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白壽 음악회(11월10일) 여는 '한국 가곡의 아버지' 김성태
白壽 음악회 여는 '한국 가곡의 아버지' 김성태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꽃이 지네'(산유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자주 등장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가곡(歌曲)이다. 이 노래들을 작곡한 '한국 가곡(歌曲)의 아버지' 김성태(金聖泰·99)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작곡가 김성태는 오는 11월9일 백수(白壽)를 맞는다. 백수란 백(百)에서 일(一)을 빼면 99가 된다는 뜻이다. 그의 생일 다음날인 11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후배들이 베푸는 기념음악회가 열린다.
김성태는 자신의 아호를 따 지은 서울 강남구 역삼2동 요석(樂石)빌딩 3층에 살고 있다. 그를 만나기 전, 당연히 백수 기념음악회가 화제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나, 친일파 아니야! 오히려 애국했어요!"
왜 100세를 눈앞에 둔 노(老)작곡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 노무현(盧武鉉) 정권 당시 만들어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그를 '친일 음악가'로 지정했다. 1942년 5월 결성된 경성후생실내악단 멤버였다는 이유다.
김성태의 가족들에 따르면 친일 음악가 선정은 한 저술가가 지은 책을 여과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급진 역사단체는 그를 친일 음악가로 선정한 이유로 경성후생실내악단 참가를 든다. 즉 이 악단이 '조선 작곡가들을 일제의 전쟁 찬양에 동원하기 위해 만든 단체'라는 것이다. 이 악단은 연주회 때마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매번 연주했고 레퍼토리에 '대일본의 노래' '대동아의 노래'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친일 음악가의 범주에는 현제명(玄濟明)과 홍난파도 포함돼있다.
친일 음악가로 지정된 이후 김성태와 그의 가족들은 노무현 정권 내내 극심한 모욕감에 시달려왔지만 뾰족한 대응방법이 없어 고심해왔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후 해당 단체에서 '이의가 있는 사람은 사유서를 내라'는 통지를 해왔다. 김성태와 그의 가족들은 이의 신청서를 내기 위해 광범위한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그 결과 올해 6월 15일 '친일 음악가 지정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받게 됐다.
김성태가 친일 음악가라는 오명(汚名)을 벗게 된 결정적 계기는 경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해 벌인 반일 시위 자료가 발견된 일이었다. 당시 그는 13일 동안 서대문구치소에 감금됐다.
구치소에서 풀려난 후 김성태는 퇴학당했다. 그는 일본 교토의 양양중학에 편입한 뒤 지금의 연세대의 전신(前身)인 연희전문대(延專) 상과에 입학했다. 경신고 명예졸업장을 받은 것은 퇴학당한 지 39년이 지난 1969년이었다. 경신고에는 이런 사실이 기록된 낡은 학적부가 아직도 보관돼있다. 김성태의 가족들은 수소문 끝에 이 자료를 확보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 제출해 불명예를 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성태는 현재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있지만 기억이 또렷하며 말도 잘하는 편이었다. 경신학교 시절 국가대표를 지낼 정도로 체력이 탄탄해 지금도 헬스용 사이클을 하루 20분가량 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친일 음악가 지정 문제를 묻자 정색을 한 채 큰 소리로 "나 친일파 아니야"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를 모시고 있는 아들 김기철 사장도 "백수 기념음악회보다 더 기분 좋은 소식이 바로 친일파 지정 취소결정"이라며 "이런 누명을 얼마나 많은 이가 썼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1934년부터 성악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김성태의 가곡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김소월의 시 '산유화'로 만든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제일 좋아하는 시인으로 정지용을 꼽았다. 그의 시로 만든 가곡이 '말' '산너머 저쪽' 등이다. 김호의 시 '한송이 흰 백합화'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김성태는 90세를 넘긴 후에도 틈틈이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의뢰를 받으면 작곡을 해주는 것인데 전성기 때보다 동요를 훨씬 많이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는 "올해에도 두 곡의 동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음악평론가 김형주는 그를 "서구의 합리적인 작곡기법을 도입해 우리 가곡 이론의 기초를 만들고 우리 어법의 개발과 그 정착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 평했다. 음악평론가 이상만도 그를 '한국 음악의 브람스'라 부르며 "가곡뿐 아니라 대중사회의 전개를 예견해 방송음악, 영화음악에도 큰 기여를 한 선각자"라고 평했다.
이랬던 노 작곡가가 100세를 눈앞에 두고 누명을 썼다 가까스로 벗은 사연을 세상은 모르고 있었다.
[자료/2009.08.01/조선일보/문갑식 기자/gsmoon@chosun.com" rel="nofollow">gsmoon@chosun.com]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꽃이 지네'(산유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자주 등장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가곡(歌曲)이다. 이 노래들을 작곡한 '한국 가곡(歌曲)의 아버지' 김성태(金聖泰·99)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작곡가 김성태는 오는 11월9일 백수(白壽)를 맞는다. 백수란 백(百)에서 일(一)을 빼면 99가 된다는 뜻이다. 그의 생일 다음날인 11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후배들이 베푸는 기념음악회가 열린다.
김성태는 자신의 아호를 따 지은 서울 강남구 역삼2동 요석(樂石)빌딩 3층에 살고 있다. 그를 만나기 전, 당연히 백수 기념음악회가 화제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나, 친일파 아니야! 오히려 애국했어요!"
왜 100세를 눈앞에 둔 노(老)작곡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 노무현(盧武鉉) 정권 당시 만들어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그를 '친일 음악가'로 지정했다. 1942년 5월 결성된 경성후생실내악단 멤버였다는 이유다.
김성태의 가족들에 따르면 친일 음악가 선정은 한 저술가가 지은 책을 여과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급진 역사단체는 그를 친일 음악가로 선정한 이유로 경성후생실내악단 참가를 든다. 즉 이 악단이 '조선 작곡가들을 일제의 전쟁 찬양에 동원하기 위해 만든 단체'라는 것이다. 이 악단은 연주회 때마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매번 연주했고 레퍼토리에 '대일본의 노래' '대동아의 노래'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친일 음악가의 범주에는 현제명(玄濟明)과 홍난파도 포함돼있다.
친일 음악가로 지정된 이후 김성태와 그의 가족들은 노무현 정권 내내 극심한 모욕감에 시달려왔지만 뾰족한 대응방법이 없어 고심해왔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후 해당 단체에서 '이의가 있는 사람은 사유서를 내라'는 통지를 해왔다. 김성태와 그의 가족들은 이의 신청서를 내기 위해 광범위한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그 결과 올해 6월 15일 '친일 음악가 지정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받게 됐다.
김성태가 친일 음악가라는 오명(汚名)을 벗게 된 결정적 계기는 경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해 벌인 반일 시위 자료가 발견된 일이었다. 당시 그는 13일 동안 서대문구치소에 감금됐다.
구치소에서 풀려난 후 김성태는 퇴학당했다. 그는 일본 교토의 양양중학에 편입한 뒤 지금의 연세대의 전신(前身)인 연희전문대(延專) 상과에 입학했다. 경신고 명예졸업장을 받은 것은 퇴학당한 지 39년이 지난 1969년이었다. 경신고에는 이런 사실이 기록된 낡은 학적부가 아직도 보관돼있다. 김성태의 가족들은 수소문 끝에 이 자료를 확보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 제출해 불명예를 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성태는 현재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있지만 기억이 또렷하며 말도 잘하는 편이었다. 경신학교 시절 국가대표를 지낼 정도로 체력이 탄탄해 지금도 헬스용 사이클을 하루 20분가량 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친일 음악가 지정 문제를 묻자 정색을 한 채 큰 소리로 "나 친일파 아니야"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를 모시고 있는 아들 김기철 사장도 "백수 기념음악회보다 더 기분 좋은 소식이 바로 친일파 지정 취소결정"이라며 "이런 누명을 얼마나 많은 이가 썼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1934년부터 성악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김성태의 가곡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김소월의 시 '산유화'로 만든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제일 좋아하는 시인으로 정지용을 꼽았다. 그의 시로 만든 가곡이 '말' '산너머 저쪽' 등이다. 김호의 시 '한송이 흰 백합화'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김성태는 90세를 넘긴 후에도 틈틈이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의뢰를 받으면 작곡을 해주는 것인데 전성기 때보다 동요를 훨씬 많이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는 "올해에도 두 곡의 동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음악평론가 김형주는 그를 "서구의 합리적인 작곡기법을 도입해 우리 가곡 이론의 기초를 만들고 우리 어법의 개발과 그 정착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 평했다. 음악평론가 이상만도 그를 '한국 음악의 브람스'라 부르며 "가곡뿐 아니라 대중사회의 전개를 예견해 방송음악, 영화음악에도 큰 기여를 한 선각자"라고 평했다.
이랬던 노 작곡가가 100세를 눈앞에 두고 누명을 썼다 가까스로 벗은 사연을 세상은 모르고 있었다.
[자료/2009.08.01/조선일보/문갑식 기자/gsmoon@chosun.com" rel="nofollow">gsmo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