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건너온 남가주님의 사랑
태평양을 건너온 남가주님의 사랑
오늘은 퇴근길에 여러 가지 짐이 많아 낑낑대며 현관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는데 조그만 쪽지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박원자님 국제소포 경비실에 보관’
누구일까 짐작은 했지만 미국에 계시는 남가주님의 소포였다.
상자는 제법 크나 너무 가벼워 무엇일까?
어린 아이처럼 궁금한 마음에 외출복도 벗지 않고 그대로 서서 열어보니
<나이키>신발 케이스에 가득한 하얀 스티로폼 조각 속에 립스틱 하나와 머풀러가 들어 있었다.
+ + + + + + +
남가주님을 알게 된 것은 금년 2월초순경 동호회게시판에<한잔 걸치고 싶다>라는
글과 <존경하는 오숙자 교수님께>라는 글을 올리면서부터였다. 오 교수님께 올린
글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는 쪽지를 받은 뒤로 어쩌다 가끔 한 번씩 쪽지를 나누게
되면 비록 몸은 조국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지만 조국을 사랑하고 가곡을 남달리
좋아하시며 또 신앙 깊은 그 모습에서 저절로 존경심과 언니 같은 마음을 갖게 하였다.
가끔씩 음악가의 방 오 교수님의 홈에 남기신 글이라든가 게시판에 올리신 글들을
보면 예사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오 교수님의 음악을 너무 좋아하시는
분이라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 하였다.
오 교수님이 병원에 입원하셔서 문병을 다녀온 후 쓴 글<카네이션 한 다발을 들고>가
계기가 되어 그 뒤로 다정한 언니처럼 다가와 언니로 아우로 부르며 지내오던 어느 날
새 사제를 위한 첫 미사 때 불렀던 노래<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미국에 있는 성당
에서도 불러보고 싶다는 리플을 읽게 되어 언젠가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름 동호회 때 부를 신청 곡을 받는다고 회장님이 공고를 하자 비록 함께 하지는 못하
지만 <고향의 봄>을 불러달라고 하셨고 나는 그 시간에 남가주님을 위하여 국제 전화를
할 테니 함께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그런데 그 날은 공교롭게도 막내딸이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풀장학생으로 입학하여
떠난 뒤 부부가 오랜만에 10일 간 여름휴가로 이태리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 있을
거라고 소식을 전해 오셨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신청 곡은 같이 인쇄를 했고 우리 회원들은 과천 서울 대공원 숲 속
에서 남가주님을 그리며 그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 뒤로 약 한 달이 지났을까?
오랜만에 홈에 들어오셨기에 인사를 드렸더니 몸이 좀 불편했었다고...
그 때는 정말 가슴이 뭉클함을 느낀 게 사실이었고 오 교수님의 미사곡과 가곡집을 보내
드리고 싶어졌다.
그 먼 미국에서 우리말로 된 미사곡과 우리 가곡을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구할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보내드려
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몇 분에게는 보내기도 했다.
앞으로도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필요로 한다면 악보를 받아보고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어디라도 보내드리고 싶다.
+ + + + + + + + +
남가주 언니!
오늘 언니 선물 받고 너무나 감사해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 선물 고르시는 모습 눈에 선하고 마음도 아주 따뜻하게 느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리고 늘 건강하시고 기도 속에 만나요.
자주 소식 드릴게요
이 소중한 인연들은 오 교수님께서 가객 은현배 회장님의 답시로 <임진강Ⅱ>를 작곡하신 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머지않아 <임진강Ⅱ>가 우리 동호회원들의 아름다운 기다림 속에서 발표된다고 한다.
그 날은 남가주님이 보내주신 이태리제 머풀러를 두르고 미제 립스틱을 바르고 또 누군가가
주신 아껴둔 프랑스제 향수를 뿌리고 공연장으로 달려 갈 것이다.
어쩌면 그 날 무안의 아무개(???~@#%*)가 동행할지도 ....
오늘은 퇴근길에 여러 가지 짐이 많아 낑낑대며 현관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는데 조그만 쪽지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박원자님 국제소포 경비실에 보관’
누구일까 짐작은 했지만 미국에 계시는 남가주님의 소포였다.
상자는 제법 크나 너무 가벼워 무엇일까?
어린 아이처럼 궁금한 마음에 외출복도 벗지 않고 그대로 서서 열어보니
<나이키>신발 케이스에 가득한 하얀 스티로폼 조각 속에 립스틱 하나와 머풀러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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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주님을 알게 된 것은 금년 2월초순경 동호회게시판에<한잔 걸치고 싶다>라는
글과 <존경하는 오숙자 교수님께>라는 글을 올리면서부터였다. 오 교수님께 올린
글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는 쪽지를 받은 뒤로 어쩌다 가끔 한 번씩 쪽지를 나누게
되면 비록 몸은 조국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지만 조국을 사랑하고 가곡을 남달리
좋아하시며 또 신앙 깊은 그 모습에서 저절로 존경심과 언니 같은 마음을 갖게 하였다.
가끔씩 음악가의 방 오 교수님의 홈에 남기신 글이라든가 게시판에 올리신 글들을
보면 예사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오 교수님의 음악을 너무 좋아하시는
분이라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 하였다.
오 교수님이 병원에 입원하셔서 문병을 다녀온 후 쓴 글<카네이션 한 다발을 들고>가
계기가 되어 그 뒤로 다정한 언니처럼 다가와 언니로 아우로 부르며 지내오던 어느 날
새 사제를 위한 첫 미사 때 불렀던 노래<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미국에 있는 성당
에서도 불러보고 싶다는 리플을 읽게 되어 언젠가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름 동호회 때 부를 신청 곡을 받는다고 회장님이 공고를 하자 비록 함께 하지는 못하
지만 <고향의 봄>을 불러달라고 하셨고 나는 그 시간에 남가주님을 위하여 국제 전화를
할 테니 함께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그런데 그 날은 공교롭게도 막내딸이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풀장학생으로 입학하여
떠난 뒤 부부가 오랜만에 10일 간 여름휴가로 이태리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 있을
거라고 소식을 전해 오셨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신청 곡은 같이 인쇄를 했고 우리 회원들은 과천 서울 대공원 숲 속
에서 남가주님을 그리며 그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 뒤로 약 한 달이 지났을까?
오랜만에 홈에 들어오셨기에 인사를 드렸더니 몸이 좀 불편했었다고...
그 때는 정말 가슴이 뭉클함을 느낀 게 사실이었고 오 교수님의 미사곡과 가곡집을 보내
드리고 싶어졌다.
그 먼 미국에서 우리말로 된 미사곡과 우리 가곡을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구할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보내드려
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몇 분에게는 보내기도 했다.
앞으로도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필요로 한다면 악보를 받아보고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어디라도 보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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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주 언니!
오늘 언니 선물 받고 너무나 감사해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 선물 고르시는 모습 눈에 선하고 마음도 아주 따뜻하게 느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리고 늘 건강하시고 기도 속에 만나요.
자주 소식 드릴게요
이 소중한 인연들은 오 교수님께서 가객 은현배 회장님의 답시로 <임진강Ⅱ>를 작곡하신 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머지않아 <임진강Ⅱ>가 우리 동호회원들의 아름다운 기다림 속에서 발표된다고 한다.
그 날은 남가주님이 보내주신 이태리제 머풀러를 두르고 미제 립스틱을 바르고 또 누군가가
주신 아껴둔 프랑스제 향수를 뿌리고 공연장으로 달려 갈 것이다.
어쩌면 그 날 무안의 아무개(???~@#%*)가 동행할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