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 김채원의 <겨울의 幻 >을 읽고 ①
김채원의 <겨울의 幻 >을 읽고 ①
권선옥((sun)
나는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지만, 때로 방학이 되면 고등학교에 보충수업 지원을 나가곤 한다. 집에 있어봐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는 그렇고 그런 날들임에, 학교에 나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
게으른 나는 학교엘 나가지 않으면 머리가 아프도록 미적대며 늦잠을 잘 것이고, 더운 날씨를 핑계로 이상한 실내복이나 걸치고 하루 종일 바깥출입도 않고 비비적거릴 것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적당히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사워하고 챙겨 입고 나서는 나를 보면 모르는 다른 사람에겐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게다가 더불어 돈도 더 생기고.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대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 한 마디로 누리는 것이 더 많아지는 셈이다.
학교에서 정해 준 고2 대상의 수능예상문제집에서 먼저 '수필과 극 문학' 분야를 마쳤다. 다음으로 현대 소설'분야를 기존의 남선생님과 맞물려서 진도를 나가던 중, '겨울의 幻'이란 소설을 접했다.
내가 읽어 보지 못한 소설이다. 살다보면 의외로 독서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읽지 않은 장편이나 중편 정도의 소설은 인터넷을 검색하여 전체 줄거리를 비롯하여 자주 등장하는 중요 대목들을 뽑아서 읽어 본 다음, 실전 문제집의 지문을 공부하여 수업을 진행하는 편이다.
김채원의 '겨울의 幻'은 1989년 제13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작품임에도 읽은 적이 없는 작품이었다. 교재와 풀이 책을 읽던 중, 만나게 된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한 해답. 나는 잠시 가녀린 현기증을 느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인터넷을 누비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몸 어디에 이런 광기서린 마음을 숨겨 두었던가.
김채원에 대한 소개의 글을 읽고 있던 중, 빛바랜 사진과 함께 조선일보에 게재된 <아버지의 추억>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파인 김동환이었다는 사실에 또 다른 전율을 느꼈다.
한국현대문학사 단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는 파인 김동환의 <국경의 밤>’이라고 배웠고 가르쳤던 바로 그 김동환. 또한 나의 홈페이지 메인 음악으로 넣은 가곡<남촌>을 작사하신 분이 그녀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겨울의 幻>에서 어머니로 나오는 분은 실제의 어머니 소설가 최정희 씨를 상당 부분 유사 모티브로 설정된 듯함을 비치는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미국에 거주하는 언니 소설가 김지원 씨와 네 살 때 소풍 갔었다는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 그녀의 가족사 또한 한 편의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 김채원 씨에 의하면 아버지 파인 김동환의 사진으로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고 말한 빛바랜 사진과 함께 그녀가 쓴 <아버지의 추억>을 그대로 옮겨 본다.
누구도 소설가인 딸 김채원이 ‘아버지 파인 김동환을 추억한 글’보다 더 잘 그를 소개하기란 쉽지 않으리란 생각에서다.
- 2006년 8월 7일 월요일 - <1회 끝>
- 아래 글 출처 :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7 -
[아버지의 추억] <26>소설가 김채원 - 2004년 7월 -
▲ - 광복 후 어느 봄날 창경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김지원)와 함께 가족 나들이를 했다. 모자를 쓴 오빠(맨 왼쪽)는 어머니가 영화감독 김유영씨 사이에서 낳았는데, 가족 나들이를 함께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며칠 전 볼쇼이 합창단의 노래로 ‘남촌’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산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이제껏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버지 작사의 노래를 많이 들어 왔건만 그 순간 밀려든 감정은 어떻게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 없다. 지금 뒤돌아 다시 생각해 보아도 역시 그러하나 아버지를 마음껏 그리워하자, 이런 마음이 저 속에서부터 솟구쳤던 것 같다.
그렇다면 평소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못했던가. 그보다는 내 안에 있던 아버지를 볼쇼이 합창단의 노래를 빌려 밖에서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형체라기보다 아슴푸레한 어떤 기운으로 공기처럼 늘 내 안에서 감돈다. 완두콩 밭에서 완두를 따서 콩을 꺼낸 후 연한 완두콩 껍질을 언니와 내 입에 넣어주던 그런 정경은 막연한 어떤 기운으로 감돌 뿐이다. 완두콩 껍질의 그 풀향내와 맛, 세상은 온통 연두빛 천지이고 아버지는 흰 한복을 입고 있었다. 흰 한복에 어리던 연두빛이 선명히 기억되는 것 같으면서도 역시 형체는 없다. 그러나 아버지 작사의 노래를 들을 때 그 구절들이 가슴에 와 박히면서 내 안에 있는 아버지를 내 밖에서 어떤 형체로 만난다. 그럴 때 아버지의 형체는 더할 수 없이 매력이 있다.
손기정 선생이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엽서를 보면, ‘여관에서 울 수가 없어 바닷가에 나가 멀리 수평선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지요’ 같은 구절에서 멀리 수평선 바라보며 한없이 울고 있는 한 남자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이상주의자였고, 그래서 현실과의 괴리가 유독 큰 분이었다고 어머니는 늘 말했다. 이런 분이었다, 라는 식으로가 아니라 너희 애비라는 사람은… 하고 말하였는데 이제 보면 그것은 북방여자 특유의 어법이었던 것 같다. 무엇에 대한 자랑은 낯간지러운….
“공부를 잘할 필요가 없다. 꼴찌에서 둘째쯤만 하면 된다.” “아이들은 돈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고 싶다.” “한강변에 포도나무를 심어 지나가는 선남선녀들이 모두 따먹게 하자.” 이런 말들에서 아버지가 꿈꾸던 세계를 감지한다.
아꾸, 아꾸, 이런 표현은 아버지 특유의 표현이다. 별로 잘나지도 못한 아이들이 아버지에게만은 너무 귀하고 예뻐서 저절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바로 그처럼 부모는 우리를 너무 가슴 아프게 한다. 마음껏 그리워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버지는 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다. 과오를 씻고 그가 꿈꾸던 세계로 가기 위한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 꿈이 파묻힌 채 납북된 아버지.
아버지와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뿐이다. 해방된 후 덕소에서 서울로 올라 온 뒤, 어느 하루 아이들에게 창경원을 구경시켜 주려 했던 것 같다. 몹시 말라있는 어머니 아버지를 보면 그 당시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 시절이 낙원으로 기억되니 오묘한 조화다.
소년 시절 아버지는 아버지를 찾아 러시아 방랑길에 오른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한일합방을 비관하여 토지를 도청에 헌납하고 러시아로 떠나버렸는데 그 당시 어렸던 아버지가 소년이 되자 아버지를 찾아 러시아 전역을 방랑하였다고 들었다.
그날 볼쇼이 합창단의 노래가 내게 특이한 순간으로 다가왔던 것은 러시아를 떠돌고 있던 그 소년을 떠올린 때문일 것이다. 그 소년이 커서 지은 시를 먼 훗날 그 나라 사람들이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한 감회.
“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 위의 내용은 옮긴 글로 조선일보에서 연재한 '아버지의 추억' - 김채원 - .*
다음은 그녀에 대한 소개이다.
▲ 김채원 가족은
김채원의 아버지는 시인이었던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1901~?). 파인은 1925년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6·25 때 납북됐다. 글 중에 나오는 어머니는 소설가 최정희(崔貞熙·1912~1990). 김채원의 언니인 지원(미국 거주)도 소설을 쓰고 있다. 김채원은 ‘겨울의 환’(이상문학상 수상작)을 비롯, ‘봄의 환’ ‘여름의 환’ ‘가을의 환’ 등 ‘환’(幻) 연작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소설가 김채원
1946년 경기도 덕소 출생. 1968년 이화여대 미대 회화과 졸업.
1975년「밤 인사」로 현대문학 추천 완료.
1989년「겨울의 幻」으로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으로 「초록빛 모자」「봄의 幻」「달의 몰락」
김지원과의 자매집 「먼 집, 먼 바다」「집, 그 여자는 거기에 없다」
장편소설 「형자와 그 옆사람」「달의 강」등이 있다.
* <겨울의 환>
할머니와 어머니, 나로 이어지는 여인 삼대의 이야기가 한국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더불어 특수한 모녀간의 갈등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할머니와 어머니, 나는 젊어서 남편에게 버려지는 공통된 운명에 처한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딸 셋과 아들 하나를 키워내는데 하나뿐인 외아들마저 월북하고, 큰 딸에게서 버림받은 채 죽는다. 큰 딸인 어머니 역시 두 딸을 키우며 홀로 살아왔고, 검버섯이 핀 늙은이가 되어 이혼녀인 '나'와의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비로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느끼게 되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이 작품은 세 여인의 갈등 속에서 자궁을 가진 여자로서의 숙명감, 결연히 인생과 마주한 여자로서 서야 하는 숙명에 대해 그리고 있다. 특히 내면 심리를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는데, 이 '의식의 흐름'은 '눈'이라는 자연과 결부되어 있다. 어린 시절, 밤중에 동치미를 가지러 나갈 때 내리던 눈, 피난지에서 보았던 눈 내리던 벌판의 나무, 홀시아버님 장례식에서 보았던 눈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의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
할머니 산소에 난 산불을 보면서 할머니를 추억하고 같은 함경도가 고향인 '순쟁이'에게로, 피난시절과 외삼촌,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 나의 현재 상황에까지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백체 양식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양식의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을 정착시키고 내적 독백의 수법을 구사한 J.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M.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심리소설에 속한다.
1989년 제1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자기 몫의 삶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중년여성의 심리를 포착함으로써 인간의 운명적 쓸쓸함, 어쩔 수 없는 삶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이 소설은, 또한 자연의 이미지와 결부된 의식의 기술, 삶에 때때로 필요한 환상의 포착이 이 작가의 몫임을 말해주고 있다"라고 선정 이유서는 밝히고 있다.
김채원은 1946년 경기도 덕소에서 출생하여 1968년 이화여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1975년 <밤인사>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주요작품으로 단편 ≪얼음집≫ ≪몽수리공원에 내리는 가을≫ ≪밀월≫ ≪봄의 환(幻)≫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 ≪먼집 먼바다≫ ≪초록빛 모자≫ 등이 있다.
권선옥((sun)
나는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지만, 때로 방학이 되면 고등학교에 보충수업 지원을 나가곤 한다. 집에 있어봐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는 그렇고 그런 날들임에, 학교에 나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
게으른 나는 학교엘 나가지 않으면 머리가 아프도록 미적대며 늦잠을 잘 것이고, 더운 날씨를 핑계로 이상한 실내복이나 걸치고 하루 종일 바깥출입도 않고 비비적거릴 것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적당히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사워하고 챙겨 입고 나서는 나를 보면 모르는 다른 사람에겐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게다가 더불어 돈도 더 생기고.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대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 한 마디로 누리는 것이 더 많아지는 셈이다.
학교에서 정해 준 고2 대상의 수능예상문제집에서 먼저 '수필과 극 문학' 분야를 마쳤다. 다음으로 현대 소설'분야를 기존의 남선생님과 맞물려서 진도를 나가던 중, '겨울의 幻'이란 소설을 접했다.
내가 읽어 보지 못한 소설이다. 살다보면 의외로 독서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읽지 않은 장편이나 중편 정도의 소설은 인터넷을 검색하여 전체 줄거리를 비롯하여 자주 등장하는 중요 대목들을 뽑아서 읽어 본 다음, 실전 문제집의 지문을 공부하여 수업을 진행하는 편이다.
김채원의 '겨울의 幻'은 1989년 제13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작품임에도 읽은 적이 없는 작품이었다. 교재와 풀이 책을 읽던 중, 만나게 된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한 해답. 나는 잠시 가녀린 현기증을 느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인터넷을 누비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몸 어디에 이런 광기서린 마음을 숨겨 두었던가.
김채원에 대한 소개의 글을 읽고 있던 중, 빛바랜 사진과 함께 조선일보에 게재된 <아버지의 추억>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파인 김동환이었다는 사실에 또 다른 전율을 느꼈다.
한국현대문학사 단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는 파인 김동환의 <국경의 밤>’이라고 배웠고 가르쳤던 바로 그 김동환. 또한 나의 홈페이지 메인 음악으로 넣은 가곡<남촌>을 작사하신 분이 그녀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겨울의 幻>에서 어머니로 나오는 분은 실제의 어머니 소설가 최정희 씨를 상당 부분 유사 모티브로 설정된 듯함을 비치는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미국에 거주하는 언니 소설가 김지원 씨와 네 살 때 소풍 갔었다는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 그녀의 가족사 또한 한 편의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 김채원 씨에 의하면 아버지 파인 김동환의 사진으로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고 말한 빛바랜 사진과 함께 그녀가 쓴 <아버지의 추억>을 그대로 옮겨 본다.
누구도 소설가인 딸 김채원이 ‘아버지 파인 김동환을 추억한 글’보다 더 잘 그를 소개하기란 쉽지 않으리란 생각에서다.
- 2006년 8월 7일 월요일 - <1회 끝>
- 아래 글 출처 :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7 -
[아버지의 추억] <26>소설가 김채원 - 2004년 7월 -
▲ - 광복 후 어느 봄날 창경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김지원)와 함께 가족 나들이를 했다. 모자를 쓴 오빠(맨 왼쪽)는 어머니가 영화감독 김유영씨 사이에서 낳았는데, 가족 나들이를 함께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며칠 전 볼쇼이 합창단의 노래로 ‘남촌’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산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이제껏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버지 작사의 노래를 많이 들어 왔건만 그 순간 밀려든 감정은 어떻게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 없다. 지금 뒤돌아 다시 생각해 보아도 역시 그러하나 아버지를 마음껏 그리워하자, 이런 마음이 저 속에서부터 솟구쳤던 것 같다.
그렇다면 평소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못했던가. 그보다는 내 안에 있던 아버지를 볼쇼이 합창단의 노래를 빌려 밖에서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형체라기보다 아슴푸레한 어떤 기운으로 공기처럼 늘 내 안에서 감돈다. 완두콩 밭에서 완두를 따서 콩을 꺼낸 후 연한 완두콩 껍질을 언니와 내 입에 넣어주던 그런 정경은 막연한 어떤 기운으로 감돌 뿐이다. 완두콩 껍질의 그 풀향내와 맛, 세상은 온통 연두빛 천지이고 아버지는 흰 한복을 입고 있었다. 흰 한복에 어리던 연두빛이 선명히 기억되는 것 같으면서도 역시 형체는 없다. 그러나 아버지 작사의 노래를 들을 때 그 구절들이 가슴에 와 박히면서 내 안에 있는 아버지를 내 밖에서 어떤 형체로 만난다. 그럴 때 아버지의 형체는 더할 수 없이 매력이 있다.
손기정 선생이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엽서를 보면, ‘여관에서 울 수가 없어 바닷가에 나가 멀리 수평선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지요’ 같은 구절에서 멀리 수평선 바라보며 한없이 울고 있는 한 남자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이상주의자였고, 그래서 현실과의 괴리가 유독 큰 분이었다고 어머니는 늘 말했다. 이런 분이었다, 라는 식으로가 아니라 너희 애비라는 사람은… 하고 말하였는데 이제 보면 그것은 북방여자 특유의 어법이었던 것 같다. 무엇에 대한 자랑은 낯간지러운….
“공부를 잘할 필요가 없다. 꼴찌에서 둘째쯤만 하면 된다.” “아이들은 돈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고 싶다.” “한강변에 포도나무를 심어 지나가는 선남선녀들이 모두 따먹게 하자.” 이런 말들에서 아버지가 꿈꾸던 세계를 감지한다.
아꾸, 아꾸, 이런 표현은 아버지 특유의 표현이다. 별로 잘나지도 못한 아이들이 아버지에게만은 너무 귀하고 예뻐서 저절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바로 그처럼 부모는 우리를 너무 가슴 아프게 한다. 마음껏 그리워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버지는 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다. 과오를 씻고 그가 꿈꾸던 세계로 가기 위한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 꿈이 파묻힌 채 납북된 아버지.
아버지와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뿐이다. 해방된 후 덕소에서 서울로 올라 온 뒤, 어느 하루 아이들에게 창경원을 구경시켜 주려 했던 것 같다. 몹시 말라있는 어머니 아버지를 보면 그 당시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 시절이 낙원으로 기억되니 오묘한 조화다.
소년 시절 아버지는 아버지를 찾아 러시아 방랑길에 오른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한일합방을 비관하여 토지를 도청에 헌납하고 러시아로 떠나버렸는데 그 당시 어렸던 아버지가 소년이 되자 아버지를 찾아 러시아 전역을 방랑하였다고 들었다.
그날 볼쇼이 합창단의 노래가 내게 특이한 순간으로 다가왔던 것은 러시아를 떠돌고 있던 그 소년을 떠올린 때문일 것이다. 그 소년이 커서 지은 시를 먼 훗날 그 나라 사람들이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한 감회.
“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 위의 내용은 옮긴 글로 조선일보에서 연재한 '아버지의 추억' - 김채원 - .*
다음은 그녀에 대한 소개이다.
▲ 김채원 가족은
김채원의 아버지는 시인이었던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1901~?). 파인은 1925년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6·25 때 납북됐다. 글 중에 나오는 어머니는 소설가 최정희(崔貞熙·1912~1990). 김채원의 언니인 지원(미국 거주)도 소설을 쓰고 있다. 김채원은 ‘겨울의 환’(이상문학상 수상작)을 비롯, ‘봄의 환’ ‘여름의 환’ ‘가을의 환’ 등 ‘환’(幻) 연작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소설가 김채원
1946년 경기도 덕소 출생. 1968년 이화여대 미대 회화과 졸업.
1975년「밤 인사」로 현대문학 추천 완료.
1989년「겨울의 幻」으로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으로 「초록빛 모자」「봄의 幻」「달의 몰락」
김지원과의 자매집 「먼 집, 먼 바다」「집, 그 여자는 거기에 없다」
장편소설 「형자와 그 옆사람」「달의 강」등이 있다.
* <겨울의 환>
할머니와 어머니, 나로 이어지는 여인 삼대의 이야기가 한국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더불어 특수한 모녀간의 갈등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할머니와 어머니, 나는 젊어서 남편에게 버려지는 공통된 운명에 처한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딸 셋과 아들 하나를 키워내는데 하나뿐인 외아들마저 월북하고, 큰 딸에게서 버림받은 채 죽는다. 큰 딸인 어머니 역시 두 딸을 키우며 홀로 살아왔고, 검버섯이 핀 늙은이가 되어 이혼녀인 '나'와의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비로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느끼게 되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이 작품은 세 여인의 갈등 속에서 자궁을 가진 여자로서의 숙명감, 결연히 인생과 마주한 여자로서 서야 하는 숙명에 대해 그리고 있다. 특히 내면 심리를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는데, 이 '의식의 흐름'은 '눈'이라는 자연과 결부되어 있다. 어린 시절, 밤중에 동치미를 가지러 나갈 때 내리던 눈, 피난지에서 보았던 눈 내리던 벌판의 나무, 홀시아버님 장례식에서 보았던 눈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의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
할머니 산소에 난 산불을 보면서 할머니를 추억하고 같은 함경도가 고향인 '순쟁이'에게로, 피난시절과 외삼촌,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 나의 현재 상황에까지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백체 양식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양식의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을 정착시키고 내적 독백의 수법을 구사한 J.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M.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심리소설에 속한다.
1989년 제1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자기 몫의 삶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중년여성의 심리를 포착함으로써 인간의 운명적 쓸쓸함, 어쩔 수 없는 삶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이 소설은, 또한 자연의 이미지와 결부된 의식의 기술, 삶에 때때로 필요한 환상의 포착이 이 작가의 몫임을 말해주고 있다"라고 선정 이유서는 밝히고 있다.
김채원은 1946년 경기도 덕소에서 출생하여 1968년 이화여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1975년 <밤인사>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주요작품으로 단편 ≪얼음집≫ ≪몽수리공원에 내리는 가을≫ ≪밀월≫ ≪봄의 환(幻)≫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 ≪먼집 먼바다≫ ≪초록빛 모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