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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 파도가

이종균 2 1223
내 가슴에 파도가 (석병산)

 널리 애창되고 있는 우리 가곡 「내마음」의 노랫말을 읊은 김동명 선생의 출생지가 강릉인 까닭에 많은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며 강릉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린다.
 심지어 강릉에 그처럼 아름다운 호수가 없었던들 그 시는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로 선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원산 함흥 흥남 등에서  살았으며 일본에 유학한 후 1947년에야 월남하였으니 강릉과의 인연은 어린 시절 잠깐이었으며, 특이 이 시가 조선일보가 발행한 월간지 「조광」 1937년도 제3권과 1938년도에 발간된 그의 제2시집 「파초」에 실린 점으로 보아 강릉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도 석병산을 찾아가며 이 노래가 절로 떠오른 것은 선생이 젊은 시절 늘 동해바다 연안에 살면서 바라봤던 바다와 호수와 강을 어쩌면 산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이었는지도 모른다.
 백복 령(白茯嶺), 예로부터 정선으로 넘나들던 고개, 강장 이뇨 등 한약제로 긴히 쓰인다는 흰 복령(茯笭)이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 너머 2키로 지점에서 산 꾼들이 마라톤 선수처럼 우르르 산길로 몰려간다.
 이제부터 장장 18키로의 산악레이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756봉을 지나 생계 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컴퍼스의 방향이 맞지 않아 해를 바라보며 진로의 방향을 파악해야 했다. 아마도 지하암반에 들어있는 쇠 성분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되나 이 산에서 느낀 첫 번째 불가사의이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부드럽고 폭신한 흙산에도 가파름은 있나보다.
 몇 차례 급한 구배를 힘겹게 오른 생계 령에서 한숨을 돌리는데 동쪽으로 백두대간의 일부인 자병 산(紫屛山:872m)의 주봉이 예리하게 잘려나가 참수당한 천주교도의 처참한 모습을 보는 듯 가슴이 아려온다.
 시멘트의 생산이 산업발전에 이바지함을 모르는바 아니나 꼭 저렇게 해야 되는 것일까 당국도 개인도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불가사의이다.
 생계 령을 넘어서니 커다란 함몰지(陷沒地)가 나온다. 석회암 절리를 따라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며 바위를 녹여 둥글게 꺼진 땅은 돌리네(Doline)라하고, 석회암이 탄산가스와 빗물에 의해서 녹아 발달한 지형을 카르스트(Karst)라 한다는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크고 작은 카르스트가 여기저기  발견된다.
 장마철 장대비가 쏟아질 때 그 많은 빗물이 이곳에 모여 지하로 스며드는 모습이 또한 장관이라니 이것이 세 번째 불가사의이다.
 함몰 지를 지나 922봉으로 오르는 빗각이 한참 가팔라 70도는 되는 성 싶다.
 촘촘히 붙어있는 931봉, 900봉, 908미터의 남 봉을 오르고 넘으며 “이번 산행을 하시면서 신경질을 있는 대로 다 부리십시오.”라던 안내말의 뜻이 짐작된다.
 굼떠보여도 급한 경사, 가까워보여도 멀기만 한 거리, 낮아보여도 힘든 봉우리, 끝나는 것 같아도 계속 이어지는 짜증스런 산길이다.
 남 봉 오름 목 기뱅이 재에 동쪽으로 옥계동굴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있다.
 4억 8천만년의 연륜, 750미터의 길이에 여러 가지 돌 꽃이 자라나고 있어 석화동굴이라고도 불리는 이 속에 종유관, 종유석, 석순, 동굴산호 외에 많은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는데도 바쁜 발걸음에 가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어쨌든 이 동굴은 여기저기 도사린 깎아 세운 듯 한 절벽 일부가 항공사진에는 완만하게 찍힌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와 함께 이 산의 두 가지 신비로 꼽히고 있다.
 급하고 험한 산길을 밟는 해묵은 나그네, 빠르지는 못해도 쉬지 않은 조심스런 발걸음이 드디어 1055미터의 석병산 정수리에 이르렀다.
 정수리라고해야 지친 엉덩이 하나 붙이고 앉아 쉴만한 공간도 없는 쌍둥이 같은 뾰족한 암 봉 두 기, 그 사이에 천수를 다한 강대나무 한 그루가 천년세월을 지켜 서있고,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에도 풍화되지 않은 거칠고 뾰족한 석회암 틈바구니에 다듬어지지 않은 촌스런 정수리표지석이 발붙여 있다.
 앞 팀은 벌써 내려갔고 뒤 팀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 공간에서 나는 홀로 멀리 사위를 둘러본다.
 산 꾼들은 두루 문명과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산을 찾는다는데 나는 자연에의 몰입에 오히려 비중을 둔다. 
 남동쪽 20킬로 지점에 하늘을 가린 검은 그림자 청옥산 두타산이 두드러지고, 동쪽 15킬로 지점이 옥계해수욕장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이련만 이 청명한 날씨에도 뽀얀 이내에 가려 아른거린다.
 서쪽 내륙에 첩첩히 쌓인 천 미터 안팎의 산들이 오히려 바다처럼 보이고  흰 거품을 물고 철석거리는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의 가슴을
 조그마한 항만에 비길 수 있다면
 굽이굽이 들이닫는 물결은
 이국의 꿈을 싣고 오는 나의 나그네,
 (김동명 시 바다 중에서)

 나는 서쪽을 향해 서있고, 내 가슴은 벌써 작은 항만이 되어 파도가 넘실댄다.
 오전 11시 백봉 령을 출발하여 오후 5시 삽당 령에 기다리는 버스에 오르기까지 나는 낙엽처럼 이 산을 뒹굴었을 뿐이다.
 
2 Comments
꿀꾸리 2006.06.08 14:16  
  일전에, 한 남편이 '지리산 종주를 자신들은 이틀로 한다'하니 그 아내 왈'그게 등산이야? 군사훈련이지, 당신들 거의 뛰잖아!' '뛰기는 어디, 빨리 걷지'하던 대사가 생각납니다. ~나는 낙엽처럼 이산을 뒹굴었을 뿐이라~ A++짜리 시정으로 가슴이 벅차고 쓸쓸하고..  어슬픈 상상속의 낙엽들의 군사훈련, 실소,실소..
대리만족. 기쁩니다.
노을 2006.07.04 18:12  
  회원 문단은 가끔 들어옵니다. 그냥 보고만 나갑니다.
올리신 글들, 산행의 이모저모를 참으로 선명하게 써주시어
글이 주는 향기로움은 물론, 그 산들 감히 나도 가고싶어집니다.
그래서 잘 읽고 감동받았노라고 흔적 남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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