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연주.감상후기, 등업요청, 질문, 제안, 유머, 창작 노랫말, 공연초대와 일상적 이야기 등 주제와 형식,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회원문단은 자유게시판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목행리 교회와 아버지

barokaki 7 904
목행동, 반듯한 집들과, 윤이 나는 포도鋪道와 가로수 우거진 사택으로 오르는 언덕 중턱에는 교회가 한 채 서 있었다. 교회는 뒤 쪽으로 나지막한 절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주위에는 아카시아 나무와 싸리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절벽 위로는 황토 길이 나 있었는데, 그 길은 내가 학교 가는 길이었다. 그 황토 길 옆으로는 콩 밭이 연이어 있었고, 복숭아 과수원이 아주 작게 언덕 옆으로 비스듬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과수원 담장, 철사 줄로 엮은 담장에 서서 보면 강물이 보였고, 강물너머 작게 이어진 길들이, 겹쳐지는 산들의 선들과 잇대어 그리움 같은 것을 자아내곤 했었다. 대부분 하늘은 흰 구름과 사이좋게 놀았다. 강가에는 미루나무가 열병식閱兵式을 치르고 나무 꼭대기로는 작은 새 무리들이 흩어졌다간 모이고 하는 모양이 마치 손바닥을 펴 색종이 조각을 흩뿌리는 것 같았다. 비록 낮은 언덕이었지만 이 울타리에 서 있으면 목행동 집들의 지붕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복숭아밭을 지나면 그곳이 학교였다. 역시 붉은 흙 길을 따라 학교 담장 옆으로 돌면 또 다른 동네(미륵리)가 펼쳐져 있었고, 동네 가운데로는 개천이 흘렀다. 그 콩밭과 복숭아 과수원 아래로 몇 채의 집들이 낮게 깔리고 보리밭과 신작로를 따라 철길이 나 있었다. 철길.... 건널목의 땡땡거리는 종소리.... 이발소, 선술집, 구멍가게, 가게 앞마당에 서 있던 버드나무. 그리고 저녁마다 울려 퍼지던 교회의 종소리. 그러나 그 종소리가 나중에는 확성기소리로 바뀌어 버렸는데, 그 때부터 이 동네는 조락凋落의 기운이 엿 보이기 시작했다. 석양이 강물을 서서히 붉게 물들이고 강 건너 산들이 밤 속으로 가라앉을 즈음이면 교회의 첨탑에도 새들이 날아와 앉았다. 무덤의 금잔디위로 노란 아카시아의 잎들이 바람에 날리는 이 때가 되면 아버지는 화분을 방안에 들이셨다.
“ 경보야. 가서 막걸리 한 되 받아 오니라.”
내가 심부름 가던 철길 너머의 선술집에는 술독을 땅에 묻어 놓고 있었다. 그 집에는 언제나 시큼한 술 내음이 번져 나왔다. 한 번은 그 집 주모가 “요새 왜 너의 아버지 안 오시는가 물어 봐라.” 했지만 난 전하지 않았다. 막걸리 집 옆에는 이발소가 있었다. 그 곳에서는 비누냄새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퍼져 나갔는데, 비료공장에서 새어나온 기름과 섞이어 묘한 색취를 풍기곤 했었다.
“너 오다가 마셨구나.”
아버지는 주전자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나에게 말했었다. 그리곤 웃으셨다. 그 때가 아버지에게는 좋은 시절이었다. 자식들이 세상을 알기에는 너무나 먼 세월이었고, 아버지 역시 세상의 시련을 겪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세월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이 때가 가장 살갑다고 할 수 있는데, 나중에 서울로 이사를 하고 여러 가지 실패를 거듭한 나머지 아버지는 나에게서 좋은 기억을 하나 씩 하나 씩 거두어 가셨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아버지는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툇마루에 앉으면 그 교회의 모난 첨탑이 보였는데, 아버지가 퇴근 하는 그 무렵에는 어김없이 새들이 잠자리를 찾느라 탑 주위로 분주하게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아버지도 그렇지만 나 역시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카시아로 둘러싸인 교회의 마당은 나의 놀이터로 부족함이 없었다. 글자를 처음 배우던 그 때, 땅에 글자로 된 홈을 파고 흙을 덮은 후 친구들끼리 감춰진 글자 찾기 같은 놀이를 하고 놀았다. 조금 더 크고 난 후에는 ‘오징어’ ‘8자’ 등의 놀이를 했는데 그때는 이미 사택으로 이사 간 후였다. 가끔 ‘여름성경학교’ 나 크리스마스 때에는 교회 안에도 들어가기도 했었는데, 특히 ‘여름성경학교’ 때에 여선생님이 들려주던 동화(움직이는 동화책)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과자로 된 성. 유리 구두 등. 그러나 몇 해 전 다시 그곳에 가보았을 때, 내가 살던 그 집은 헐리어 배추밭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나는 당시의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가 들었다. 당시 30대 중반이셨던 아버지는 칠순을 훨씬 넘기고 80을 바라보고 계신다. 세월이 무엇인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게 많아진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몇 일전 아버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지금은 부천에 가 계시지만 한 동안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셨는데, 그때 두고 가신 당신 물건에 대한 정리를 부탁하신 것이다. 이건 저렇게 하고 ... 등등...
“그러나 나 죽고 나면 다 버려도 좋다.”
10월이 가고 겨울이 오면 내가 살던 그 집터에도 눈이 쌓이겠지. 세월은 기억을 새긴다고 하지만 겨울의 세월은 기억을 덮는다. 나뭇잎이 산길을 덮듯이. 




7 Comments
임승천 2004.10.29 14:32  
  너무나 좋은 글입니다.체험과 감상 , 그리고 세심한 깊이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눈이 되어 쌓이겠지요. 세월은 지나간 시간을 덮고 있지만 아름다운 추억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가슴 속에서 영원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자 연 2004.10.30 01:27  
  하늘에 영광은 땅의 찬송으로 마냥 웃고
주님 사랑은 베품으로 사하여 미소맑다...

멀리서 들리는 바람소리도 기도하는 가을...

아 ! 꿈처럼 고운 생시처럼 갈구하는 믿음
울 주름진 아버님 소망 처럼 따뜻했으면 좋겠네...
나비 2004.10.30 14:10  
  빛바랜 오래된 흑백사진을 봅니다! 정겨움과 그리움이 가득한...
어릴적 저도 목행 달래강을 건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땐 그강물이 왜 그리 깊고도 푸르게만 느껴졌는지...
강변 땅콩밭에서 먹던 생땅콩이 참 고소하면서도 비렸었는데...
어쨋든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입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예쁜 가을단풍 책갈피에 곱게 끼워
보내 드리고픈 마음입니다!감사!^^
서들비 2004.10.31 09:39  
  오랜만에 뵙네요.
누구나의 가슴에 하나쯤은 묻어둔
그리움의 조각들을 들추어내게하는 고운글 고맙습니다.
2004.10.31 14:30  
  에그머니나!
제가 지금사는곳이 목행동 입니다
다니는 교회는 목행감리교회..
너무 반가워서 할말을 잊었네요~
이곳으로 이사온지 12년 됬는데..
이런곳에서 님을 만날줄이야...좋은세상이죠?
다시한번 반갑다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가곡을 찿다가 우연히 이곳을 알게되어서 자주들립니다
자주 뵐수있기를 희망하면서..!
barokaki 2004.11.01 08:54  
  목행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많은 분들이 가지고 있을 줄을...
72년도지요. 제가 떠나온 해가... 당시 중학생이었고....
목행동의 모습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지요.
저는 매년 몇 차례 그곳에 갑니다. 아직 친구들도 살고 있고,
국민학교 체육대회도  이맘때쯤이면 열리고 해서요.
그 교회.. 감리교회도 지금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변하기 전의 목행리이기는 하지만요.
2004.11.01 10:21  
  혹시 목행초등학교 졸업하셨나요?
그렇다면 울아들 딸 대 선배시겠어요~ㅎㅎ
환영합니다
고향그리운날 목행동으로 오세요!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