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는 짐승 소가 남긴 사리
말 못하는 짐승 소가 남긴 사리
(작성산. 동산)
“제천 북쪽은 평창과 가깝고, 동쪽은 영월과 경계가 맞닿았다. 만첩산중에 있는 깊은 산골이므로 참으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만 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그려진 제천의 모습이다.
대대로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는 제천은 아름다운 경승도, 이름 난 명산도 많은 곳이다.
작성산(鵲城山:771m)은 옛날 까치성산의 한자표기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청풍군 불우조에는 무암사(霧巖寺)는 백야산(白夜山)에 있다고 했는데 기타 사찰자료 등에는 금수산(錦繡山) 무암사라 했으며, 시청 홈 페이지에는 제천 10경중의 하나인 금수산이 원래는 백운산(백과사전 등에는 백암산)인데 퇴계 이황(李滉)선생이 산이 비단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답다하여 금수산으로 바꿨다 했다.
또 청풍부읍지(淸風府邑誌) 산천 조에는 금수산은 일명 무암(霧巖)으로 약초가 많은 명산이다고 한 기록 등을 요량해본다면 백야산, 백운산, 백암산 무암산 모두 금수산의 옛 이름이며, 크게는 이 거대한 산줄기에 솟아있는 작성산, 까치산, 동산 그 외 모든 봉우리들을 총망라하여 금수산이라 하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다.
우리는 55번 고속국도 결매령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입춘이 지나서 그런지 영하4도의 깜짝 추위라는데도 무성한 송림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잔설위에 속삭이는 봄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산은 높다기보다 가파르며, 크다기보다 기복이 심한 암릉이 매혹적인 산이다. 그래서 적설기나 결해빙기에 인적이 드물며 그만큼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급한 비탈을 낚아채 듯 올라서니 「작성산 771m 충청북도 제천시」란 표지석이 서있고, 여기서 남쪽 지척에 「까치산(鵲城山) 848m 금성면지역발전추진위원회」란 표지석이 서있다. 그러니까 이 산에 관한 여러 자료나, 이 산에 올라본 사람마다 산 이름과 높이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는 해답이 절로 머리를 스친다.
771봉은 분명 작성산(鵲城山)이니 까치성산이요, 848봉은 까치산이니 한자 표기를 鵲山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이 산의 최고봉은 848미터의 까치산이고, 주봉은 지형도에 표시된 대로 작성산이 아니랴.
이 까치산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옛날 이 산기슭에 왕궁이 있었다는데 임금이 신하들에게 저 봉우리에 까치가 앉거든 쏴 죽이라고 명했다. 어느 날 까치가 날아와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게 일본 왕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일왕이 우리나라에 와서 죽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일본이 얼마나 역겹고 얄미웠으면 이런 전설이 나왔을까.
모두들 여기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데 나는 혼자서 걸었다.
805봉, 785봉을 지나는 암능은 동편이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을 이루어 눈길에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마지막 가는 길이 아닐까 은근히 겁이 난다.
새목재는 안부라기보다 심연 같은 깊은 골짜기다. 내려가기도 힘들었지만 여기서 동산(東山:896m)으로 오르는 길 또한 숨 막히는 가파름이다.
부침(浮沈)이 있는 것, 인생길도 다 그런 것이거늘···
동산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더 없이 시원스럽다. 새목재에서 서쪽 충주호반 성내리 주차장에 이르는 깊고 긴 계곡을 사이에 두고 북녘에 작성산줄기가 휘감아 섰고, 남녘으론 10여좌의 암봉들이 줄을 이은 동산줄기가 에워싸 그야말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 곳이 바로 옌듯하다.
멀리 남쪽으로 충주호 너머 바라다 보이는 산군이 월악산국립공원이련만 뽀얀 이내에 가려 그 형체를 분간하기 어렵고, 남동으로 지도상의 직선거리 7킬로 지점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금수산(錦繡山:1,016m)이 틀림없다.
오늘 나는 무암사와 소부도 탑을 꼭 봐야한다. 그래서 계획된 등산로를 탈출하여 계곡 길로 들었다.
「무암사지 부도」란 현판이 번쩍 눈에 띈다. 문화유적(0511-12-0130)인 이는 조선시대의 화강암 부도로 주인 없는 황소가 일을 하다가 죽어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와 여기에 봉안했단다.
그렇다면 신라고승 의상대사가 무암사를 창건할 때 힘든 일을 거들고 죽은 황소를 화장하니 사리가 나와 그 불심에 감동하여 사리탑을 세웠다던 시청 자료와의 시대적 차이를 어떻게 좁힌단 말이냐.
긴 세월 비바람에 닳고 닳아 비문의 흔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탑 몸을 만져보고 들여다봐도 확인할 길이 없다.
이 부도 뒷산에 소뿔바위가 있다기에 경사 50도는 됨직한 산비탈을 기어올랐다.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지는 이 공간에 소 머리빡에 난 두 뿔 같은 바위가 하늘로 솟아있다. 예님은 어떻게 이 바위를 알고 이 아래 소 부도를 세웠을까.
여기서 200미터쯤 떨어진 무암사, 출입문 옆에 암굴이 있어 ‘석굴 안 불당’이라 하던데 그 속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맛이 그리도 감미롭다. 먼 산길에 목이 말라서일까 한 사발을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절 뜰에서 바라다 보이는 맞은편 산릉에 암군이 특이하여 한 처사에게 물었더니 안개가 끼면 잘 보이고 안개가 걷히면 잘 안 보이는 무암(霧巖)이라고 일러주며, 저 쪽에 있는 게 양근바위인데 멀지않으니 한번 가보라고 자랑하듯 권유한다. 나는 오늘 말 못하는 짐승인 소의 사리탑을 보았는데 더 볼 게 뭐 있겠냐고 했더니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일생 소 한 마리쯤 위장 속에 장사지낸 난들 죽어 화장하면 사리 한 두과 안 나올까나···.
이산 곳곳에 자리 잡은 낙타바위, 장군바위, 배바위 등등은 모두 기암괴석들로 딴 곳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볼거리들이다. 그러나 그저 생김새에 따라 이름을 지어 붙였을 뿐 아무런 전설도 사연도 역사도 의미도 없는 것들, 이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건 내 성미인지도 모른다.
등반종점인 성내리(城內里), 두말할 나위 없이 성안이란 뜻이다. 돌과 흙을 버물어 쌓은 1,100미터에 달하는 이 까치산성에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 등이 발견 되어 그 역사를 가늠케 하고 있다.
주차장 길가에 “마을 자랑 비”란 초라한 돌비석 하나가 서있다.
길 건너 낮은 개울가 큰 느티나무 곁에 어쩌면 날려는 봉의 모습인 집채만 한 큰 바위가 있어 봉비암(鳳飛巖)이라 했다는데, 여기에 한 노파가 움막을 치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자 밤마다 바위가 울어 그 뒤로 주민들은 봉명암(鳳鳴巖)이라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매년 정월이면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나는 그 바위를 살피러 내려갔다가 발밑에 뒹구는 돌 하나, 갸름하게 둥근 꼭 오리 알만한 흰 돌, 그걸 주워 보물인양 조심스럽게 주머니 속에 넣었다.
마치 봉의 알이라도 되는 듯이.
(작성산. 동산)
“제천 북쪽은 평창과 가깝고, 동쪽은 영월과 경계가 맞닿았다. 만첩산중에 있는 깊은 산골이므로 참으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만 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그려진 제천의 모습이다.
대대로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는 제천은 아름다운 경승도, 이름 난 명산도 많은 곳이다.
작성산(鵲城山:771m)은 옛날 까치성산의 한자표기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청풍군 불우조에는 무암사(霧巖寺)는 백야산(白夜山)에 있다고 했는데 기타 사찰자료 등에는 금수산(錦繡山) 무암사라 했으며, 시청 홈 페이지에는 제천 10경중의 하나인 금수산이 원래는 백운산(백과사전 등에는 백암산)인데 퇴계 이황(李滉)선생이 산이 비단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답다하여 금수산으로 바꿨다 했다.
또 청풍부읍지(淸風府邑誌) 산천 조에는 금수산은 일명 무암(霧巖)으로 약초가 많은 명산이다고 한 기록 등을 요량해본다면 백야산, 백운산, 백암산 무암산 모두 금수산의 옛 이름이며, 크게는 이 거대한 산줄기에 솟아있는 작성산, 까치산, 동산 그 외 모든 봉우리들을 총망라하여 금수산이라 하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다.
우리는 55번 고속국도 결매령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입춘이 지나서 그런지 영하4도의 깜짝 추위라는데도 무성한 송림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잔설위에 속삭이는 봄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산은 높다기보다 가파르며, 크다기보다 기복이 심한 암릉이 매혹적인 산이다. 그래서 적설기나 결해빙기에 인적이 드물며 그만큼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급한 비탈을 낚아채 듯 올라서니 「작성산 771m 충청북도 제천시」란 표지석이 서있고, 여기서 남쪽 지척에 「까치산(鵲城山) 848m 금성면지역발전추진위원회」란 표지석이 서있다. 그러니까 이 산에 관한 여러 자료나, 이 산에 올라본 사람마다 산 이름과 높이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는 해답이 절로 머리를 스친다.
771봉은 분명 작성산(鵲城山)이니 까치성산이요, 848봉은 까치산이니 한자 표기를 鵲山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이 산의 최고봉은 848미터의 까치산이고, 주봉은 지형도에 표시된 대로 작성산이 아니랴.
이 까치산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옛날 이 산기슭에 왕궁이 있었다는데 임금이 신하들에게 저 봉우리에 까치가 앉거든 쏴 죽이라고 명했다. 어느 날 까치가 날아와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게 일본 왕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일왕이 우리나라에 와서 죽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일본이 얼마나 역겹고 얄미웠으면 이런 전설이 나왔을까.
모두들 여기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데 나는 혼자서 걸었다.
805봉, 785봉을 지나는 암능은 동편이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을 이루어 눈길에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마지막 가는 길이 아닐까 은근히 겁이 난다.
새목재는 안부라기보다 심연 같은 깊은 골짜기다. 내려가기도 힘들었지만 여기서 동산(東山:896m)으로 오르는 길 또한 숨 막히는 가파름이다.
부침(浮沈)이 있는 것, 인생길도 다 그런 것이거늘···
동산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더 없이 시원스럽다. 새목재에서 서쪽 충주호반 성내리 주차장에 이르는 깊고 긴 계곡을 사이에 두고 북녘에 작성산줄기가 휘감아 섰고, 남녘으론 10여좌의 암봉들이 줄을 이은 동산줄기가 에워싸 그야말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 곳이 바로 옌듯하다.
멀리 남쪽으로 충주호 너머 바라다 보이는 산군이 월악산국립공원이련만 뽀얀 이내에 가려 그 형체를 분간하기 어렵고, 남동으로 지도상의 직선거리 7킬로 지점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금수산(錦繡山:1,016m)이 틀림없다.
오늘 나는 무암사와 소부도 탑을 꼭 봐야한다. 그래서 계획된 등산로를 탈출하여 계곡 길로 들었다.
「무암사지 부도」란 현판이 번쩍 눈에 띈다. 문화유적(0511-12-0130)인 이는 조선시대의 화강암 부도로 주인 없는 황소가 일을 하다가 죽어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와 여기에 봉안했단다.
그렇다면 신라고승 의상대사가 무암사를 창건할 때 힘든 일을 거들고 죽은 황소를 화장하니 사리가 나와 그 불심에 감동하여 사리탑을 세웠다던 시청 자료와의 시대적 차이를 어떻게 좁힌단 말이냐.
긴 세월 비바람에 닳고 닳아 비문의 흔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탑 몸을 만져보고 들여다봐도 확인할 길이 없다.
이 부도 뒷산에 소뿔바위가 있다기에 경사 50도는 됨직한 산비탈을 기어올랐다.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지는 이 공간에 소 머리빡에 난 두 뿔 같은 바위가 하늘로 솟아있다. 예님은 어떻게 이 바위를 알고 이 아래 소 부도를 세웠을까.
여기서 200미터쯤 떨어진 무암사, 출입문 옆에 암굴이 있어 ‘석굴 안 불당’이라 하던데 그 속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맛이 그리도 감미롭다. 먼 산길에 목이 말라서일까 한 사발을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절 뜰에서 바라다 보이는 맞은편 산릉에 암군이 특이하여 한 처사에게 물었더니 안개가 끼면 잘 보이고 안개가 걷히면 잘 안 보이는 무암(霧巖)이라고 일러주며, 저 쪽에 있는 게 양근바위인데 멀지않으니 한번 가보라고 자랑하듯 권유한다. 나는 오늘 말 못하는 짐승인 소의 사리탑을 보았는데 더 볼 게 뭐 있겠냐고 했더니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일생 소 한 마리쯤 위장 속에 장사지낸 난들 죽어 화장하면 사리 한 두과 안 나올까나···.
이산 곳곳에 자리 잡은 낙타바위, 장군바위, 배바위 등등은 모두 기암괴석들로 딴 곳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볼거리들이다. 그러나 그저 생김새에 따라 이름을 지어 붙였을 뿐 아무런 전설도 사연도 역사도 의미도 없는 것들, 이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건 내 성미인지도 모른다.
등반종점인 성내리(城內里), 두말할 나위 없이 성안이란 뜻이다. 돌과 흙을 버물어 쌓은 1,100미터에 달하는 이 까치산성에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 등이 발견 되어 그 역사를 가늠케 하고 있다.
주차장 길가에 “마을 자랑 비”란 초라한 돌비석 하나가 서있다.
길 건너 낮은 개울가 큰 느티나무 곁에 어쩌면 날려는 봉의 모습인 집채만 한 큰 바위가 있어 봉비암(鳳飛巖)이라 했다는데, 여기에 한 노파가 움막을 치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자 밤마다 바위가 울어 그 뒤로 주민들은 봉명암(鳳鳴巖)이라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매년 정월이면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나는 그 바위를 살피러 내려갔다가 발밑에 뒹구는 돌 하나, 갸름하게 둥근 꼭 오리 알만한 흰 돌, 그걸 주워 보물인양 조심스럽게 주머니 속에 넣었다.
마치 봉의 알이라도 되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