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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마지막 선물

사은 2 1442
마지막 선물

사람은 누구에게나 십자가가 하나쯤은 있다. 인생에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이 없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이 없어서, 어떤 사람은 배우지 못해서, 평생 그 십자가를 감당하느라 힘들게 살아간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하나쯤 아픈 상처를 안고 그렇게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내가 세 살 때 일이다. 어느 겨울밤 갑자기 나는 고열로 인해 온 몸이 불덩어리가 되었다. 그 뜨거운 체온은 하얀 눈(雪) 위에 뜨거운 연탄재를 버렸을 때 눈이 녹아 버리듯 결국 나의 왼쪽 시력을 녹여 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반쪽 시력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잃어버린 한 쪽 눈이 내 평생에 무거운 십자가가 될 줄 나는 미쳐 몰랐다. 시각장애로 인해 어려서부터 수도 없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일일이 나열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사촌과 박이 터져라 싸웠는데 사촌이 힘이 달리자 내게 “야! 이 애꾸눈아!”하고 대들었다. 나는 그 때 비수 같이 내 마음에 꽂혔던 그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날이면 나는 남 몰래 혼자 언덕에 올라 많이 울기도 했다.

내가 철없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불행한 아들의 눈을 수술해 주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되던 겨울에 수술을 해 주셨다. 그것은 내 인생에 한줄기 빛을 주는 것과 같았다. 동네 아이들이, 나를 애꾸눈이라고 놀려 댈 때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애꾸눈이 되어 놀림 받는 나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는 광주 홍 안과에서 수술을 해 주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은혜로 의안을 착용하고 나는 나의 장애를 감쪽같이 숨길수가 있었다. 그때 초등학교 5학년 때 광주 홍 안과에서 수술을 받고 거울 앞에 서서 처음으로 내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은 정상인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를 놀려대던 아이들도 이제는 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 고소한 맘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수술을 받고 동네에 나타났을 때 짓궂은 악동들은 <야! 광선아! 니 눈 보이냐?> 하면서 내 뒤를 따라 다녔다. 다음날 동네에는 내가 개 눈을 박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때부터 나에게 <개 눈에는 바람도 보인다는 디, 너도 바람이 보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수술을 하고 나서 결국 바람을 보는 초능력을 가진 아이가 되어버린 셈이다.

내가 나의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떳떳해 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언제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녔고 늘 나의 포켓에는 거울을 담고 다녔다. 남자가 왠 거울을? 하고 궁금하겠지만 나는 거울을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남 몰래 들여다보았다. 왜냐하면 행여나 내 의안에 눈곱이라도 끼어, 남이 보기에 흉하게 되어 혐오감을 주지 않을까 불안해서 끊임없이 거울을 드려다 보면서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시각장애 6급으로서 보건복지부의 보조로 국내선 비행기를 탈 때는 반액을 할인 받는다. 그렇게 반액 할인 혜택을 받을 때면 나는 어려서 당했던 서러움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이렇게 특권을 누리는 것이 즐겁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요즘 문신 새겨 군에 안 가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한쪽 눈이 시력이 없어서 국방부 병 종 판정을 받아 징집 면제를 받았다. 그래서 군대 얘기만 나오면 나는 월남 스키 부대를 제대했노라고 능청을 떤다. 내가 시각장애자로 사는 아픔의 대가인가? 나는 한 마디로 말해서 그런 일이 내게는 화가 변하여 복이 된 셈이라고 맘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한 목사인 내가 제주에서 목회를 하면서 육지에 한 번씩 나가려면 비행기 삯이 만만치 않은데 그럴 땐 나의 시각장애도 목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셈이다.

내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려고 맞선이란 걸 보았을 때 아내는 전혀 나의 한 쪽 눈이 의안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나도 용기가 없어서 그 비밀을 굳이 밝히지 못했다. 결국 아내를 속이고 결혼을 한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신혼 생활 6개월 동안 나는 그 사실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결혼 후에 나는 자고 일어나면 의안을 착용한 눈이 눈곱으로 달라붙어 잘 떠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나의 모습을 아내에게 들킬까봐 노심초사하며 감추려고 애를 썼다. 아내는 나와 천생연분이어서 그런 것이었는지 아내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은 필경 하나님이 아내의 눈을 멀게 하신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아전인수격으로 생각을 했다. 그 후로 나는 그 사실을 무시하고 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나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나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그래서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해 있을 때 나는 이 무거운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이 비밀을 아내에게 고백한 것이다. 아내는 나의 청천벽력 같은 고백을 듣고서 나에게 어딘가 내 행동이 이상했다며 얼마나 불편 하느냐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닌가.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아도 아내만은 나의 아픔을 이해 해 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구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내는 내게 뜻밖에도 “당신은 목회를 해야하니까 내 눈을 당신한테 이식하면 안 되겠느냐?”고 제안을 했을 때 나는 아내의 그 말을 듣고 콧등이 찡해서 아내를 똑 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아내는 진정으로 나의 장애를 안타까워하며 내게 자기 눈을 기증하고 싶어했다. 그 뒤로 아내는 나의 시각장애로 인한 불편함을 이해해 보려고 한쪽 눈을 감고 걸어가 보기도 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아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지금 나는 아내와 결혼한 지 27년이 되었다. 나는 그 후에도 나의 장애로 인해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내가 이 장애 사실을 고백하고 컴밍 아웃( Coming out) 하기까지는 24년의 갈등과 고민의 어둔 밤들을 나 혼자 힘들게 지나 왔다. 내가 영적으로 성숙해 져 가면서 자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까지, 나는 젊은 날 숱한 불면의 밤을 방황했던 것이다. 그러한 일도 알고 보면 내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장애를 애써 숨기려 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감사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내가 시력이 온전했었다면 아마 목회를 하지 않고 세상에 취해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의안을 보면서 이것이 저주의 표가 아닌 신의 사랑의 흔적이라고 까지 애써 생각 해 보는 것이다.

나는 서부 영화에 나오는 총잡이처럼 한 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에게 큰 은혜를 입은 까닭이다. 겉으로는 내게 엄하셨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내 일생에 가장 큰 선물을 해 주셨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그 마지막 선물을 소중히 여기며 험한 세상을 살아간다. 내가 능력 있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가나한 아버지를 만났었다면 내 운명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까지 하다. 언제인가 우리 교회 청년 하나가 왔는데 그는 나와 같이 왼쪽 눈이 함몰되어 시력을 잃어 버렸다. 보기에 무척 흉해 보였다. 그는 나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애써 내 눈길을 피하는 듯했다. 나는 그 청년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얼마나 아버지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도 아버지를 잘 못 만났다면 저 청년처럼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그런 모습으로 살면서, 내 인생을 한없이 저주하면서 살았겠지 생각하니 아찔했었다.

우리나라에 장애인은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 구체적인 숫자는 모르지만, 이들 모두는 윈치 않은 장애 때문에 평생을 사회의 냉대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미국의 여류 교육가요 사회 사업가였던 헬렌 켈러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 그녀는 맹농아의 삼중고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 태어났지만 훌륭한 스승 설리반을 만나 장애를 극복하고 인류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교육가 사회 사업가가 되어 인류 사회에 소망을 심었다. 베토벤도 그의 말년에 청력을 잃었어도 불굴의 의지로 아름다운 곡을 작곡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생각 할 때마다 원치 않는 장애를 입었어도 그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 낸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다. 장애를 안고도 꿋꿋이 살았던 이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육신의 장애가 살아가는데 조금은 불편할지라도 정신만은 대나무처럼 곧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며칠 전에 강원도 동해에서 목회 하는 목사 사모인 조카와 전화 통화를 했다. 내가 얘기 중에 우연히 내 시각 장애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그녀는 전혀 상상도 못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놀라는 눈치였다. 이제 나는 누구에게나 나의 아픈 상처를 말 할 수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나는 나의 불안전한 육체보다 정신을 더 귀하게 여기므로 나의 아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은 강한 정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의 창(窓)을 하나 잃어버리고 50년을 살아 왔지만, 늘 한쪽 눈으로 반쪽 세상만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모든 사물에 대해 깊이 보아 왔다. 그래서 시를 쓰고 수필을 쓰는 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나의 반쪽 눈으로도 세상 곳곳을 보며 살아 왔다. 내 육신은 이렇게 불완전해도 내 영혼의 눈은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며 산다, 때로는 이 세상의 오염되고 속된 풍경을 이제 그만 보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산다. 그리고 해바라기가 해 따라 가듯이 내 영혼의 눈은 늘 하늘을 본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평생 짊어져야 할 내 몫의 태인 십자가! 나는 내 몫의 태인 이 십자가를 지고서 오늘도 길을 간다.

오늘은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그립다. 간 경화가 깊어 세상을 버리셨던 아버지는 아들이 불구자로 세상에 놀림 받는 것이 맘 아파서 악착 같이 일을 하셨고, 결국 거금을 드려서 아들의 눈을 수술해 주셨다. 아들의 눈을 수술해 주시기 위해 밤낮 없이 일 하셨던 아버지! 내가 세 살 때 홍역을 앓다가 고열로 인해 시력을 잃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수술을 했으니까 적어도 10년을 넘게 한쪽 시력으로 사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내 눈을 수술해 주시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대 수술을 하기 위해 아버지는 당신의 육신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셨던 것이다. 첫 번 째 부인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을 때 아버지는 40이셨다. 그리고 그 후로 재혼을 하셨는데 재혼해서 얻은 아들이 장애인이 되었으니 아버지의 맘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결국 아버지는 재혼을 하시고 꿈 같은 행복도 잠간이었다. 내가 홍역을 앓다가 시력을 잃은 후로는 아버지는 늘 우울하셨다. 아버지는 자나깨나 돈을 벌어서 내 눈을 고쳐 주시는 것이 소원이었으리라.

그 후 아버지는 꿈을 이루셨다. 아버지는 마음 속에 늘 짐으로 남았던 아들의 눈을 수술해 주신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게 생의 마지막 선물을 주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간 경화증으로 세상을 버리셨으니 아버지는 내 눈을 수술해주고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신 셈이다. 그렇게 나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기시고 천국으로 가셨다. 나는 지금도 날마다 나의 의안을 보면서 아버지의 애절한 사랑을 느껴 본다. 아들의 눈을 수술해 주기 위해 당신의 간이 돌처럼 굳도록 열심히 일만 하셨던 아버지. 내 나이 50에야 그런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불효 막심한 자식인가? 나는 아버지가 당신의 목숨과 바꾸신 마지막 선물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떳떳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밤에는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것 같다. 나에게 그 생애에 마지막 선물을 남겨 주기 위해 당신의 간이 굳도록 몸을 던져 부지런히 일 하셨던 나의 아버지! ......아! 나는 사랑하는 나의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2003년 7월 14일 늘 푸른 제주에서 사은 김광선 시인 목사


2 Comments
꽃구름언덕 2003.12.31 15:38  
  목사님의 영안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아닐까요?
마치 사도바울처럼.... 은혜가 족한 삶을 사시는
그래서 남이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것을 마음으로
 더 잘 보시게 하기 위한 섭리가 아닐까요?

제가 아는 목사님께서도 두눈의 시력이 다 없으시지만
회현동에 맹인교회를 지으시고 수 많은 시각 장애우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고 계시지요.

그 곳에 가면 두눈 뜨고도 그분들 보다 아름다운것들을 더 잘 보지 못한다는 부끄럼을 줄때가 많았어요.
화니.제이. 크로스비여사처럼 세상의 더럼움을 보지 못하므로
하늘의 사물같은 영적인 것을 더 많이 보고 두 눈 가진
사람들에게 참다운 광명을 준 분이잖아요?

목사님께서도  힘든장애를 극복하셨고 또
사랑을 받은 만큼 나누고 사시니 참으로 복있는 분이라 생각됩니다.
많은 재능까지 받으셨으니 더욱 새해에는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에게 참 빛을 나누시고 하나님의 축복속에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사은 2004.01.06 21:47  
  꽃구름언덕님! 감사합니다. 누군가 용기가 필요 할 때 모델 케이스가 필요하지요. 누군가 나같은 사람을 보고 나도! 나도! 하고 일어 났으면 좋겠어요. 늘 주안에서 밝게, 곱게,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꽃구름언덕은 가슴을 설레이게 합니다. 바랍이라도 한 줄기 불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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