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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현희님의 등단수필 소백산 소묘

바다 6 897
빗소리가 이렇게 포르테로 들리니 어제는 왜 그리 더웠는지 알겠어요.
벌써 장마라네요.
비 오기 전 소백산을 참말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는 소백산 가까이 사는 행운으로 쉽게 산행을 결정하곤 하지요.
경상북도와 강원도 충청북도, 3개도의 각 골짜기 마다 등산로가 여럿 있으니
어디로던 정상으로 갈 수 있지만 숲이 좋아 여름 산행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퇴계 이황선생이 물 흐르는 소리가 노래 소리 같다고
계곡마다 이름 지어 놓은 죽계구곡 쪽을 택하였지요.

조선 최초의 사액 서원이 있는 순흥 읍내를 지나 계곡입구에 들어서면
소백산 골짜기 곳곳에서 흐르는 석간수를 받아 놓은 저수지가 보이면
마음은 가벼이 설레고, 물새들도
한가히 투명한 창공을 유영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아담한 목조 주택이 있는 죽계산장이 보이면 벌써부터 유혹입니다.
왜냐구요?
이곳에만 오면 한 열흘만 이 산장을 빌려서(살수는 없으므로) 실컷 호수에
피어나는 물안개도 보고 책만 한 짐 가져가서 조용한 피서를 하고 싶어서이지요.

내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철없다는 듯 언제나 웃어넘기는 남편과
이야기하며 마을을 오르려니 어쩌면 저리도 많은 꽃들이 반기는지요.

아기 주먹만한 여름 사과가 향내 나게 익어가고 논이나 밭둑가엔 온통 개 망초 꽃 무리가
엷은 보랏빛으로 혹은 새하얀 낮달의 이마처럼 빛나게 흔들리고 있군요.

아이들은 이 꽃을 계란 꽃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누구도 눈여겨보아 주지 않는 잡초쯤으로 여기는 저 풀꽃 때문에
제가 더운 유월을 좋아 한다면 믿으시겠어요?

모란꽃 피는 유월이 아니라 망초 꽃피는 유월입니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란 시에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라고
표현된 구절이 있는데 그 누가 뭐래도 흰 점 꽃은
이 망초 꽃 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지요.

푸른 산천만 보다가 눈이 시릴까봐 대접도 못 받으면서 지천에 피어난 흰 점 꽃!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초암사 주차장입니다.
얼굴이 깨끗한 비구니 한분이 채마밭을 돌보고 있네요.

아홉 계곡을 모두 지나고 초암사 맞은편엔 조선시대에 새겨 놓아서 흐릿한
'죽계일곡'이란 글씨가 써진 금당 반석에서 하늘서 금방 내려온 듯 한
그 차디찬 물에 세수를 하고 본격적인 산행 시작이지요.

숲의 향기를 맡으며 오르는 등산로엔 산딸기가 발목을 잡는군요.
그냥 갈수야 없지요.
노오란 양은 도시락에 산딸기로 가득 채우던 유년의 계곡이 생각납니다.

"잎 새 뒤에 숨어 숨어 익은 산딸기
지나가던 나그네가 보았습니다.
딸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갑니다." 하는 동요도 부르면서
산뽕나무에 포도처럼 매달린 오디의 새콤달콤한 맛을 안보고 갈 수는 없지요.

이래저래 산행은 느려집니다.
가을엔 저 넝쿨에 머루가 익을 것이고 늦여름부터 다래가 꽤 열릴 거예요.
그러나 맛만 보는 겁니다. 이곳은 국립공원이거든요.

무슨 산 이야기에 먹는 애기가 많으냐구요?
이야기가 잠깐 곁길로 갔지만 아직 보여 줄게 많아요. 걱정 마세요.

산중턱까지 시린 계곡물과 함께 오르니 여분의 물병도 수분이 충분해서 소용없어요.
이른 봄에 환하게 꽃피웠을 산 벚나무 아래엔 버찌 열매가 많이도 떨어져 있군요.
어릴 적 조그만 산골 학교 운동장가에 많이도 서 있던 벚나무.
입술이 파래지도록 따먹던 버찌......!이런 생각으로 상쾌한 웃음을 웃고 가는 길은 가볍지요.

그리고 아~! 그 산 목련! 함박꽃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전 왠지 산 목련이란 이름이 더 좋아요.
그 백옥 같은 꽃잎 단아한 꽃송이하며 보라색 꽃술의 조화.
너무 고와서 숨소리에라도 오염될까 멀찍이서 보게 되는 산 목련을 보셨나요?
소백산의 산 목련을.......!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었다는 시구가 생각나는
이름모를 흰 꽃의 낙화를 저는 희고 깨끗한(? )발도 아니면서
그 낙화를 조심스레 밟으며 지나갑니다.

"떨어져 향기로운 말로 내 아는 사람들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쓰고 싶었다."라는 시는
산 목련 같은 편지로 고치고 싶었습니다.

대화도 조심스러웠어요.
산 목련 피는 그늘에선,
너무 고운 산길이라서 산이 어지러울까 미안해서.......!

다른 등산로엔 찾는 이들이 많아 가파른 길은 앞 사람들의 등산화만 보면서 가야하지만
이 길은 찾는 이가 적어서 호젓하기만 한데
가끔 푸른 숲에서 빨갛게 웃고 있는 산 나리꽃 때문에 반가워서
남편에게 아주 조용히 말을 건네긴 하였지요.

층층나무 무늬의 색감도 좋지만 숲의 여왕인 자작나무의 빛나는 자태를 만나면
한 아름 껴안아 주기도 하지요.
제가 젤로 좋아하는 나무거든요.
내 무덤에도 심었으면 하는 나무예요. 자작나무랑은 사연이 참 많아서요.

초입에선 산비둘기 소리가 흔하더니 높이 올라올수록 신기한 산새소리가
좋은 음악을 들려주네요.
물소리의 낭랑함과 화음을 이루며 숲의 소나타를 연주하네요.
가끔 지루하지 않게 조그만 동굴도 나타나고, 다람쥐 따르던 눈엔 딱따구리 집도 보이는군요.
소백산에 오르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고 음악가가 될 거예요.

기웃거리며 오르느라 늦긴 했지만 벌써 해발1100M군요.
봉두 암이라는 커다란 바위와 널찍한 풀밭이 숨어 있구요.
웃으면서 울려도 좋을 낡은 종도 하나 있어서 종소리의 메아리를 들으며
땀을 식히기에 아주 적당하답니다.

누군가가 나무에다 홈을 파서 산에서 흐르는 물을
쉽게 마실 수 있게 해 놓아서 아주 잘 쉬고 올라가지요.
나도 누군가에게 또 어디서나 쉼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었으면 하고 속으로 생각만 하지요.

그러나 이 곳부터는 좀 만만 하지가 않아요.
지금까지와는 달리 계곡 물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주 가파른 길을 가야하니까요.
하지만 걱정 없어요.
산이 높을수록 정상이 가깝다는 희망이 있고 예쁜 둥굴레 꽃도 힘을 내라내요.

"시간은 우리가 꽃을 바라볼 때 더욱 느리게 간다."는 글이 생각나네요. 굳이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꽃들만 잘 바라보아도
나이를 먹는 일이 더욱 느려지겠지요.

꽃을 보며 느리게 올라 왔지만 머리 위가 환해지는걸 보니 정상에 다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워낙 가파른 길을 올라온지라 그만 주저앉아 쉬었어요.
새벽이 오기전이 가장 춥고 어둡듯이 정상 직전에서 너무 힘이 들어
잠깐 쉬고 조금 올라가니 바로 평원이 펼쳐지는 군요.

며칠만 지나면 전설 같은 에델바이스가 새하얀 융단처럼 피고
자생 란의 향기가 평원을 휩쌀 거예요.

오늘의 목표지점 국망봉 !
해발1420M. 시야가 너무 찬란하여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알프스소녀 하이디의 노래 소리가 곧 들릴 것 같았어요.

구릉마다 분홍색과 흰색으로 피어난 야생화의 무리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고
상월단 쪽의 아무래도 산 라일락 같은 나무 꽃은 너무 향기로웠어요.

둘이서 앉을 만한 바위 하나를 찾아 남새밭에서 갓 따온
오이며 햇감자를 점심으로 먹는데 그 맛이라니.......!
소백산 정상에 부는 바람은 세속에 바람과 견줄 바가 못 되고 숨쉬는 공기
또한 그렇게 느껴지니 산장하나 짖고 살고 싶어지더군요.

누군가 "산에 왜 오르느냐고 물으면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른다고" 대답 한다는데
이해할 것 같아요. 아니 이해하구 말구요.
산이 넉넉한 산이 여기 높이 있어서 올라온 거지요.

한 등산객이 하산하면서 "다시 내려올 산을 왜 오르느냐"고 웃으면서 묻더군요,
그러면서도 "행복한 산행 되세요" 하고 인사를 하네요.

산이 거기 있으므로 오르고 행복하기 위해 오르고 무엇보다
오염된 무엇인가로 꽉 차있는 내속의 누추한 것을 비워내고
좀더 청신한 바람으로 채우려는 소망으로 산을 오른다고 속으로 대답했어요.

그러나 무엇보다 더욱 정직하게 나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서 산을 오릅니다.
종주를 하려면 산행이 일이 되므로 이밥 취며 수리치 밥치 등 산나물 가득한
이 국망봉에서 발길을 돌립니다.

왕 건에게 신라를 빼앗긴 비운의 마의태자가 천년고도 경주를 향해
통곡으로 백성들에게 사죄했다는 전설의 국망봉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문득 득도를 한 산신령도 아닌데 하산 하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내려오는 길에도 여전히 꽃들을 하얗고 힘이 들어 다리는 무겁지만
마음은 가벼워진 듯하니 죽계산장으로의 도피는 또 내년으로 미루어야 할까 봅니다.
물론 남편은 찬성이겠지요.

비온 뒤의 소백산은 또 무슨 말씀으로 내게 교훈할지
그 소식이 궁금하여 이 비 그치면 희방 폭포로 가든지 단양의 허영호 등산로로
오르던지 또 소백산을 오르려고 합니다.

그 산의 소리 , 그 바람 소리,그 산의 말 없는 말씀,
세속과 분주함이 삶에 정원에 볼품없는 잡초를 키우지 못하도록
도움만 된다면 산이  거기 있으니 또  올라가야지요.


빗소리가 알레그로로 들립니다.
소백산에도 비는 내리겠지요. 유월같이 희고 푸른 비가 내리겠지요.
망초 꽃 위로는 새하얀 비가 내리겠지요.










6 Comments
나비 2004.10.03 13:25  
  꽃구름언덕님 따라 산행! 그것도 그냥 오르는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즐거운 공부를 하며 여심히 국망봉까지 잘 따라 갔다 왔는데 ...어째 좀 죄송하다는 느낌은 왜인지...^^ㅎㅎ
다시한번 축하드리고 ~이가을 더욱 아름답고 행복해 지세요!
나비 2004.10.03 13:31  
  아! 참 글 올리신분은 바다 선생님이시군요!^^
선생님 수고 많으셨구요!
추석때 힘드셔서 쬐끔 빠지셨을까?^^ㅎㅎ
건강하시고 멋진가을 되세요! 우리 예쁜 꼬마들과 함께...
꽃구름언덕 2004.10.03 20:41  
  여기저기에서 친절한 날개짖하시는 나비님의
날개는 지칠줄 모르는군요.
참 부족한 일이 소문나서 이렇게 좋은 격려를 받으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음악친구♬ 2004.10.04 00:01  
  다시 읽으니 또한 새롭습니다

홈의 경사를 내 일처럼 기뻐하시면 잴 먼저 알려주시는 바다님~!
역시 그 넓은 바다~
서들비 2004.10.04 00:48  
  아름다운 산행에 동참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저도
우리동네 작은 산에 오르면서 봄, 여름, 갈, 겨울 계절마다
갈때마다 다른 얼굴로 맞아주는 산이 고맙고
특별히 마음이 가는 길도 생기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짧은 언어를 탓하며 마음속에 도로덮고 내려오는 옹달샘으로
간직하고만 있었는데......
아름다운 꽃구름언덕님의 달란트가 부럽기도 하고.... ^^
바다님 고맙습니다.  ^^
꽃구름언덕 2004.10.06 07:55  
  음악친구님!서들비님!
에쁜 두분의 마음따뜻한 격려 고맙습니다.
그리고 용기가 없어 부족한 제 글을 계시해주신 바다님의
배려와 우정을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전 부끄러워서 못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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