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있음에
내가 그곳에 다다랐을 때, 그는 나와 있지 않았다. 방금 전 휴대폰으로 통화한 바로는 이 근처에 와 있
는 것만은 분명했다. 해는 지고 있었고 역은 왠지 조용했다. 역사의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서울에서는 아
직 이른 연산홍이 붉게 피어 있었다. 오늘의 여행은 목적이 없다. 친구를 만나 술을 한 잔 나누면 그만이
다. 목적이 없는 여행은 얼마나 여유롭고 자유로운가. 무엇인가를 이루려하는 출장이나 연수와는 전혀
다르다. 내가 먼저 역에 도착하니 내가 그를 마중 나온 듯 하다. 거꾸로 나는 내가 타고 온 열차에서 내리
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그들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듯 관심 없이 지나간
다. 조금 후 그가 왔다. 똑같은 모습.
해를 뒤로 하고 바닷가를 향해 차를 달린다. 부두에는 인적이 없다. 대형트럭들이 굉음을 울리며 우리
가 탄 차량의 앞뒤로 지나간다. 거리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잘 있었나?”
“그렇지. 뭐.”
이 친구는 초등학교 때의 친구이다. 이제는 서로의 얼굴만 보아도 서로 내색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이
가 됐다. 말들이 없다. 아마 그간의 생활을 더듬어 보는 중이리라. 점점 길어지는 차의 그림자들이 아직
싹이 돋지 않은 나뭇가지들의 그림자들과 교차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해가 완전히 지자, 깊이 파인 수영만
의 검은 물결 위에 오색의 가로등불이 어른거렸다. 그는 나의 숙소를 조용한 곳에 이미 정해 놓았다고 말
했다. 그건 나에게 또 하나의 신경 쓰일 곳이 없어진 걸 의미했고 당연히 받아 들여야 했다.
“저녁은 뭘로 할래?”
“………”
“회로 할까?”
사실 그날 나는 굉장히 피곤했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끙끙 앓았을 정도였으니까. 특별한 볼 일이 있어
간 곳이 아니었기에 나의 사정을 얘기하고 여행을 미루어도 무방했다. 그러나 나의 피곤함이 그로 인한
것이 아니기에 나는 약속을 미룰 수 없었다. 회는 당연히 좋은 안주였다. 그러나 회를 안주로 하기에는
나의 컨디션이 무리였다.
“해운대 복국으로 하지.”
우리는 밤늦도록 술을 마셨고, 다음 날에도 술을 마셨다. 그는 대식가였고 주량도 대단했다. 차츰 우리
는 말을 많이 하게 되었고, 화제도 다양해 졌다. 그러다 그가 자기의 아내에 대해 얘기했다. 그의 아내는
미인이다. 예쁘다기보다는 청순한 쪽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허락도 없이 어제 쌍꺼풀 수술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일이 불만이었다.
‘아름다워지기까지 했군 그래.’
다음날은 장소를 옮겨서 술을 더 나누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식당엔 손님이 없다. 주인도 낮잠
을 자는지 보이지 않는다. 텅 빈 마루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간간이 차들이 식
당 주위를 흔들고 지나간다. 대도시라지만 이곳은 낯선 고장 같다. 낯선 고장에 처음 발을 내 디딜 때 맡
는 공기, 바람결, 생경한 마을의 집들과 담장, 시험지를 받아들 때와 같은 기대감 섞인 두려움과 안식이
이곳에선 느껴진다. 첫 여행지에서 느꼈던 새로운 감정의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새로
운 감정으로 오래된 친구와 나누는 술잔은 나의 가슴에 또 하나의 세계를 열기에 충분하였다. 일생의 대
부분을 여행에서 보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생은 무궁한 창조와 신비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어떤 생
각에 사로잡혀 자신만을 돌보기에 바쁘다든지, 자신이 구축한 세계만 고집하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보게
된다. 비록 누추하고 초라한 집에 거쳐할 지라도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들을 보라. 열려 있는 사막,
‘리좀’을 말한 들뢰즈는 여행자일 것이다. 그의 바지가랑이가 흙먼지에 날리고 모자챙이 햇빛에 바래졌
을지라도 그의 머리는 언제나 솟아나는 샘처럼 싱그러우리라. 다시 저녁, 몸의 기운이 소진되면서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그만 헤어지지.”
밖으로 나오니 도로에는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하얀 해변이 적막하고 아름다웠다. 몸의
기운은 말라버렸으나 대신 가슴은 기쁨으로 넘쳐났다. 해변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옷자락을 건드린다.
나의 가슴은 너무나 풍요롭고 행복하여 죄의식마저 느껴졌다. 나만이 이 세상을 향유하고 있는 듯한 느
낌마저 들었다. 육체적 괴로움이 동반된 정신의 쾌감. 감미로운 불안에 흔들리는 이성. 나는 이 여행 이
후 며칠을 앓았다. 몸을 무리하게 쓴 탓이었다. 밤에는 열이 오르고 물조차도 맛을 잃었다. 그러나 그곳
에는 나를 들뜨게 하는 나의 사랑하는 벗이 있고 설레임을 주는 공기가 있지 않은가. 언젠가 이 사랑하
는 친구들이 다 떠나고 홀로 남을 지라도, 그 때의 고독이 아무리 쓸지라도 나에겐 이 순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벗들이 있으므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2005.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