끼친 것이다. 그 사람이 초년에는 함흥 고리 백정이요, 중년에는 동소문 안 갖바치요, 말년에는 칠장사 백정 중이라 천인으로 일생을 마쳤으나 고리 백정으로는 이교리의 처삼촌이 되고, 갖바치로는 조정암의 지기가 되며, 백정 중으로는 승속 간에 생불 대접을 받았다···”
임꺽정이 자기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인 생불스님을 뵈러 칠장사에 갔다가 이봉학, 박유복, 배돌석, 황천황동, 곽오주, 길막봉이와 사생동고의 형제 결의를 한다.
생불스님은 이미 돌아가셔 49일 재를 맞는데 임꺽정 일행이 가지고간 무명 열 필을 내어놓으며 재수에 쓰라하니 상좌인 젊은 중이 이걸로 스님의 목상을 하나 파서 부처님으로 모시자고 제의하여 그렇게 하였으니··· 이 영검스런 목불의 이름이 곧 백정부처이다.
칠장산은 금북정맥의 시발점이다.
금북(錦北)정맥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시작한 한남금북정맥이 끝나는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덕성산-서운산-성거산-태조산-국사봉-봉수산-백월산-일월산-덕숭산-가야산-성왕산-오석산-백화산-지령산을 거쳐 태안반도의 끝인 안흥진에서 머리 숙이는 장장 266킬로에 달하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통상 14구간으로 나누어 오르는데 제1구간인 이번 코스는 도상거리 19킬로, 실제 주행거리는 23킬로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경기안성시에서 충북진천군으로 넘어가는 387번 국도의 도경계 옥정현 고갯마루 가파른 절개지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연중 가장 춥다는 대한 다음날이라 산 날씨가 행여 춥지 않을까하는 걱정과는 달리 화사한 햇빛이 봄을 느끼기에 결코 빠르지 않다. 벌써 헐벗은 진달래 우듬지에 맺힌 꽃눈들이 푸른빛을 띠고 부풀어 오른다.
길고 긴 능선, 어떤 곳은 쇠등처럼 날카롭고 또 어떤 곳은 말 잔등처럼 아늑해도 발길에 차이는 돌 하나 없는 맨땅 위에 굴참나무 떡갈나무 낙엽이 소복이 쌓였으니 그 폭신폭신한 느낌은 도심에서야 어찌 맛보랴.
시원스레 쭉 쭉 뻗어나가는 산줄기들이 수치상의 높이보다 훨씬 우람해 보인다.
크던 작던 가파름 없이 봉우리는 솟지 못하나 보다. 수많은 봉우리를 오를 때 마다 등 뒤에 비지땀이 솟는다.
덕성산(521m)을 지나 칠현산(516m)을 넘으니 칠장산으로 오르는 안부에 덩실 돌탑이 있는데 그 앞에 ‘칠순 비 부부 탑’이라 음각한 검은 대리석비가 서있다. 그러고 보니 이 산 군데군데 같은 솜씨의 돌탑 몇 기가 있었다.
칠순이면 인생황혼인데 무슨 사연이 있어 이 돌탑들을 쌓았을까.
무슨 비원이 있는 것도, 하릴없어 쌓은 것도 아니요, 무언가 인생의 흔적을 남기려는 노부부의 의지를 이 작은 대리석비가 대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허술한 돌탑이 위대한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가뜩이나 돌이 귀한 이 산에서 온 정성을 기우렸을 노 부부, 그들이 몸공을 들인 만큼 건강으로 되돌려 받았으면 한다.
이제 눈앞에 남은 작은 산 하나를 마저 스쳐 칠장사에 들어서니 혜소국사비 현판이 언뜻 눈 안에 든다.
국사는 안성 출신으로 고려 문종 때 왕사를 거쳐 국사에 봉해졌으며 이 절에서 입적하셨다는데 그의 업적을 기려 세운 추모비로 받침돌(龜趺), 비 몸(碑身), 비 머리(螭首) 등이 분리된 채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의 몸이 대각선으로 갈라진 듯 한 흔적을 놓고 어떤 이는 임란 때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절에 침입하자 노승이 나타나 크게 꾸짖으니 왜장이 칼을 뽑아 쳤는데 노승은 간데없고 비석이 피를 흘리니 왜군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는 전설이 있다기에 그 근거를 절에 물었더니 이 지역은 왜군이 침입한 역사적인 사실이 없었다고 일축한다.
하기야 이순신 장군의 장검정도라면 몰라도 왜군들이 허리춤에 달랑달랑 달고 다니는 일본 칼로야 저 육중한 비 몸을 어찌 자른단 말이냐 어림없는 소리다.
임꺽정 등이 불상장인을 시켜 만들었다는 생불상도, 조선 선조 인목대비가 억울하게 죽은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하여 이 절을 원당(願堂)으로 삼아 친히 써 내렸다는 족자도 잘 보존되고 있다고 나이 든 승려가 비밀인 듯 목소리를 낮추어 일러준다.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14호인 칠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주불전이다. 조선 숙종 때 세도가들에 의해 불탄 뒤 옮겨 짓고 고치기를 거듭하다 순조 때(1828년) 승려 완진이 다시 지었다니 179년의 연륜, 희끄무레 빛바랜 단청에 오히려 경건함이 감돈다.
무언가 빠뜨리고 가는 것 같은 허전한 마음에 뒤돌아보니 칠장산 산마루에 이내가 자욱하다.
1977년 김영도 대장이 이끈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25일에 걸쳐 그 높이의 43배인 380킬로의 캐러밴을 했다는데, 나는 492미터의 칠장산을 오르기 위해 그의 40배인 20킬로를 6시간 걸었으니 길고 긴 캐러밴이었다.
(칠장산)
높은 산이 반드시 좋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높은 곳을 향한 산 나그네의 마음을 어찌 나쁘다하랴.
산이 많아도 높은 산이 없는 우리나라, 1,500미터를 넘는 고봉 아홉 좌에 이미 문안드리고, 1,000미터 이상 되는 200여 좌의 산도 거의 찾아뵈었으니 전국 각시도 명산들을 어지간히 오른 셈인데 한두 번 오른 산을 가리다보니 자연 낮은 산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안성시에 있는 칠장산(七長山)은 500미터에도 못 미치는 작은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죽산현 불우 조에 보면, 현 남쪽 15리 칠현산(七賢山)에 칠장사가 있는데 신우(辛禑)9년에 왜적이 함부로 내지에 들어오므로 충주 개천사에 감추어둔 사적을 여기에 옮겼다고 하였다.
안성시청 홈페이지에 의하면 이산은 원래 아미산(蛾眉:미인의 눈썹)인데
고려 때 혜소(慧炤)국사가 수도하며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한데 연유하여 칠현산(七賢山:516m)이라 한다 하였는데, 칠장사의 현판에는 높을 아(峨)자 산이름 미(嵋)자를 썼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 가릴 수가 없다.
어쨌든 지금은 안부 하나를 사이에 둔 492봉을 독립하여 칠장산(七長山)이라 부르는데 그 기슭에 칠장사가 있어 모두 이를 주봉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조선 중기의 의적 임꺽정의 일곱 의형제가 이 가람에서 결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명희의 대하역사소설 「임꺽정」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칠장사 서쪽기슭 편편한 땅에 새로 세운 소도바 속에 들어있는 한줌 재는 85세 일생을 이 세상 천대 속에서 보낸 사람이 뒤에 끼친 것이다. 그 사람이 초년에는 함흥 고리 백정이요, 중년에는 동소문 안 갖바치요, 말년에는 칠장사 백정 중이라 천인으로 일생을 마쳤으나 고리 백정으로는 이교리의 처삼촌이 되고, 갖바치로는 조정암의 지기가 되며, 백정 중으로는 승속 간에 생불 대접을 받았다···”
임꺽정이 자기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인 생불스님을 뵈러 칠장사에 갔다가 이봉학, 박유복, 배돌석, 황천황동, 곽오주, 길막봉이와 사생동고의 형제 결의를 한다.
생불스님은 이미 돌아가셔 49일 재를 맞는데 임꺽정 일행이 가지고간 무명 열 필을 내어놓으며 재수에 쓰라하니 상좌인 젊은 중이 이걸로 스님의 목상을 하나 파서 부처님으로 모시자고 제의하여 그렇게 하였으니··· 이 영검스런 목불의 이름이 곧 백정부처이다.
칠장산은 금북정맥의 시발점이다.
금북(錦北)정맥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시작한 한남금북정맥이 끝나는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덕성산-서운산-성거산-태조산-국사봉-봉수산-백월산-일월산-덕숭산-가야산-성왕산-오석산-백화산-지령산을 거쳐 태안반도의 끝인 안흥진에서 머리 숙이는 장장 266킬로에 달하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통상 14구간으로 나누어 오르는데 제1구간인 이번 코스는 도상거리 19킬로, 실제 주행거리는 23킬로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경기안성시에서 충북진천군으로 넘어가는 387번 국도의 도경계 옥정현 고갯마루 가파른 절개지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연중 가장 춥다는 대한 다음날이라 산 날씨가 행여 춥지 않을까하는 걱정과는 달리 화사한 햇빛이 봄을 느끼기에 결코 빠르지 않다. 벌써 헐벗은 진달래 우듬지에 맺힌 꽃눈들이 푸른빛을 띠고 부풀어 오른다.
길고 긴 능선, 어떤 곳은 쇠등처럼 날카롭고 또 어떤 곳은 말 잔등처럼 아늑해도 발길에 차이는 돌 하나 없는 맨땅 위에 굴참나무 떡갈나무 낙엽이 소복이 쌓였으니 그 폭신폭신한 느낌은 도심에서야 어찌 맛보랴.
시원스레 쭉 쭉 뻗어나가는 산줄기들이 수치상의 높이보다 훨씬 우람해 보인다.
크던 작던 가파름 없이 봉우리는 솟지 못하나 보다. 수많은 봉우리를 오를 때 마다 등 뒤에 비지땀이 솟는다.
덕성산(521m)을 지나 칠현산(516m)을 넘으니 칠장산으로 오르는 안부에 덩실 돌탑이 있는데 그 앞에 ‘칠순 비 부부 탑’이라 음각한 검은 대리석비가 서있다. 그러고 보니 이 산 군데군데 같은 솜씨의 돌탑 몇 기가 있었다.
칠순이면 인생황혼인데 무슨 사연이 있어 이 돌탑들을 쌓았을까.
무슨 비원이 있는 것도, 하릴없어 쌓은 것도 아니요, 무언가 인생의 흔적을 남기려는 노부부의 의지를 이 작은 대리석비가 대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허술한 돌탑이 위대한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가뜩이나 돌이 귀한 이 산에서 온 정성을 기우렸을 노 부부, 그들이 몸공을 들인 만큼 건강으로 되돌려 받았으면 한다.
이제 눈앞에 남은 작은 산 하나를 마저 스쳐 칠장사에 들어서니 혜소국사비 현판이 언뜻 눈 안에 든다.
국사는 안성 출신으로 고려 문종 때 왕사를 거쳐 국사에 봉해졌으며 이 절에서 입적하셨다는데 그의 업적을 기려 세운 추모비로 받침돌(龜趺), 비 몸(碑身), 비 머리(螭首) 등이 분리된 채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의 몸이 대각선으로 갈라진 듯 한 흔적을 놓고 어떤 이는 임란 때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절에 침입하자 노승이 나타나 크게 꾸짖으니 왜장이 칼을 뽑아 쳤는데 노승은 간데없고 비석이 피를 흘리니 왜군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는 전설이 있다기에 그 근거를 절에 물었더니 이 지역은 왜군이 침입한 역사적인 사실이 없었다고 일축한다.
하기야 이순신 장군의 장검정도라면 몰라도 왜군들이 허리춤에 달랑달랑 달고 다니는 일본 칼로야 저 육중한 비 몸을 어찌 자른단 말이냐 어림없는 소리다.
임꺽정 등이 불상장인을 시켜 만들었다는 생불상도, 조선 선조 인목대비가 억울하게 죽은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하여 이 절을 원당(願堂)으로 삼아 친히 써 내렸다는 족자도 잘 보존되고 있다고 나이 든 승려가 비밀인 듯 목소리를 낮추어 일러준다.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14호인 칠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주불전이다. 조선 숙종 때 세도가들에 의해 불탄 뒤 옮겨 짓고 고치기를 거듭하다 순조 때(1828년) 승려 완진이 다시 지었다니 179년의 연륜, 희끄무레 빛바랜 단청에 오히려 경건함이 감돈다.
무언가 빠뜨리고 가는 것 같은 허전한 마음에 뒤돌아보니 칠장산 산마루에 이내가 자욱하다.
1977년 김영도 대장이 이끈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25일에 걸쳐 그 높이의 43배인 380킬로의 캐러밴을 했다는데, 나는 492미터의 칠장산을 오르기 위해 그의 40배인 20킬로를 6시간 걸었으니 길고 긴 캐러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