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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解氷)

비솔 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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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解氷)


봄을 시샘하던 추위가 풀렸다. 불암산 기슭 응달진 골(谷)에 쌓였던 눈도 녹았고, 수락산 얼었던 계곡 물도 풀렸다. 이제 봄이 오려나본데, 언 우리 사람들 마음은 아직 풀릴 기미가 없다.

작은형은 이번 설에도 소식이 없었다. 이미 집안 대소사에 빠지기 시작한 지 7년째다. 목 빼고 기다리시는 어머니께 세배라도 하러 올 법한데 얼어붙은 마음은 올해도 안 풀렸는지 사는 형편이 안 풀려서인지 이번 설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형이 형제들과 발을 끊고 산 것은 IMF 때문이다. '97년쯤인가, 형은 다니던 직장에서 소위 그 '명퇴'라는 걸 당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보증을 선 친구가 망하고 도망가 큰 빛을 지게 되고 퇴직금도 차압당했다. 살던 W시의 아파트에서 변두리 지하 방으로 거처를 옮겼고, 대학 다니던 조카도 군에 입대하거나 휴학 후 돈이 되는 일을 찾아다녔다. 형제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형편들이 좋지 않았으므로 원하는 만큼 도와 줄 수가 없었다.
그 후로 형은 우리들로부터 멀어져 갔고, 내 마음 한 구석은 항상 구멍이 뚫려 있었다. 특히 명절날에는 그 뚫린 구멍으로 바람이 마구 들락거린다.

어릴 때 형과 더불어 살던 고향엔 개울이 있었다. 개울을 따라 오리쯤 가노라면 강이 있었고, 우리는 이 개울과 강을 따라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겨울엔 얼음 위에서 썰매 타는 재미가 있긴 했으나 우린 모든 것이 꽁꽁 언 계절이 춥고 싫어 빨리 봄이 오길 기다렸다.
어느 봄이었던가. 형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고향에서 한 70리 떨어진 소도시로 취직을 하여 집을 떠났다. 이것저것 파는 잡화상의 점원이 되었다. 거기서 장사하는 법이나 배우라는 부모님의 의도였다. 그러나 형은 열흘도 못되어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객지에서 리어카를 끌고 짐을 배달하는 일이 힘들기도 하였지만, 정작 형이 집에 돌아 온 이유는 어린 나이에 생전 처음 해보는 타향살이로 부모형제들이 너무 그리웠던 때문이었다. 돌아오던 날 큰형은 '너도 나처럼 촌구석에서 농사나 지려느냐'고 볼멘 역정을 내었고, 작은형은 그냥 울고만 있었다. 나도 옆에서 괜스레 콧등이 찡해져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두 해 농사일을 거들던 형은 다시 서울로 가 여러 취직자리를 전전하다가 말단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체신부 공무원이 되어 우체국에 근무를 하다가 전기통신공사 직원이 되었고, 나중엔 소도시의 전신전화국장까지 했다. 부모님과 고향 마을사람들은 형을 자수성가한 인물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던 형이 그 IMF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 후 형은 항상 어머니 가슴속에 한 줌 체증이 되어 얹혀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고향에서 텃밭을 가꾸시다가 겨울 되어 서울의 자식들 집에서 보내시는 어머니는 어디서나 둘째 아들 때문에 가슴아파하신다. 만나는 사람마다 형 이야기를 하며 한숨짓는다. 여느 자식들로부터 받은 용돈을 한 푼도 쓰는 적이 없이 모아 두었다가, 둘째 아들이 어쩌다 고향집에 들르는 날 그 손에 쥐어주신다.
그런 어머니 모습을 보며, 그리고 명절날 빠진 그 형의 자리를 보며 나는 형이 어릴 때 고향을 떠났다가 홀연히 돌아왔던 것처럼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객지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금의환향(錦衣還鄕)했던 것처럼, 한동안 좀 어렵게 살다가 모든 걸 극복하고 우리 곁에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생각해 보면 얼어붙은 것은 다만 우리 형제들 마음 뿐은 아닌 양 싶다. 모임에서 귀에 거슬리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해 간 후 소식 없는 고향친구, 같은 길을 가다가 승진한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로 나뉘어 서로 등을 돌리는 동기생들의 마음도 얼어붙은 마음일 게다. 그 뿐이랴. 당과 당, 보수와 진보의 살얼음판 갈등, 동과 서 자기지역 쪽으로만 꽁꽁 얼어붙은 지역감정, 남과 북의 변함없는 대치국면도 한시바삐 풀려야 할 얼음판이 아니던가.

봄이 오면 얼었던 산하(山河)가 해빙되는데, 우리 형제들 사이의 언 강은 언제나 풀리려나. 친구간, 이웃간, 지역간 그리고 이 강산 남과 북의 얼어붙은 마음은 언제나 풀리려나.
봄이 오면 산야에 꽃이 피듯, 우리 형제들 마음에도 화사한 꽃이 피겠지. '강이 풀리면 배가 오고, 배가 오면 님도 오듯' 이 갈등과 엉킨 감정과 국면이 풀리면 이 땅에도 봄날 같은 평화가 찾아오겠지. 오늘도 봄기운 가득한 산야를 바라보며 우리들 언 마음 풀릴 날을 기다려 본다.

'04. 3.
2 Comments
시와사랑 2004.03.26 13:17  
  가슴저리는 우리네 삶이군요.
비솔님!
우리 가슴을 펴고 심호흡 자주합시다.
한 민족 한핏줄 언 가슴들 다 녹을
또다른 봄날은 꼭 올것입니다.
김건일 2004.04.21 14:34  
  비솔님의 글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솔직성이 있습니다.
참 좋은 글을 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속히 등단 하시는게 좋겠습니다. 혹시 등단 했는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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