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3월 -<그녀>-
그 해 3월 -<그녀>-
- 모델은 경산에 사는 은정 씨 -
난 2000년 경북대학병원에서 본 <그녀>를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내가 본 은정 씨는 지성과 미모를 갖춘 다소곳한 인상의 초등학교 여선생님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에 의하면 대구에서 백 리 안 되는 거리를 소형차로 출퇴근한다는 것이었다.
결혼을 한 달 남짓 남겨 두고 감기가 잘 낫지 않아서 종합병원으로 왔다가 입원을 한 것이었다. <심장병> 시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감기를 치료한 후 시술을 할 계획이었는데, 그만 혈전이 왼쪽의 뇌혈관을 막은 것이었다. 왼쪽 뇌에 문제가 있으면 오른쪽이 마비됨과 동시에 언어 기능도 장애가 생긴다고 한다.
여느 환자들과는 달리 그녀의 보호자는 약혼자였다.
<환상의 커플>처럼 다정하고 교양 있는 그들... .
환자에게 중풍이 오자, 그 약혼자는 아직 법적 보호자가 아닌 탓에 법적 보호자인 그녀의 아버지를 모시려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겐 그녀보다 아홉 살 많은 큰언니 같은 새엄마와 아홉 살짜리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도 약혼자도 새엄마도 눈물을 훔치면서 슬픔을 참고 있었다.
한 달 후.
8층 2 인실에는 그녀의 아버지께서 그녀를 간호하고 계셨다.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가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그녀의 아버지는 하루 속히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과 함께 <운명>이란 말로 절제하고 있었다.
보호자로 그녀를 간호하던 젊고 멋있는 약혼자에 대해선 그들도 말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다시 말을 배워야 하고, 오른쪽 근육을 찾기 위해 인내해야 했던 그녀.
젊은 나이니까, 지금쯤은 건강해졌으리라. 보이지 않은 눈물만큼 더욱 성숙한 선생님으로 거듭 태어났으리라.
가끔 나 혼자 그렇게 떠올려 볼 때가 있다. <2003. 5. 26.>
그 해 3월 - 그녀 -
권선옥(별헤아림)
빛깔 없는 옷을 입은
한 마리 힘없는 짐승.
그녀가
어떤 색깔의 입술을 그렸는지
그녀가
얼마나 착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생각를 했는지
...... .
바뀐 잣대로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는
한 마리 쓸모없는 짐승.
병상에 적혀 있는 꽃다운 숫자만이
안타까운 미련의 수치일 뿐
창 밖에서 스며드는 봄기운을
애써 모른 척한다.
잘못 날아온 나비 한 마리
멋쩍게 돌아간 후
마비된 오른발로는
가지 못 하는 결혼의 꿈.
날 잡았던 지난 얼굴
눈물도 없이 지운다.
절뚝거리는
한 마리 억울한 짐승.
아홉 살 많은 새엄마는 울고 있지만
선택된 일상이 그녀를 달랜다.
한 살짜리 걸음마 하듯
두 살짜리 말 배우듯
핏발 선 손으로
눈물 감추며
땀방울 닦아내던
외로운 짐승.
이십 대의 어느 계절을
그녀는 그렇게 견디었다.
그 해 3월.
<2003.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