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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님의 "한판 노는 거지유"

요들 6 1518
[사람속으로] 소리꾼 장사익 “한판 노는 거지유”
 
 
해마다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는 신춘문예 당선자들. 그 면면을 보면 약관의 나이에 뽑힌 이도 있고 50이 넘어 꿈을 이룬 이도 있다. 느지막이 등단한 이를 두고 우리는 늦깎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결코 늦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꿈을 이제 이루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소리꾼 장사익(57). 그도 세속적 개념으로 보면 늦깎이다. 마흔다섯에 가수가 됐으니. 어찌보면 척박한 현실 속에서 꿈을 찾아다닌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그러나 ‘평생 노래만 할 수 있다면’ 하는 꿈은 이제 그의 생활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현실에 집착하는 끈을 놓으니 꿈이 잡히더라”고. 서울 종로구 홍지동 집에서 만난 장사익은 5월쯤에 선보일 5집 준비를 하느라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
 
 

#도시속의 섬같은 노래

집도 사람을 닮았다. 그가 사는 곳은 정형화된 아파트가 아니라 산기슭에 걸터 앉은 단독주택이었다. 허허로운 웃음으로 기자를 맞이하는 그의 생활한복은 수더분한 그의 모습처럼 편해보였다.

“지가유, 인왕산 바라보는 맛에 이곳에 살아유. 이쪽 마당 한번 구경하고 올라가세유.” 진한 충청도 사투리로 안내하는 마당 한쪽엔 풍경이 매달려 저도 집주인처럼 소리를 하고 있었다. “풍경이 울면 아, 바람이 부는구나, 잠잠하면 아, 바람이 자는구나 하고 느끼지유. 허허허.”

훤한 2층 거실에 앉아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인왕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한폭의 동양화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이곳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노래가 절로 나와유. 서울시내 살면서 하늘 보기 힘들잖아유. 다들 바쁘니 발걸음 옮기기도 정신이 없지유.” 그랬다. 서울시내에 살기는 하지만 그의 집은 장사익의 노래마당이자 외딴섬처럼 느껴졌다.

“신곡을 준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이번엔 무슨 맛을 담을 예정입니까.”

“뭐 특별한 게 있나유, 그저 우리 사는 모습이지유. 허허허.” 수더분한 겸손은 변함이 없다. 5집은 50대 후반의 인생노래로 꾸며보고 싶다고 했다. 서민들은 여전히 사는 게 어렵다는데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뜻에서 ‘희망한단’을 넣었고 황혼의 인생을 읊은 장송곡 형식의 ‘무덤’, 그리고 지나치게 기계문명에 기대는 것을 비판하는 ‘자동차’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냥 여기서(2층 거실) (녹음을) 해버릴까 해유. 녹음실의 기계를 통하면 꼭 조미료를 친 것 같아서유.”

기타 반주에 노래하다가 바람이 불면 풍경소리도 좀 들어가고 그런 게 좀더 인간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제 데뷔한 지도 10년이 넘고 ‘장사익류’라는 독특한 창법으로 노래세계에서 자리도 잡은 소리꾼. 이렇게 유명해질 줄 알았으면 진작 시작해 볼 걸 하는 아쉬움은 없었을까.

그는 대뜸 “제 이름의 사익이 한자로 뭔지 아세유”하고 되물었다. “생각 사(思)에 날개 익(翼)이에유. 생각이 날개달아 날아다니는 게 꿈이지유. 인생이 바로 그 꿈을 찾아다니는 거 아니겠시유. 허허허.”

#몸에 배어 절로 우러나는 노래

‘님은 먼곳에, 봄비 등 기존 노래도 그가 부르면 새로운 노래로 태어난다.’ 이런 평을 받는 장사익도 초등학교때는 음치였다. “초등학교때 선생님께서 노래부르라고 하면 책 읽듯 했지유.” 그런 그가 어떻게 노래의 꿈을 갖게 됐을까.

장사익이 초등학교때 관심가진 것은 웅변이었다. 5학년때부터 중3때까지 5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에 올라가 목청을 높였다. 그때 소리가 ‘터진’ 것이다. 당시엔 노래를 흥얼거렸지만 가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새 노래의 싹은 자라고 있었다.

군에 입대해서도 노래솜씨 덕에 문화선전대로 배치받았다. 1972년 제대후 직장생활을 했지만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가슴 한구석에선 흥얼거림이 흘러나오고 ‘이게 아닌데’ 싶었다. 보험회사, 무역회사를 다녀봤지만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가구점 총무를 보기도 하고 독서실을 운영해 보기도 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 와중에 노래를 배우기 위해 낙원동 음악학원에도 3년이나 다녔다. 90년에는 카센터에서 일을 보기도 했다. 반백수처럼 지내기를 3년. 그는 마침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현실’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딱 3년만 죽도록 해보자 싶었어유. 93년부터 김덕수패를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불었지유.” 그동안 쌓은 내공이 터져나왔다. 93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태평소 연주)으로 장원, 94년 다시 ‘금산농악’(태평소 연주)으로 장원을 차지했다. 94년 사물놀이팀 ‘노름마치’에서 태평소를 불 당시 평소 흥얼거리던 것이 노래가 되어 나왔다. 그해 11월 서울 신촌에서 소리꾼으로 첫 공연을 가졌다. 태평소가 노래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작곡이란 게 따로 필요없었다. 수백번 수천번 읊조리다보면 절로 노래가 되었다. 거기에 피아노와 기타 반주가 붙었다. 반주도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가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가는 식이다.

장사익과 국악의 인연은 아주 깊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이미 농악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소문난 장구재비였다. 어릴 적부터 농악가락을 듣고 자란 그는 유달리 태평소의 소리가 좋았다고 했다. 80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국악에 입문해 피리도 불고 태평소를 익혔다. 93년 ‘서태지와 아이들’ 라이브공연때 ‘하여가’의 태평소 연주를 맡은 것도 장사익이었다.

고교(선린상고) 졸업후 무려 열댓가지의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장사익. 되돌아보면 독특한 창법을 가진 소리꾼 장사익은 지독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생활한복 혹은 질그릇 같은 노래

국악을 바탕으로 30여년 무르익은 그의 노래는 특정 장르로 묶기가 애매하다. 그래서 장사익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노래에 대해 ‘장사익류’라고 했다. 국악이기도 하고 국악이 아니기도 하고, 가요이기도 하고 가요가 아니기도 하고(그래서 그에겐 가수보다 소리꾼이 더 어울린다). 그러나 분명 우리 가락이다. 그의 가락은 발라드도, 트로트도, 포크송도 아닌 말 그대로 한국노래다. 그러면서 록과도 어울리고 재즈와도 호흡을 맞추는 가락이다. 그것은 그의 노래에 격식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 싶다. 그만큼 자연발생적이다. 예전 우리네 농부들이 논밭에서 흥얼거리던 그 가락을 잇고 있다. 민요가락의 현대적 되새김질, 그것이 장사익의 노래다.

판을 벌이면 자리를 꽉 메우는 소리꾼 장사익. 그러나 그에겐 최고란 개념은 없는 듯했다. 아득바득 애써 1등을 하기보다 같이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그 모습은 농부를 닮았다. 농부는 1등을 하고자 애쓰지 않는다. 농부는 그저 땅을 사랑할 뿐이다. 1등만이 살아남는다고 다그치는 오늘날,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장사익에게서 한발짝 비켜 서 있는 여유를 느끼는 것 아닐까.

우리들은 매일 매끈한 사기그릇 혹은 깔끔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으론 투박한 질그릇을 그리워 한다. 장사익은 그런 질그릇과 같은 맛을 지닌 가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는지

 


*경향신문 2006년 2월 6일자 조간에서 퍼다가  내마노의 찍사?쟁이  유랑인님의 까페  http://cafe.naver.com/roversgallery 에 옮겼던 글을 이리로 또 퍼 왔습니다.
궁금증이 조금이라도 해소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6 Comments
대관령 2007.05.04 20:34  
  네~! 요들님의 깊은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장사익님의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가르쳐 주신되로 들어보고 배워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등거북 2007.05.05 11:48  
  장사익님이 이리도 유명한 분인데, 나는 작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다른 공연과 함께 나와서 독창하는 것을 좀 부끄럽지만 tv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턱수룩한 얼굴에 한복을 입고 노래를 하는데, 창법에 있어 내심 놀랐습니다. 이것은 국악 창도 하니고 그렇다고 가곡도 아니고 민요조도 아니고 현대시를 곡조(즉흥?)를 붙여 부르는데 아주 새로움에 매료되었었습니다.

내가 이전에 보지 못한 창법이었습니다. 좋게 보아 한국적 국적이 있는 노래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읽으니 늦깎이이지만 데뷔도 화려하고 각지로 다니며 그의 독특한 창법의 음악을 펼쳐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개척한 이 음악 예술을 펼치기 위해서 그의 후생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요들님이 알게 해준 데에 대해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렇게 유익한 일을 해 준 또 한 분 유랑인 님께도 감사합니다.
대관령 2007.05.05 12:28  
  클레식한 분께서  장상익님의 찔레꽃을 부르시는데....
독특한 창법과 애한이 깊이 서려있는듯 무언가 뭉클한 느낌의 감동을
받고 배워보고싶어 글을 올려습니다.
저역시 요들님,정문종님,유랑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민수욱 2007.05.05 14:57  
  장사익님의 노래는 찔레꽃으로 처음 알게 되었답니다.
제가 아는 지인의차를 타면 꼭 장사익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어요
ㅎㅎ
처음 들으면서 다르다 라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요 꼭 시골의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나서 부르는 옆집아저씨 같으신분..^^
대관령 2007.05.05 15:53  
  정문종님께서 올려주신 동영상을 들어보니 혼성합창곡으로 불려도 좋겠다 싶으네요 솔로와 뒤에서 받쳐주는 코로스를 접목하면 아주 좋은 합창곡이 될것 같습니다.음악의,,,, 문워한 저의 생각이였습니다.^^
정문종 2007.05.06 18:10  
  아~ '가입인사'에서 물어 보셨군요,,, 자유게시판에선 '질문' 글이 없어서 한참 헤맸습니다 *^^* 반갑습니다,,, 원하시는 노래가 있어서 참 다행 이네요 ~ 들을수록 깊이가 있네요,,, 4부 합창으로도 손색이 없겠더군요,,, 반주는 국악과 협연해도 좋을것 같고요,,, 우리나라의 정서인 '한(恨)'이 베어있는 노래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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