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연주.감상후기, 등업요청, 질문, 제안, 유머, 창작 노랫말, 공연초대와 일상적 이야기 등 주제와 형식,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회원문단은 자유게시판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동해가 손수 써 내려간 '러브 스토리'

김형준 0 1107
동해가 불러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경포대가 있는 강릉을 가려다 속초로 향했다.
고작 한, 두 번 밖에 가보지 않은 그곳이 마지막 순간에 나를 막 불러댔다.
바다가 과연 가까이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친구와 고속터미널 근처에서
점심 먹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났다. 오른 손엔 책가방, 왼손엔 작은 물병과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담은 책 하나. 터미널에서 영자 신문을 2부 사들었다.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할 생각으로. 결국은 기사 몇 개 읽고 끝나버렸지만 후회는 없다.

속초 해수욕장은 고속터미널서 5분 거리... 그것이 내 맘을 사로 잡았다.
강릉에 갔으면 버스 타고 꽤 가야 바다가 반겨주는데... 속초 바다는 날 바로 껴안았다.
아직은 바다물이 쌀쌀한데도 몇 남자가 멋진 몸매 자랑하느라 물 속에서 놀고 있었다.
역시 남녀의 물장난은 보기에도 재미가 있다. 여성을 빠뜨리겠다고 협박하는 남성,
그런 남성에게 애교 섞인 비명을 지르는 여성, 옆에서 부추기는 친구들... 정겨운 풍경이다.

웅장한 파도 소리 바로 옆을 걸었다. 명상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홀로 찾은 바다...
그 바다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를 바다와 나누자 밤이 날 재웠다.
설친 잠의 꼬리를 붙잡고 일어나 다시 바다로 향했다. 새벽 4시 50분... 왜 배가 고플까.
이것 저것 찬 것을 허겁지겁 24시간 편의점에서 사 들었다. 일출을 봐야 하는데 혹시
못 볼까 하는 불안감이 들어서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5시가 다 되어서 바다 앞에 섰다. 저 멀리 수평선 한 가운데에 뭔가 빛나는 작은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들어오는 배일까 하고 궁금해 하자니...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것이
조금이 위로 솟구쳐 오른다. 순식간의 일이다. 점점 더 둥글어 지더니 바다라는 자궁에서
쑥 빠져 나오더니 어느새 독립을 선언해 버린다. 바다와 해가 만들어 내는 빅쇼는 그렇게
10분 내에 다 끝나고 말았다. 싱겁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해의 하루살이의 시작을
목격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일본 후지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8월 초였다.
밤 7시 40분에 오르기 시작해서 새벽 4시 30분이 좀 지나서 정상에 올랐다. 뿌연 안개로
인해 해가 지평선과 키스하던 것을 멈추고 홀로 서는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때에
비하면 그래도 꽤 만족스런 동쪽 바다에서 동쪽 해가 올라 오는 것을 본 것이다.

몇 명의 젊은이들이 일출을 보며 사진을 찍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걷자 그들의
소리는 어느새 다 파도 소리에 묻혀 버렸다. 일출을 봤으니 더 있어봤자 무얼 하겠는가.
다들 자신들이 새로운 목적지로 발을 옮겨 버린 것이다. 해수욕장 남쪽 끝에 두, 세 사람이
바다 쪽을 향해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바다와 대화를 나누기에 바빴던 나는 그들도
그저 일출을 보기 위해 나와 있는 관광객들이라 여겼다. 헌데 바로 옆에 다가가니 그들은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손에 긴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꼭 낚시대 같았다. 그렇지만 줄이 달려 있지 않는 것이었다. 그 험한 파도 속에 낚시줄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세히 보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해서
가만히 서서 쳐다보니 무언가 해초를 주우려는 것이었다. 바다가 파도와 함께 보내주는
해초를 기다리는 이 사람들....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뭘 하세요?' '다시마를 주워요'... 귀가 잘 안 들리나 보다. 하긴
파도소리가 그렇게 크니 어찌 내 말이 잘 들릴 수 있겠는가. 덩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얼굴은 주름이 많이 잡혀 있었고, 피부는 햇빛에 타서 황동색이었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자 '뭐라구요?'하면서 내게로 다가선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고요?'하고
되풀이 하자.. '팔십 삼세에요!'한다. 별로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가끔 듣던 그 사투리... 속초 사투리... 속초 출신인 황금찬시인이 갑자기 생각났다.
혹시 황금찬이라는 시인아세요?' 하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들어 본 소리에요'한다.
'이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소리'라고 했다.

더 이상 방해를 하기가 싫어서 몇 발짝 물러 선 채로 그가 다시마를 건지는 모습을
관찰했다. 신발은 신고 있지 않았고, 고무로 된 듯한 양말을 신고 있었다. 잠수부나 해녀가
착용하는 것과 유사한 재료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갔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잘못했다가 파도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헤엄쳐 나오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누가 구조를
하기도 쉽지 않은 그런 바다 옆에서 그 노인은 굉장히 차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바다와 다정하게 놀고 있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다시마를 줍고 있는데도 서두르지도, 긴장하지도, 애타하지도 않았다. 시력이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다. 파도가 가져다 주는 다시마를 적절한
타이밍에 건져 내기 위해 가만히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마가 자주
떠밀려 오는 것도 아닌데 그는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한참을 그렇게 줍더니 모두 모아서 한 쪽 구석을 향했다. 남쪽 끝에 있는 바위들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험한 파도도 바위들 앞에서는 유순한 모습을 보였다. 바위들에
부딪히면 곧 얌전하고 수줍은 얼굴을 바다가 보여주었다. 가오리 모양으로 다시마를
만들어 한 손으로 끌고 가는 이 사나이는 서두르지 않았다. 대충 씻더니 이것들을
어느 바위 위에 올려 놓았다. 물때가 시커멓게 먹은 이 바위는 다시마의 색깔과 거의
유사하였다. 한 손만을 쓰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왼 손 소매 아랫부분이 텅 비어 보였다.
'어, 이쪽 손이 안 보이네요?'하고 어찌 보면 참 무례한 질문을 던졌더니 '없어요.' 한다.
'사고가 나셨어요' 하고 되물었더니 '네, 잘려 나갔어요' 한다. 귀찮다는 표정도, 기분
나쁘다는 눈치도 없다. 그저 담담한 심정이다. '롤라에 옷이 걸려들어가서 잘렸어요'
한다. 난 잘린 그 손의 팔꿈치 윗 부분을 만져 보았다. 반만 남아 있는 왼손... 내 마음이
갑자기 허전해졌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갑자기 위대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이 모아 놓은 다시마를 훔쳐 가지 않으리라고 확신을 한 모양이다. 바위들
옆에 '군사보호구역'이므로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금지
구역으로 훌쩍 들어가 버린다. 나도 따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디서 갑자기 군인들이
총부리를 들이밀 것 같기도 하고,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그냥 해변의
한 쪽 끝에 조용히 서 있었다. 왜 나는 그때 갑자기 헤밍웨이가 지은 '노인과 바다'를
생각했을까. 내가 만난 그 83세 된 노인과 이 동해 바다가 헤밍웨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차소리가 나더니 도회지 사람인듯한 남녀가 내려서 해변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마
부부가 아닌가 싶었다. 이 사람들도 역시 다시마를 주우려고 그 코너에 온 것이다.
파도가 갑자기 세게 밀려오면 깜짝 놀라서 넘어질 뻔 하곤 했다. 이들도 최소한
60대는 되어 보였다. 몇 개를 건져 들더니 여자가 슬금 슬금 바위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 왔다. '아니, 저 여성 뭐 하려는 걸까? 그냥 자기 자리에서 더 줍지.' 아무래도
노인이 바위에 올려 놓은 다시마를 본 모양이었다. 그 근처까지 가서는 탐욕스런
눈길을 보냈다. 마치 금방 그것들을 가져 갈 자세라도 취하듯이.... 난 결심했다.
그 다시마를 지켜 주기로... 노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감시해
주기로 작정했다. 절 대문에 서있는 무시 무시한 장군들 처럼 말이다. 그 여성은
나를 향해 힐긋 눈길을 한 번 주더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 갔다. 아마도 내가
그것을 지키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나 보다. 남자가 있는 쪽으로 가더니
'저기 다시마가 많은데...'한다. 가지고는 싶겠지만 다른 이의 눈이 무섭고, 양심의
칼이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어찌 도둑질을 하랴... 그것도 83세 된 한 팔 밖에 없는
노인의 것을... 물론 그 여성은 그 사실을 알 까닭이 없었지만... 내 맘 속에선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왜 남의 것을 탐내나... 그것도 자가용을 끌고 와서는... 옷도 꽤 비싼 것들을 입었다.
다시마들을 주워서 집에 돌아가서 자랑할 것인가. 아들, 며느리, 딸, 친구들에게...
그리고 조금씩 나눠 먹을 것인가. 여하간 나이를 지긋이 먹은 남녀가 함께 다시마를
줍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였다. 한 팔을 가지고 다시마를 줍는 노인의 능수능란하지만
고독이 절여있는 모습에 비하면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또 다른 두, 세 사람이
다시마를 줍는 일에 동참했다. 나의 역할은 노인의 다시마를 지키는 것이었다.
10여분 지나자 저 멀리 바위들 틈에서 노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가오리
모양을 한 다시마 꾸러미를 한 손으로 들고 말이다. 일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그 군사 보호구역에도 다시마들이 어김없이 밀려들어 오는가 보다.  이 노인은
속초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젊었을 때 아무리 기계공 노릇을 했다고 해도 바다와 늘
가까이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바다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가 해야 할 무언가 소중한 일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노인이야 왜 내가
그곳에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난 그저 장승과
같은 존재, 절 수호신과 같은 인물이었으니 말로 표현할 수도, 그리 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잠시 짧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도시에서 수 없이 많은 헛 소리를 나누던 사람들
에 비해서 이 노인과 훨씬 더 감정적으로 친하게 느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이 지나기 전에 그 해변을 다시 찾고 싶다. 그 다시마 아저씨는 틀림없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이다. 다시 만나게 되면 그 아저씨의 일이 다 끝나는 것을
기다려 다시마 운반하는 것을 돕고 싶다. 아침 식사를 대접하면서 그분의 평생 삶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물론 그것은 그분이 동의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의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것과는 다르지만 깊은 레벨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노인을 쉽게 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짧은 시간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은 치매가 걸려 모든 기억이 내 뇌리에서 다 사라져도
어딘가 이 우주 속에서 여전히 맑고 아름다운 소리로 메아리치게 될 것이다.
0 Comments
제목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