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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어머니의 기일을 앞두고

노을 8 1524
그날 내가 왜 한복을 입었을까?  집에 있는 자투리 천으로 한복 한 벌을 만들었는데 왜 내가 입어보았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누워계시던 엄마가 어눌한 말씨로 '이쁘구나' 하셨고 나는 내친 김에 큰 절을 해보였다. 다음날 아침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가뿐 숨을 몰아쉬다가 얼마 후 조용히 숨쉬기를 멈추셨다. 누워계신지 두 해째 봄 3월 27일이었다.

병석에 있는 사람에게 절을 하다니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예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마지막 인사를 드린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애간장이 끊어질 듯 슬프다는 표현을 실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괴롭게 몰아쉬던 숨이 멈추고 일순 찾아온 적막의 순간, 엄마의 얼굴은 아주 평온하고 깨끗하여 신산스럽던 주름도 다 펴지고 차라리 곱기까지 했다.
죽음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남아있는 가족들의 애통함은 극에 달해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데 엄마는 모르는 척 눈을 꾹 감고 아랑곳하지 않는 품이 무심하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그날 밤 하얀 양말을 신고 있는 엄마의 발을 만져보았다. 이미 경직이 되어 딱딱한 발은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놀랄만큼 찬 기운이 전해져 왔다. 보통 생명이 없는 물체들, 가령 돌이나 나무들은 만지고 있으면 내 손의 온기로 조금 따뜻해지는데 엄마의 찬 발은 내 손을 오히려 시리게 했다. 
나는 또 한 번 죽음을 실감하며 울었다.

엄마가 영영 집을 떠나던 날은 3월 하순치고 쌀쌀한 날씨에 하늘까지 흐렸다.
평소에 입버릇처럼 화장을 원하던 아버지의 뜻대로 엄마도 홍제동 화장장으로 향했다. 지금은 주택지가 되어버린 그 홍제동을 지나칠 때마다 어김없이 그날 생각이 나곤 한다.

관은 무정하고 거침없이 화구 안으로 들어가고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터져나오는 슬픔은 울음이라기보다 그저 온몸이 녹아내려 진액이 쏟아지는 것 같은 물리적  현상처럼 느껴졌다.
그후로 나는, 가끔 나도 그렇게  불에 타 한 줌 재로 강이나 산야에 뿌려지리라 싶어  상상을 많이 해보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살아서 어떻게 죽음을 체험한단 말인가. 그래서 생과 사는 그리도 가까운가 하면 또한 그렇게 먼 것이 아닐까.

스물 셋의 나이, 그 젊음은 슬픔으로도 가릴 수 없었던지 누군가 나를 보고 상복입은 모습이 이쁘다 했고 나는 허기가 져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문득 누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고개를 들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사촌오빠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제야 내가 지금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할 상주라는 데 생각이 미쳐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홍제동 화장장에서 진액처럼 쏟아내던 슬픔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처럼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고개를 들 수 없을만큼 부끄러웠다.

그리 오랜 기간의 와병은 아니라 해도 삼년 가까이 누워계셨고 소생할 가망이 없던 엄마의 병 때문이었을까, 혈기왕성한  젊음 탓이었을까, 어떤 이유로도 그 식욕을 변명할 길이 없었다.  그 일은 그 후로도 생각날 때마다 내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우리 엄마는 딸이 그렇게 밥을 잘 먹는 걸 아시고 서운해 하셨을까 모르겠다.  아마 그 사람좋은 웃음을 여전히 웃으셨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엄마는 내가 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가 멀어서 부지런을 떨어야만 지각을 면하는데 나는 태평하게 밥을 옴싹옴싹 떠먹고 있기 일쑤였다. 밖에서는 이웃 집 아이가 '학교 가자'고 소리쳐대도 밥그릇의 밥을 다 먹어야 일어났다고 한다.
'고만 먹고 가라. 학교 늦겠다'  보다못해 엄마가 채근을 하시면 '맛있는데 어떡해' 해서 그만 웃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두고두고 하셨었다.
다른 형제들이 마른 체형임에 비해 통통했던 내가 밥 잘먹어 그렇다고 좋아하셨으니 당신 떠났다고 딸이 밥도 못 먹기를 바라지는 않으셨을 것이라고 혼자 합리화를 시켜보기도 했던 것 같다.

엄마 떠나시고 비록 밥맛을 잃지 않은 우스운 딸이었지만 나는 늘 엄마를 생각하며 혼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것은 엄마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 여자로서 행복하지 못했던 엄마의 일생을 되짚어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씻을 수 없는 회한은 당연히 뒤따라와 좋아하시던 초밥을 한 번 밖에 못 사드린 일 하며 눈물 많은 엄마는 싫다고 왈순아지매처럼 좀 씩씩하면 안되겠냐고 들이대던 일 모두, 두고두고 가슴 아팠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은 언제나 몸살끼처럼 으슬으슬 춥고 어수선하다. 주위에서 오래 앓던 분들이 우리 엄마처럼 3월에 떠나시는 것을 종종 보았다.  3월은 그래서  봄이 온다고 기쁘기만 한 계절이 아닌 듯 하다.
어머니 떠나신 지 오래 되어 자주 잊고 살지만, 아니 잊고 사는 줄만 알았어도 살면서 새록새록 문득문득 생각나는 이런 저런 어머니의 모습, 습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기억의 언저리를 늘 맴도는 것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기억으로 존재하며 죽음도 삶에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3월, 오래 전 그날을 생각하는 시간은  여전히 코끝이 매워지는 순간이다. 3월의 쌀쌀한 바람처럼 안으로 파고 드는 슬픔이다.

8 Comments
이종균 2007.03.23 15:11  
  어느 양로원 영안실
어머님의 시체 앞에서
태연한 듯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던
까뮤의 이방인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떠오릅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슬픔은 있고
나에게도 날이 갈수록 더 깊어만 가는
아픔이 있습니다.


<어머니>
             
넷째사위
멀리 갔다 소식 들으시고
영영 저 길에 누우신 것은

청상으로
어린 육남매 키워 오신
피맺힌 뒤안길이
사랑하는 딸 앞에 놓인 것을
애통하심인 것을 알듯이

당신이 살아오신
한 많은 세월
뼈저린 고생도
이제는 책장 넘기듯 아옵니다

어머니.
강하라 2007.03.23 22:53  
  에효~ ^^  지금 잘해야한다는 생각밖에는-...
고맙습니다-
민들레 2007.03.24 12:57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면...엄마가 더 많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리운 어머니....
바다 2007.03.24 23:31  
  우리 어머니는 부활절 바로 다음 날 가셨어요.
위독하시다기에 가보니 아직도 죽지 못해 미안하구나.
 그 다음날 가실 분이 제 아들을 보시더니
" 길에서 만나도 모르겠구나 .내 강아지!"
 허리춤에 비상금을 꺼내 쥐어 주셨는데...
그 다음날 저녁무렵 가셨다고 전화를 받았어요.

 어머니...
그리운 이름
영원한 사랑의 이름입니다.
꽃구름언덕 2007.03.25 00:16  
  살아계신 울어머니도 몇년전 3월에 10분만 늦어도 돌아가실뻔 했지요.
살아는 계시지만 건강치는 않으신데 정말 후화 할일만
남을것 같아 지금부터 가슴이 저밉니다.
아는분의 아버님이 아흔을 넘기신 호상이긴 했어도 그 따님은
며칠 상주노릇에 배가 고파 어겁지급 밥을 먹다가  ㅇ문상간 지인을 보고
내가 우리 아버지가 가셨는데도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있네요.
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네요. 야속한 식욕이지만 따라 갈수 없으므로
식욕을 갖고 살아야 하니가 그런거 아닐까요?
산처녀 2007.03.26 14:57  
  누구나 격는 아픔 !
부모 발 뻩처 놓고 밥을 아귀아귀 먹더란 말 !
저도 엄마 가시면서 혹여 그 엄마가 발이 시려서
못 일어나시면 어쩔까 ? 하고 숨 지신 후에 응급실에서
한시간을 주물렀어요.
예고 되지 않은 죽음이라 우리 엄마는 ;한동안 따뜻 했어요.
염 잡술 때 그날의 엄마가 생각 나서 엄마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는 순간
얼마나 차겁던지 한참을 손이 시린 듯 했어요.
아 ! 이래서 정을 떼나보다 .
엄마는 굶는데 " 교회식으로 하니 상식을 안 올려서 엄마는 굶는데 하고
울면서도 그 멈추지 않는 허기는 정지라는 것을 모르는지 밥이 우걱우걱 들어 가더군요.
부끄러운 , 그러면서도  누구나 겪는 아픔입니다.
단암 2007.03.26 17:43  
  《어머니》

제풀에 놀란
장끼의 푸드득거림만이
적막한 대기를 흔들어 놓는
깊은 산중에
산비둘기 울음과
노루 발자국 소리 벗을 삼고
홀로만 계신 내 어머니

누워계시기가 힘들어 
허리가 아파서라도 일어나실 거라고
(관을 꽁꽁 묶어버리면 어떡해!
흙을 저렇게 다지면 안되는데...)
기다린 세월 하마 40년
 
이제는 어머니도 전설이 되셨군요
그러고 보니 아득한 옛일을
저는 매번 어제의 일로만 알았어요

잿빛 하늘에서
사납게 떨어지던 눈이
눈물에 녹아 흐르던 기억이 
그날의 바람결만큼이나 차갑게 남아
지워지지 않아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2005. 7. 28  단암댁의 아들

 13살 초입에 저는 엄마와 영원한 이별을 했습니다. 산소를 찾을 때마다 서럽고 애린한 마음에 많은 눈물 뿌렸습니다. 소용없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이 그런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노을 2007.03.27 13:17  
  이종균 선생님, 어제도 뵐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어느새 가셨는지 인사를 못드렸어요. 댓글에 담긴 시가 아픈 가족사를 느끼게 하네요. 왜 어머니라는 이름은 그렇게 늘 가슴아플까요.

강하라님, 그러세요. 잘 해드리세요. 아마 이쁜 딸노릇 잘 하실텐데요 뭐...
어젠 안보이시던데????

민들레님, 좀 있으면 길섶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겠어요. 살기 바빠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엄마 생각, 아마 누구나 같을 테지요.

바다님, 제가 어머니 생각 나게 해드렸나봐요. 당신의 생명이 위중한데도 자식 사랑은 한결같으신 모습이었군요. 어머니라는 이름은 그래서 영원하지요.

꽃구름언덕님, 위기를 넘기셨으니 오래 사실 것 같아요. 한 점 후회 없이 잘 해
드리고 싶으실테지만 맘대로 안되시지요?

산처녀님, 어제 유랑인고 산처녀님 이야기 잠깐 했답니다. 뭐라고 했냐구요?
비밀~~ 궁금하면 한 번 올라오시지요.

단암님, 세상에 안쓰러운 게 어린 상주의 모습인데 그러셨군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오네요. 단암님의 네임도 그래 만들어졌구요. 아무리 일찍 가셨어도 이리 오래 아드님과 이어지고 계시니 역시 그분은 살아계신 어머니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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