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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숨결은

이종균 9 1473
신사임당의 숨결은
      (대관령)

  해마다 몇 번씩은 스쳐 지나던 대관령(大關嶺), 이 거대한 고개를 한번 걸어서 넘어보리라 벼르러 왔다.

  「높이 832미터, 총연장 13킬로, 아흔아홉 구비, 예로부터 태백산맥을 넘어 영동과 영서를 잇는 관문이었다.
  이 일대는 황병산 선자령 발왕산에 둘러싸인 고평탄면이며, 이를 분수령으로 동으론 오십천이 동해로 흐르고 서쪽에선 송천이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연 평균기온이 섭씨 6.1도 봄 가을이 짧고 여름이 서늘하며 겨울에 적설량이 많다. 고랭지채소 홉 씨감자의 산지로 유명하며 소 양 등을 사육하는 목장이 있다. 북서쪽 산록에는 남한 최대의 대관령 스키장이 있다.
  현재 영동고속도로변에 대관령휴게소가 있어 영서지방으로 향하는 차량과 여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휴게소 옆에는 고속도로준공기념비가 있다.」
  컴퓨터인터넷백과사전 등에 뜬 대관령의 설명을 합성해본 것이다.
  한 편의 시를 감상하듯 대관령의 이미지가 꿈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관심을 기우려 찬찬이 생각해보니 모순덩어리이다.

  우선 높이 832미터가, 고속도로준공기념비 옆 이정표에는 865미터로 되어 있으니 이 높이가 도로면인지 옛 고개 높이인지 확실치 않고,
  둘째로 예로부터 태백산맥을 넘는 고개였다 했는데,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산경표에 의거 산줄기를 헤아렸으니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라 해야 옳으며,
  셋째 이 고개 동쪽으로 오십천이 흐른다했는데 오십천은 백병산(1,259m)에서 발원하여 삼척으로 흐르니 남대천과 섞바뀌지 않았나 싶다. 
  넷째는 이 고개 북서쪽 산록에 남한 최대의 대관령스키장이 있다고 했는데, 1975년 용평스키장이 개장되기 이전에 30분을 걸어 올라가 30초간 타고 내렸다던 옛 스키장이 있었을 뿐 현재는 스키장이 없으며,
  다섯째로 영동고속도로변에 대관령휴게소가 있어 영서지방으로 향하는 차량과 여객들의 편의를 도모한다 하였는데, 새로운 고속도로가 능경봉 남쪽을 돌아나며 폐쇄되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이 백과사전이라는 믿음, 최신정보를 빠르게 전달하는 것이 컴퓨터라는 인식이 무참하게 무너진다.

  어쨌든 이 고개엔 얽힌 전설과 설화가 많다. 그 가운데서도 율곡 이이(栗谷 李珥)선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으뜸인 듯하다.
  율곡은 13살 때 진사초시에 합격한 이래 29살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기까지 9번을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칭송되었을 뿐 아니라 처음 호조좌랑에 임명된 뒤, 양관대제학 이 형 병조판서와 우참찬을 역임하고 49세로 짧은 생을 마치는 동안 실로 큰 업적을 남겼으니 동서분당을 조정하고, 대동법과 사창제, 그리고 10만 양병론을 주장하여 시쳇말로 하자면 화합과 민생 그리고 국방의 이념을 실현코자 노력하신 분이다.

  율곡의 고향인 파주시와 탄생지인 강릉시 그리고 잉태지인 평창군에 각각 비슷한 내용의 전설들이 전하는데 내용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율곡의 부친 이원수(李元秀)공이 강릉 찰방(察防)으로 있을 때 신사임당(申師任堂)과 결혼하여, 10년 동안 이공은 한양에서 공부를 하고 사임당은 친정에서 그림공부를 하기로 약속하고 별거를 한다.
  이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재직할 때 강릉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봉평에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부부가 거기서 상봉하곤 했는데 어느 날 이공이 봉평으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주막에 여장을 풀었다.
  주모가 그날 낮잠을 자다 큰 용이 가슴으로 안겨오는 태몽을 꾸었는지라  판관이 자는 방에 들어가 하룻밤 정을 나누기를 간청했다.
  이공이 크게 꾸짖어 물리치고 봉평으로 갔는데, 한편 오죽헌의 사임당도 똑같은 태몽을 꾸고 남편을 만나기 위해 봉평으로 왔다.
  그렇게 해서 율곡은 잉태되고 오죽헌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 그의 어릴 때 이름이 현용이었다.

  영동고속국도 장평 IC에 진입하며 우회전하여 2킬로를 가면 백옥포3리 국도변에 사연을 새긴 판관대란 기념비가 있는데 이곳이 율곡이 잉태된 곳이며, 여기서 2,6킬로를 더 가면 평촌리에 율곡의 잉태를 기리는 사당 봉산서재(蓬山書齋)가 있다.
  이공이 임지로 돌아가며 그 주막에서 또 하룻밤을 묵는다. 주모는 예와 달리 쇤네 비록 배운바 없으나 사람의 기색은 살피는데 손님은 귀자를 얻게 되나 인시(寅時)에 태어나 장차 호환을 당할 것이니 이를 막기 위해서는 밤나무 천주를 심어 가꾸라한다.  판관은 고향에 즉시 밤나무를 심었다.
  율곡이 5살이 되던 해 백호가 둔갑한 노승이 찾아왔다. 판관이 눈치 채고 내 이미 밤나무 천주를 심어 덕을 쌓았거늘 어찌하여 아이를 해치려하느냐고 호령하니 노승은 그럼 밤나무를 확인해보자 한다.
  그래서 세어보니 1주가 모자라는데 옆에 있던 도토리나무 같은 것이 ‘나도 밤나무요’ 하고 나서며 그 옆에 있는 나무에게 ‘너도 밤나무다’고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해서 나도밤나무와 너도밤나무 그리고 파주에 율곡리란 지명이 생기고 율곡이란 호를 쓰게 된 것이라 한다.

  우리 가족은 용평콘도에서 일박한 뒤 아이들은 스키장에 나가고 나는 모처럼 동행한 아내를 혼자 남겨둔 채 강릉으로 갔다.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대관령휴양림 입구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섣달그믐이라 그런지 귀성차량들의 질주가 살벌해도 길가에 도열하듯 우거진 아름드리 노송들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은 충분히 상쾌하다.
  해발 600미터지점을 넘어 오르니 ‘대관령 옛길’이란 돌비가 있고, 그 옆에 교산 허균선생이 닷새 동안 잔도(棧道)를 탔다는 앙증한 시비가 있다.
  바로 그 지척 암벽에 ‘준공기념’이란 음각이 있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1917년에 이천 강릉길 대관령구간의 준공을 기념하여 새긴 것이라 한다.
  그러나 대관령 길 최초 개설자는 조선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인 고형산(高荊山)이라는데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주문진에 상륙한 청나라 군사가 이 길을 따라 한양을 침범했다하여 부관참시를 당했다 전해진다.

  어느새 신사임당의 사친시비에 이르렀다. 참으로 오랜 세월,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감회와 슬픔과 한이 서렸거늘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글을 몰라 쓰지 못했을 뿐, 사실을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기릴 게 없을 신사임당의 숨결, 칠언절구 한 편이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慈親鶴髮在臨瀛 ; 늙으신 어머님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 ;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 ;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 ; 흰 구름만 저문 산에 날아 내리네.

  대관령휴양림에서 강릉시청이 세운 ‘大關嶺’이란 육중한 돌비석까지 11킬로, 여기서 횡계를 지나 용평콘도까지 또 11킬로, 도합 22킬로를 걸었다.
  딱딱한 아스팔트길을 걷노라 양 허벅지가 뻐근해도 마음속에 작은 소망하나 실천했다는 뿌듯함이 차오른다.
9 Comments
산처녀 2007.02.24 13:47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대단 하심에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번 신사임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옛날에 어찌 남편과 시댁을 한양에 두고
친정 어머니를 위해서 10년 씩이나 친정 살이를 했을까
의문이 였습니다.
지금 선생님의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체말로 외조가 있었군요. 그 옛날 법도를 심히 따질 때에
아녀자에게는 파격적이었군요 . 아마 지금도
시비를 걸려면 출문을 당할정도 입니다 ㅎㅎㅎ
잘 보았습니다.
sarah* 2007.02.24 22:55  
  ..길지 않은 구간이겠지만.. 글과 그림에 모두 조예 깊었던 신사임당이
 오백여년 전 낭군상봉의 기쁨을 품고 걸었을 대관령 옛길을..
꼭 한 번 걸어보고 싶어집니다
김형준 2007.02.24 23:27  
  이선생님,
늘 열심히 읽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글은 이전의 글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에 오르시는 장면으로
바로 들어가시거나 그 산이나 산이 위치한 곳에
얽힌 고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시지 않고
대관령에 관한 이야기도 자세하게 하시고,
가족에 대한 것도 언급이 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율곡'이란 호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군요.
'밤나무 율',
제가 늘 존경하고 마음 속으로 가까이 생각하는
이이선생님의 호가 그렇게 생겨났군요.
아홉 번을 장원하셨다니
정말 뛰어나 인재이셨군요.

신사임당과 그분의 남편이신 이원수공에 관한
이야기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늘 공부가 되고 도전이 됩니다.
역사를 사랑하면서도
역사 공부를 현재 시작하지 못 하는
이 학생에게 조금씩이나마
배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지난 번 것과 같은 것 또 없어요? (^_^)
저.....
약속 지켰답니다.
'쪽쪽쪽' (음...  감미로운 키스 소리)
정우동 2007.02.25 02:25  
  貞夫人安東張氏의 시에도
병든 학발노친이 부여잡는 옷소매를 자르고
변방으로 군역 떠나는 아들을 읊은 애닲은 鶴髮 三章이 있었습니다.

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산맥과는 다르다고 생각되는
회장님께서 말하는 대간 지맥등을 포함하는 산경표(도)를 여쭙니다.
이종균 2007.02.25 09:57  
  산처녀 선생님

이원수 부부의 별거는
남편의 인격과 학문의 도야를 배려한 사임당의 제의였습니다.

이공이 약속을 하고 서울로 가다가
대관령 마루에서 참아 더 가지 못하고 되돌아 섰지요.

사임당은 방문을 열어주지 않고 자기 머리카락을 베어주며
앞으로 10년 약속을 지키지않으면 아주 자기 목을 베어 약속을 지키겠다 했으니
이공이 후에 사헌부 감찰까지 오른 것은
어쩌면 내조의 힘이 아닐륹지요...

사라 선생님!

산행은 보통 오름 반, 내림 반 이지요,
그런데 강릉시내에서 대관령에 이르는 11km는 계속 오름길,
대관령에서 횡계를 거쳐 용평스키장에 이르는 11km는 평지,

여긴 흙도 낙엽도 눈도 없는 딱딱한 아스팔트여서
일반 산행보다 훨씬 힘들더군요...



이종균 2007.02.25 10:26  
  김박사님!

율곡 이야기는 그냥 흥미로운 전설일 뿐 입니다.
더러 사실(史實)무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지난번거 보다 더 좋은 것, 별송합니다.
참고하십시오...  ^-^  ^-^ ㅎㅎㅋㅋ

정우동 선생님!

지리 지도상 산맥의 개념을 사용한 건,
일제가 우리 지형도를 제작하면서라 알고 있습니다.

그 이전 우리 조상들은 산의 족보와 다름없는 산경표에 의거
산줄기의 흐름을 파악했지요.
그에 의하면 대간 정간 정맥 등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백과사전 등에서 "예로부터 태백산맥 운운"의 표현은
문맥상 일제 이전이란 개념이 깔려 있기 때문에
"예"자가 들어갈려면 태백산맥을 백두대간이라 해야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참고도서 ;태백산맥은 없다(조석필 지음)
                  한글 산경표(현진상 옮기고 씀) 그외

격려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김형준 2007.02.25 20:25  
  이선생님,
정말 잘 보았습니다.
너무나 환상적이고 아름다왔습니다.
(음... 뽀뽀뽀!!)
열이 너무나서 죽겠네요. (^)^) ****** ㅠㅠ
김형준 2007.02.26 11:16  
  신사임당은 정말 독특한 여성이었다.
자신의 시대를 훨씬 뛰어 넘은 그런 사람,
황진이와 더불어 오랫동안 기억될 그런 여성.

페미니즘(feminism)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좋은 모델이 되겠지만
어느 누가 보아도 귀감이 되고,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큰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큰 벼슬을 한 남편보다 훨씬 더 인지도가 높은 여성,
아들 이이와 더불어 우리 역사상에
길이 남고, 후세의 많은 이들에게 좋은 배움을 주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
노을 2007.02.27 10:32  
  인터넷의 정보나 백과사전이, 소위 말하는 업그레이드를
부지런히 하지 못한 탓에 선생님 사전 준비 과정에서
그만 책을 잡히고 말았군요.
선생님께서 대관령을 기필코 걸어 넘어보리라 하신
그 심중이 충분히 공감 됩니다.
전에 섬진강변을 걸어서 가고 싶었는데
웬 차들이 간단없이 그리도 쌩쌩 달리던지
무서워서 버스를 타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산천초목을 걸어서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제 마음속에 있지만 저는 산행 한 번 그럴 듯 하게
못해본 사람이라 그저 마음뿐이지요.
딱딱한 아스팔트길이나마 소망 한 가지 푸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지금 우리 정치 현실에 율곡 같은 이가 다시 오신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면서 신사임당 같은 어머니가 없어
율곡 같은 이를 찾을 수 없을까? 하는 엉뚱한 추정도
해보게 되는군요.
간접적으로나마 늘 산을 체험하게 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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