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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의 지붕 (몽블랑)

이종균 2 1743
9-7. 알프스의 지붕 몽블랑(Mont Blanc)

  꿈에 그리던 알프스의 길에 오른다. 꿈이 아니라 젊은 시절 실제 몇 번씩 계획을 세우고 시도 했지만 일터에 얽매인 몸이라 뜻대로 되지 않아 미루고 미루어 왔던 먼 길을 이제 고희를 넘어 찾아가는 것이다.
  내가 휴양하던 북해 네쓰메어지일(Nessmersiel)에서 1.700킬로를 하루에 달리지 못해 남서부 바일 암 라인(Weil Am Rhein)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 고을 고속도로 나 들목 남쪽이 바로 스위스이며 서쪽으로 인접한 라인 강을 건너면 프랑스인 국경도시다.
  스위스 국경을 넘는데 베레모를 눌러쓴 아가씨가 통행세를 받는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통행세를 받는 나라, 유로화를 안 쓰는 나라가 바로 세계에서 국민소득이 제일 높은 스위스이니 부자가 더 인색한가 보다.
  베른을 넘어서니 고도계가 해발 500미터를 넘어서드니 순식간에 훌쩍 800미터대로 뛰어 오른다. 이제 알프스지대로 들어가는가 보다.
  파란 초원위의 주택들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니 아름다운 그림을 사실 같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500~800미터의 높이면 우리나라의 강원도 정도인데 우리는 왜 저렇게 아름답게 꾸미지 못할까.
  로잔(Lausanne)에 이르니 반달모양의 바다 같은 호수(Lac L'eman)가 눈앞에 펼쳐진다. 호수의 서쪽 끝이 바로 즈네브(Geneve)요, 남쪽 건너편이 프랑스령인데 이름 모를 알프스의 영봉들을 구름이 스쳐간다.
  지도상의 축척으로야 저 산 넘어 60킬로면 목표점인 샤모니 몽블랑(Chamonix Mont-Blanc)이건만 저 우람한 뫼를 어찌 넘으랴. 수많은 터널을 지나고 높은 재를 넘고 넘어 드디어 샤모니에 도착했다. 
  책으로만 읽던 샤모니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계곡이 아니라 세계의 문화를 한곳에 아우른 개방된 대도시였다.
  호텔, 식당, 귀중품 상가, 기념품 가게 등이 즐비하고 비교적 넓지 않은 도로는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 등산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흰 산이란 뜻의 몽블랑(4810m)은 카프카즈(Kavkaz)산맥의 엘부르스(Elbrus Mt.;5.642m)산이 더 높기 때문에 알프스의 최고봉인 것을 유럽의 최고봉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알프스의 지붕인 이 몽블랑은 이렇게 해서 정복되었다.
 샤모니를 방문하여 몽블랑의 우람한 모습을 본 20세의 젊은 과학자 소쉬르는 1760년 몽블랑을 오르기 위해 먼저 샤모니 계곡 북쪽에 있는 브레방(La Brevent;2525m)을 올라 몽블랑 을 살핀 후 등정의 가능성을 확신한다. 그리고 몇 차례 등정을 시도 했지만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등정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몽블랑등정에 많은 상금을 건다.
  1786년 6월 상금을 타기 위해 여기 올랐던 수정 탐굴자 쟉 발마(Jacques  Balmat)가 1차 등정에 실패한 뒤 어린 딸이 병에 걸려 의사 미셸 팍카드 (Michel Gabriel Paccard)를 찾는다. 이때 29살의 젊은 의사는 몽블랑에 같이 오를 것을 제안한다.
  그래서 그해 여름 다시 오르게 되는데 설맹 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팍카드의 손을 이끌고 8월 8일 18시 23분에 정상을 밟은 쟉 발마는 극도로 지친 몸으로 내려왔을 때, 사랑하는 어린 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 10년 뒤 의사 팍카드는 쟉 발마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남매간이 되었으니 그들은 필시 전생에 어떤 인연을 타고 나왔나보다.
  몽블랑이 정복된 그 이듬해인 1787년 8월 2일 이미 48세의 장년이 된 소쉬르는 쟉 발마의 안내를 받아 몽블랑의 정상에 올라 자연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를 만든다.
  오를 수 없다던 흰 산 몽블랑을 오른 등반선구자들의 발길을 등반사는 알피니즘의 태동이라 하였으나, 초등자 미셀 박카드와 쟉 발마는 현상금이 목적이었고 또 소쉬르는 자연 과학자로써 빙하연구가 목적이었음으로 그 많은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는 순수 알피니즘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샤모니 몽블랑 광장에서 구름이 없는 날이면 몽블랑의 정수리가 육안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수리 북서쪽에 연해있는 Dome du Gouter(4.304m)봉을 정수리로 착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서쪽으로 약간 비킨 몽블랑의 정수리가 어찌 보면 더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쉬르와 쟉 발마 그리고 팍카드의 동상이 이 광장에서 보송 빙하 너머 몽브랑의 정수리를 아련히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해발 1천여 미터지점인 Chamonix Sud에서 케이블카를 탔다. 고도 2.309미터 지점인 Plan de I'Aiguille를 지나니 수직으로 치솟아 승객들의 비명이 일시에 터진다.
  3,842미터의 Aiguille du Midi에선 4인승 곤돌라로 바꿔 탄다. 드넓은 만년설지대를 건너 이탈리아 국경지대 토리노 대피소(Ref. Torino;3322m)로 가는데 삼삼오오 떼를 지어 걸어가는 등반대가 내려다보인다.
  성난 사자의 아가리처럼 쩍쩍 벌어진 크레바스지대 등반 객 5명중 2명이 누워있고, 순식간에 날아온 헬기가 조난자를 싣고 떠난다. 무성영화처럼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인데도 탐험 심에 불타는 젊은이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던들 봇물처럼 밀려드는 세계의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이 케이블카도 없었을 것이다.
  토리노 대피소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5킬로면 분명 몽블랑 이련만, 알프스에서 보기 드문 청명한 날씨라는데도 계속 밀려드는 구름에 가려 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정녕 그 얼굴이 하느님을 닮아서일까...
  대피소 옥상 벽에 새겨진 예수님의 십자가고상이 더욱 성스러워 보인다. 이 높이쯤이면 하늘나라 일진데 왜 여기에서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하는지 모를 일이다.
  대피소 바로 동쪽 쟌(Dent du Geant;4013m)봉 기슭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여 타쿨(Tacul)을 거쳐 몽탄베르(du Montenvers)에 이르는 약 3천 미터의 표고차를 11킬로 흐르는 거대한 빙해(氷海)는 프랑스에서 제일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내려오는 길, 미디 환승역(3842m)에서부터 나는 걸어서 내려오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샤모니의 고도가 약 1천 미터이니 2천 8백 미터의 높이만 내려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인 천사 같은 어린 손녀들 “할아버지 절대 안 돼요!”하며 붙들고 울먹이는 표정이 아내보다 더 심각하였으니 여린 가슴들의 온기가 늙은 할아비의 얼음가슴을 녹인 것인가?
  사실은 관광객이 밀려 아침 출발이 늦은데다 거센 바람으로 케이블카가 한참씩 머물러 시간이 지체된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2 Comments
바 위 2006.10.29 20:30  
  고맙습니다 ~ !

잘 보고 배웁니다...

늘 처럼

건안하셔서

후학들에 희망주소서 ,,,
장미숙 2006.10.30 12:22  
  선생님의 글을 보고 넘기기 아까워서 딸에게도 보내주고 있어요.
공부하는 사이사이 가이드 일도 해 보는 모양이던데
많은 참고가 되겠다 싶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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