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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김경선 4 901
마산가곡부르기행사를 준비하면서
질문 올립니다.

1)  청산은 작시자 나웅스님이 나웅선사이신지?
    인터넷에 고려 공민왕 때 분이라고 하는데 그 분인지요?
    원래 한시를 누가 역시 하셨는지?

2)  사우월의 작시자 향파는 한국사람(인터넷에 나오는) 그 분인지?

아시는 분 가르쳐 주세요.
4 Comments
요들 2005.09.24 07:14  
  원장님~~  ^)^*
응급이라는 글자만 봐도 저는 심장이 뛰는것 같은 위급함을 느끼는데
지금 상황은...  아님 벌써 사망?했나요? 
저의  너무 느긋한  대응때문에......???
1. <청산은> 작시자는 저도 나옹선사님이시고 이미 이세상분이 아니시란것밖에는..  해서 한지영 선생님의 전화번호 드리겠습니다.
한번 여쭤 보심  궁금증이 풀릴것이란 생각입니다.
전화번호는 쪽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사실 공개해도 되는지를 ..)

2.  <사우월>의 향파(香波)는 구두회(具斗會)님의 아호(雅號)라고
합니다.  <香波>라는 뜻은 "사시장철 향기로운 향내와 훈풍이 가득차
퍼져있는 향기롭고도 행복한 평화의 동산" 이랍니다.
가곡사랑의 (포럼,우리시 우리음악)란에 보시면 사우월에 대한 자세한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마침 제가 봤던 기억이... 
ㅎㅎ 도움이 되셨나요?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렸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김경선 2005.09.24 10:47  
  역시 요들님의 자상하심과
저의 든든한 후원자이심이 느껴지기에
피곤했던 저에게 다시 새 힘이 납니다.

어제 오후는 유난히 여러가지 일이 겹쳐서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애쓴 탓에
오늘 아침 늦잠을 자는 바람에
병원으로 바로 달려 왔습니다.

어제 사방으로 전화해 보니
저의 기본이 약한 탓에
(청산은)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가 안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구전가요?
나웅스님이 지으신 한시를 (김안서)께서 역시?

요들님, 어제 내마노 진주회원께서
오셨는데 이야기 도중에 그 분이
김명표교수님을 잘 아시고 사모님성함이
저와 동일하다는 거도 아시고
(뒤벼리 사랑)도 좋아하셔서
요들님 이야기를 드렸더니
김명표교수님께서 허락하시면
다음 달에 마산으로 모시도록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큰 소득이었어요, 항상 감사!
요들 2005.09.24 11:35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 나옹 화상(懶翁和尙) : 1320~1376
별도의 제목이 없는 이노래는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고승 나옹 혜근(懶翁 惠勤)스님의 불교가사이다.

원장님  네이버에서 청산은을 찾으면 2가지의 청산은이 나오는데요,
그중  산너머 땡초네에서의 노래도 좋으네요...ㅎㅎ
함 들어보세요.  그리고 윗글은  청산은의 2군데서 무작정 퍼서 제가 조금 조합했습니다.  ^)^*
그리고 <뒤벼리 사랑>참 좋지요?  저도 좋아서 요즘 매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가도....

정은엔지 2005.09.24 22:59  
  봄에 여주에 신륵사에 갔을때 나옹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문화해설사를 통해서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신륵사 홈페이지에 가면 나옹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늘 수고가 많으신 원장님!

나옹 혜근 懶翁 慧勤(1320-1376)
 
나옹 혜근은 서천 지공指空스님과 절강 평산平山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아 승풍僧風을 크게 떨쳤던 고려말의 고승이다. 스님은 중국으로부터 보우普愚와 함께 새로운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한국불교의 초석을 세운 장본인으로 유학하는 20여년 동안 강남지방의 간화선看話禪을 깊이 공부하고 귀국하여 간화선을 널리 선양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스님의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법호는 나옹懶翁이며 당호堂號는 강월헌江月軒, 시호는 선각禪覺이라고 하며, 1320년 1월 15일 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일면에서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한 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밤낮으로 정진하여 1344년(충혜왕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岩寺에서 크게 깨달았다.
1347년 (충목왕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화상指空和尙을 친견하고 정진하여 그의 법을 전수받은 후 1358년(공민왕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 이후 신광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홍건족의 침입을 법력으로 막아 신광사를 수호하기도 하였다.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에서 수도 정진한 후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사찰 중창에 전력하였으며 1371년 공민왕으로부터 금란가사의 내외법복, 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왕사王師로 추대되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낙성식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지고 유학자들이 탄핵함에 따라 밀양 영원사瑩遠寺로 옮기던 중 1376년 5월 15일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니 나이 57세 법랍 38세였다.
제자로는 자초自超, 지천智泉 등 2,000여명이 있으며,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과 <가송歌頌>으로 스님의 사상이 전해지고 있다. 신륵사와 관련된 나옹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보제사리석종기>와 김수온의 <보은사기報恩寺記>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륵사는 나옹이 도를 펼쳤던 곳으로 목은이색과 함께 이곳에 머물며 교유하므로 인해 신륵사가 경기도의 유명사찰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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