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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家牒

달마 2 749

조선소녀 정이, 하나꼬가 되어 첫사랑을 잊다
[우리가족과 8·15] 65년, 시어머니의 마음 속에 간직한 첫사랑
    김혜원(happy4) 기자   
 
 무더위가 한창인 팔월의 어느 날. 시어머니는 거실이 울릴 듯 커다란 소리도 모자라 텔레비전모니터에 코를 붙일 듯 가까이 앉아 화면에 비춰지는 금강산의 비경을 넋을 잃고 바라고 보고 계십니다.

"어머니 소리 좀 죽이시지. 온 동네가 다 듣겠어요."
"뭐라고? 안 들린다. 야야 니도 봐라 금강산 나왔다. 저거 봐라 저기가 구룡폭포야."
"어머니 처녀시절에 금강산 다녀오셨다고 자랑하시는 거죠? 첫사랑하고 다녀오셨다면서요?"
"야가 큰일 낼 소리하고 있다. 첫사랑은 무신 첫사랑이냐. 남사스럽게."
"엄니 그러지 마시고 얘기 좀 해주세요. 그분이 연희전문출신이었다고 하셨죠?"

 ▲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더듬어 힘들게 이야기를 들려주신 시어머니. 
 
ⓒ2005 김혜원
 
여든 다섯을 넘기시며 빠르게 쇠약해지시는 시어머니는 웬만한 소리를 잘 듣지 못할 정도로 귀가 어두워지시고 눈도 많이 나빠지셨습니다. 20년을 넘게 지병으로 앓아 오신 당뇨합병증으로 하루가 다르게 혼탁이 오고 있어 맑은 하늘을 응시하고 있어도 초점을 잃고 허공의 어디쯤을 응시하고 있는 듯 보여 자식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어머니의 시선을 유난히 잡아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금강산이 나오는 화면입니다.

그날 저는 싫다고 마다하시는 시어머니를 졸라 육십오 년을 넘게 가슴 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23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꽃다운 나이를 지낸 시어머니의 이야기는 한 여인의 슬픈 이야기일 뿐 아니라 어둡고 힘들었던 그 시절 힘없고 측은하기만 했던 우리 조국의 이야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일제치하 가난과 핍박을 피해 남의 집살이를 가다

1938년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며 지독한 보릿고개를 겪던 그 해 봄 열다섯 소녀 정이는 일제수탈로 더 이상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가회동의 한 부잣집에 남의집살이를 하러 갑니다.

"일본 놈들 등쌀에 살 수가 없구나. 그마나 손바닥만한 논밭도 다 빼앗기고 소작이라도 붙여 먹고 살려 했더니 나는 것보다 가져가는 것이 더 많으니…, 이러다 조선인들은 모두 다 굶어죽지 싶다. 차라리 네 외삼촌 따라 간도로 갈 걸 그랬어. 어쩌겠느냐. 네가 맏이니 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부잣집이니 너 하나 먹이고 입히는 것은 충분할 것이다. 농사일만큼 힘든 일도 아니고 그 댁 작은 마님 아기와 놀아주고 차 심부름만 하면 된다 하니 잘 지내거라. 집에 있어야 풀뿌리죽도 제대로 먹이지 못할 것이다…."

착한 정이는 어머니의 남루한 광목 저고리의 옷고름이 눈물로 젖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가회동집에서 보낸 인편을 따라 집을 떠납니다.

"가회동에 누구네라고 하면 인력거꾼들이 알아서 데려다 주는 집이지. 나는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주로 차 심부름을 했다. 처음 가회동집에 가니 집에서 입고 간 먹물들인 광목치마저고리부터 벗겨버리고 바느질 고운 숙고사 치마저고리를 해 입히더라. 생전 처음 고운 옷을 받아 입으니 얼마나 좋던지…."

차시종 정이와 연희전문학생과의 만남

"쉰둥이 아들을 낳은 작은 마님을 별채 들이셨는데 기생이었다던데 얼마나 이쁘고 고운지 몰라. 마음씨도 착해서 나에게도 잘 해주었지."

열다섯 정이의 대가집 차 시종살이는 집에서 못 먹고 못 입고 고생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에 비하면 오히려 편하고 안정된 생활이었습니다.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는 당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었다. 누구든 지나다 들어오면 사랑채에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며칠씩 묵어 가기도 하고 용채를 얻어다 쓰기도 했지. 그 사람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어."

복숭아빛 뺨을 가진 붙임성 있는 아이 정이는 눈치도 빠르고 영리하기도 해서 작은 마님과 아기한테는 물론 가회동집을 드나드는 객들에게도 사랑받는 아이였습니다. 가난한 고학생으로 가회동집에서 장학금을 얻어 대학을 다니고 있는 큰 도련님의 친구인 박형준 역시 일 년이면 몇 달씩 사랑채에서 먹고 자며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정이야. 글은 읽고 쓸 줄 아느냐?"
"겨우 읽을 줄은 아는데."
"우리 말과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아야지. 너와 같은 아이일수록 공부를 해야 한다. 오늘부터 틈틈이 책을 읽거라.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배워야 한다."

아마도 대학생 형준은 자신처럼 초라하게 대갓집의 그늘에서 먹고 사는 정이에게 연민의 정을 품었는지도 모릅니다.

"작은 마님의 애기씨는 늦둥이라 그런지 병약했었지. 그런데다가 피부병을 달고 살았어. 그래서 일 년이면 한두 번씩 금강산행을 했었단다. 금강산 온천이 아기씨 피부병에 특효라 여름이면 온 식솔들이 모두 금강산에 가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놀다 오곤 했지.

지금 테레비에서 나오는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니들도 진짜로 가보면 얼마나 더 좋은지 알게 될 거다. 나는 지금도 그때 올랐던 금강산이 어제 본 듯 선해. 사진도 여러 장 찍어 두었는데 6.25 동란 통에 들어온 도류코징(터어키군)들이 죄다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뭐가 남아 있어야지. 아무튼 오르는 길목마다 찻집이 있어서 쉬엄쉬엄 차를 마시며 올랐는데 지금도 금강산에 그 찻집이 있을라나 몰라."

1940년, 조선인들은 일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너도 나도 일본식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조선소녀 정이는 어느새 하나꼬(花子)가 되어 있었습니다.

 ▲ 1942년 친정아버지의 창신황국신민학교입학사진 
 
ⓒ2005 김혜원
 
"지독한 일본놈들 내선일체라고 떡하니 걸어놓고는 학교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황국신민을 만드느니 뭐니 하면서 속속들이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아냐? 황국신민은 무신 황국신민이야. 그렇게 강제로 반 일본놈을 만들어 학도병이니 군속이니 거창하게 이름만 내걸고는 열두셋 어린애들까지 전장에 죄다 총알받이로 죽이고 그것도 안되면 징용으로 보내고 여자들은 공장에 보낸다고 대신따이(정신대-일본군위안부)로 끌고가고 치가 떨릴 일이지."

잊지 못할 금강산 여행

열일곱 되던 해인 1940년의 금강산 여행에는 가회동집 가솔과 함께 박형준도 함께 동행했던 모양입니다. 금강산 등반을 마치고 거나하게 술이 오른 박형준은 전에 없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립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에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일까…."

전에 없이 침울해 보이던 준형은 유성기에서 나오는 유행가가락을 따라 흥얼거리다가 곁에 앉은 열일곱 소녀 정이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남깁니다. 아마도 청년 준형은 술기운을 빌어 사랑고백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도 학도병에 나가게 되었구나. 나는 이제 일본군이 되어 일본을 위해 싸우러 가야한다. 만일 내가 죽지 않고 돌아오면… 정이야… 그러면 나를 따라 내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와 주겠느냐?"

눈빛으로만 언약을 나눈 두 사람은 금강산을 내려와 가회동에 도착하면서 헤어집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놈들이 미친 듯 날뛰었다. 가회동집도 예전같지 않았어. 난 아기씨를 돌보고 한편으로는 그 사람도 기다리면서 그대로 눌러 있으려고 했지.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아부지가 날 찾으러 오신 거야. 어머니가 아프시다면서 집으로 가야 한다고."

정신대를 피해 도둑시집을

몇 년간의 가회동 남의집살이를 끝내고 모래내집으로 돌아온 정이는 남의집살이를 가기 전에 그랬듯이 병드신 어머니 대신 부엌일과 밭일을 맡아 하게 됩니다. 남의 집 쌀밥이 좋아도 내 집에서 먹는 보리밥만 하랴는 생각을 하게 될 즈음 동네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본군 위안부 착출 소식이었습니다.

"당시 열서넛부터 스무살 언저리까지 처녀라고 생긴 것은 모조리 잡아 갔다. 전쟁에 나간 그 사람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알 길이 없고 일제 앞잡이질하던 이장놈은 매일같이 집으로 찾아와 대신따이(정신대-종군위안부)를 안 나가면 아부지가 대신 징용을 나가야 한다고 공갈 협박을 해오지…. 그놈 말로는 대신따이에 나가면 군수물자 공장에서 일도 하고 돈도 벌어 집으로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게 다 거짓말인 거야. 한번 끌려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다 알고 있었거든."

결국 정이의 부모님은 과년한 정이를 정신대로 보내느니 차라리 출가를 시키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처녀들도 공출을 피해 결혼을 서두르는 마당에 적당한 혼처가 쉽게 나타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루하루가 불안했던 부모님은 정이를 속이고 상처한 홀아비에게라도 서둘러 보내는 것이 정이를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정이는 일본군위안부로 치욕스러운 생을 살게 하느니 차라리 강제로라도 혼인을 시킨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사람 소식을 단 한자라도 듣고 가면 소원이 없겠더라. 그래서 가회동을 다시 찾아갔지. 작은 마님이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시던지…,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큰 도련님 친구인 준형이 청년 이야기가 나왔다. 그 사람이 행방불명되었다고… 아마도 태평양 전쟁 중에 전사했을 거라며 혀를 차는 거야."

정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뜻대로 일곱 살이나 나이가 많은 남자와 서둘러 혼인을 치르게 됩니다.

"혼인을 해야 하는데 뭐 하나 준비된 것이 있어야지. 지독한 일본 놈들이 전장물수 만든다고 금붙이 쇠붙이 할 것 없이 죄다 쓸어가 버렸으니…. 어머니 은비녀는 고사하고 제기그릇에 애기들 먹는 숫가락 몽뎅이 하나까지도 쇠붙이라면 개가 핥은 듯 빼앗아 가버리고…, 우리 동네 한 사람은 땅을 파고 묻었다가 들켜서 지서로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기도 했다.

니들은 모른다. 그때 조선인들이 얼마나 서러운 세월을 살았는지…. 대대로 농사지어 먹고 살던 땅 갖다 바쳐, 소작이라도 붙여 먹으려면 공출이라고 죄다 쓸어가, 아들은 학도병 끌고가고, 청년들은 부역으로 징발해가고, 딸들은 애티만 벗으면 대신따이(정신대)로 잡아가고…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놈들…."

어머니 마음 속의 태극기

부모님의 뜻을 따라 결혼을 한 정이가 가회동 집을 다시 찾은 것은 패색이 짙어지고 있던 태평양전쟁말기로 일인들의 패악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작은 아기씨의 병이 심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가회동을 찾은 정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박준형의 소식이었습니다. 작은 마님이 정이의 무릎 앞으로 밀어 놓은 누런 봉투 속에는 놀랍게도 책 몇 권과 누렇게 바랜 태극기가 들어있었습니다.

"태극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이랑은 많이 다르지만 그때도 태극기가 있었다. 니들은 지금 태극기를 아무렇게나 함부로 여기지? 나라를 잃어봐라. 태극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것이 태극기였다. 조선인들이 왜 그리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겠냐. 일본놈들한테 개, 돼지만도 못한 대접을 받은 것도 모두가 나라가 없어서 그런 거지. 해방이 그렇게 빨리 올 줄 알았으면 그때 태우지 않고 간직했었을 텐데."

지금도 국경일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몸단장을 하신 후에 가족 중 누구보다 먼저 태극기를 달아두시는 어머니.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늘 감격스럽게 바라보시는 어머니. 언제나 주무시는 방에서 가장 높은 곳 정갈한 나무 상자 속에 오래된 태극기를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는 이유가 이제야 조금은 이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해방이 되었습니다. 마을마다 넘치는 대한독립만세의 함성과 넘실거리는 태극기의 물결…. 이미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정이는 넘실거리는 태극기가 너무나 서럽고 아파서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피어보지도 못한 사랑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슬픈 운명이 서러워서 울었고 그녀의 첫사랑이 그리도 서럽고 애타게 기다리던 조국의 해방이 너무 늦게 온 것이 원망스러워 울었을 것입니다.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목 놓아 울었던 것입니다.

비가 지난 후 시리도록 푸른 팔월의 하늘을 한숨으로 응시하고 계시는 어머니. 오늘 어머니는 혹시 65년 전의 사랑을 기억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연희전문학생과 은근한 사랑에 들떠 했던 꽃 같은 처녀 정이도, 대신따이가 무서워 도둑시집을 간 하나꼬도 아닌 여든다섯의 할머니가 되어 있는 분. 희미해지는 시력과 멀어져가는 소리처럼 이 세상과 점차 헤어질 준비를 하시는 어머니는 우리네 역사의 가장 아픈 세월을 치마폭으로 안아 살아내신 한국여인의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그나마 말씀을 전하실 수 있는 기력과 기억력이 남아 있는 지금 어머니에게서 이토록 소중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전해들은 이 이야기는 오래도록 후손들에게 남아 역사의 기록이 될 것이며 교훈이 될 것임을 믿기에 긴 시간 마른입을 물로 적셔가며 들려주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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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리 주변을 지켜내는
아주 고마운 우리네
며누님 글 너무 잘 엮어 깨우쳐 주심이라 !
기사 전재해 올립니다...
언제나 우리가 유념하며 살아 가야하는 질곡의 우리 역사의 낙루 같음입니다 !!
2 Comments
산처녀 2005.08.10 11:24  
  가슴 찡한 이야기입니다 .
우리의 치욕스러운 역사의 한페이지 .
저는 일제 시절이라는 것을 격지는 못하고 듣기만 하였읍니다만
태극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껴 봅니다 .
우리 주변에도 일제 치하에서 징용에 끌려갔다 돌아 오지 못한 아버지 ,
아들이 있어 그아들을 그리며 눈감지 못한 어머니들이 있읍니다 .
다시는 이런 전철을 밟지않는 훌륭한 국민이 되어야 겠읍니다 .
우지니 2005.08.11 12:43  
  우리들의 지난 역사속에는 가슴 아프고 뼈가 녹아내리는 수많은 사연들이 다 묻혀 지나가 버리는 듯  겉으로는 잊혀질지 몰라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아서 평생을 가슴앓이로 살고 계시는 우리 이웃 어르신들을 어떻게해야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요?

세상이 너무나 많이 변하여 지금 신세대들 한테는 소설같은 이야기이겠지요. 어떤 일이던지 직접 겪어보지 아니하고는 이해하기 어려운일 이니까요.
 특히나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젊은이들의  현시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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