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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가로 가는 길

barokaki 5 905



샘 가로 가는 길


그 길은 달개비 풀이 무성한 샘물이 있는 곳까지 잔잔하게 이어져 있었다.

샘물은 야산의 능선이 아래로 흐르다 문득 멈춰선 지점에

" 나, 여기 있어요."

하는 듯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그 샘물을 마셔보진 않았는데

샘물 바로 아래로 연결되는 샘의 수로가

온통 짓 푸른 풀들로 우거져 있어 보이지 않는데다가

햇빛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어

권태로움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부근의 풍경은 참으로 고요하고 서정미 넘쳐,

어느 날 홀로 걷기도 하였지만 아이들과 재잘거리며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샘으로 가는 길은 보드랍고 포근한 연한 황갈색의 평화스러운 길인데,

길가로는 작은 풀들이 오송송한 꽃잎들을 달고는 언제나 가냘프게 바람에 떨고 있었고,

듬성듬성 서 있는 조금 더 키가 큰 노란 꽃을 매단 야생화는 제법

어린이다운 장난기 있는 정직한 자태로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뽐내며 서 있었다.

그 길로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닐고 거닐었다.

아직도 그 길에는 봄이 한창이어서 어디를 막론하고

화사한 봄기운이, 그러나 아득한 추억을 머금으면서,

요염하고도 정숙한 자태를 자아내고 있을 터였다.

산기슭, 언덕 너머 보이는 야산, 그리고 낮은 골짜기로

이어져 있는 논--. 들---.

손에 잡힐 듯 드리워져 있는 아카시아 나무의 거칠면서도 가녀린 가지와

그 사이에 수줍게 자리한 한 그루의 노란 산수유,

이런 곳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내다 버린 철제 캐비넷마저도

- 쓰레기장에 버려졌다면 추하고 더러웠을 형상과 녹들마저도-

어떤 아득한 향수마저 자아내는 것이니

그 또한 우수 머금은 눈동자로 정감을 품고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지라, 옅은 주기(酒氣)에라도 들라치면

언제라도 달려가고픈 심정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풍경과, 지난 해 아내와 아이들과 나물 캐던

그 들판이 또 이 산수유가 바라보는 골짜기 옆으로

연이어져 있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대기와 봄 들판에

아이들의 소곤거리는 모습이 겹쳐질 때는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폭' 하고 새 나오고 마는.

새벽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산 향기와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연푸른 안개가,

책상머리에 달라붙어 끙끙 앓던

치열한 밤의 피로를 어느 결에 기억도 없이 지워주던,

푸르스름한 간지의 얇은 막이 깔려 있던 그 길과,

그 길의 두어 걸음 뒤로 성큼 다가서던 커다란 나무들.


그리고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 목행리 밤길을 걸은 기억이 떠올라, 그날 밤은

너무도 달이 밝아, 발 아래의 모래까지도 훤히 비춰 보였는데,

그 길은 옅은 황색의 비단 같은 고운 길이었다.

요즘처럼 진달래라도 핀 봄밤엔, 진달래 달빛 속에

일렁이는 꽃 그림자를 벗으로 삼아

한잔의 화주(花酒)를 마다하지 않을 수 없어,

부르기도 전에 달려가 뜯어보는 연애편지를 기다리는 마음과도 같은

조바심으로 찾곤 하는 그 곳!

기대고 앉은 진달래의 발 아래로 나있는

샘 가로 이어지는 그 길은, 마치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거닐던

달빛의 그 목행리 기억과 전혀 어긋나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차마 가슴 저미는 그 밤길의 정경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곳인데,

더구나 이 길을 지나 골짜기 한 면을 가느다랗게 긋고 있는 철로가 있어

목행리의 철길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철로 너머로는 또 다른 낮은 산들이

하늘을 겹치면서 연연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어서,

오늘 아침 같이 희미한 연무가 휘뿌려지는 날에는

그  골짜기 한쪽을 울리며 지나는 기차소리가

층층이 이어지고 있는 산들의 주름을 대하듯

내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추운 겨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해 이른 봄,
새벽,  동네 어귀에서 들려오던 기차소리를 듣고
몇 자 끄적거렸던 것을 올렸습니다.

회원님들의 봄은 어떠할지 궁금합니다.


('목행리'는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입니다)







5 Comments
하늘곰 2004.01.27 15:05  
  목행리에 충주비료공장이 있었고 유난히도 강에 돌들이 예뻐서 수석 수집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었죠. 지금은 댐이 생겨서 아름다운 자태가 모두 묻히고 새로운 풍경이 눈에 익어 가는 곳이지만 어린 시절 목행강에서 헤엄쳐 건너가다가 물에 빠진 친구를 건져내느라고 물 많이 먹은 생각이 아련하게 생각이 나네요. 충북선 기차를 타고 제천까지 가는길에 즐거웠던 추억과함께 고향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정우동 2004.01.28 08:07  
  아침이면  산에서 내려오는 산향기와
그 아침 골짜기에서 올라가는 연푸른 안개가 만나는
아무도 모르라고 낙엽으로 숨기고 있는 샘으로 가는 길
달빛에 낯이 익어 정다운 그 길 그 샘터에서
봄 밤 꽃그림자와 벗하여 홀로 마시는
花酒 기운에 떠올리는 그리운 어머니 얼굴
버려진 철제 캐비넷 마저도 아득한 향수를 불러오는
그런 풍경과 자연, 노란 산수유, 사랑하는 사람 사람들
연무가 뿌옇게 흩뿌리는 산 모롱이를 지나
갑짝스레 달려 나오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일시에
고요하고 한가로운 나의 꿈을 깨워 현실로 데려옵니다.
barokaki 2004.01.28 10:38  
  하늘곰님. 고향분일줄이야...
그 목행강.. 다슬기잡던 생각이 아련합니다.
목행다리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이 참 좋았죠.
강변의 모래밭이 넓었고, 미류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요.
제가 떠나오기 직전 큰 물이 나서 그 나무들 다 떠내려가고
그러다가 댐이 생기고 ...
이젠 그 모습 기억속에서나...
그립습니다.
barokaki 2004.01.28 10:43  
  정우동 선생님. 
우리가 가지고 있게된 이 틀과, 생각, 행동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곁에 있을 수 있었는지요.
저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압니다.
언제나 앞으로도 선배님들의 고언에 충실하겠습니다.
서들비 2004.01.29 16:05  
  바로가기님의 글을 보면서,
어린시절
바닷가 작은마을 샘가로 가는길이 떠올랐습니다.
알싸한 찔래꽃 향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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