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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아있는 나날" -중, 노년의 사랑이야기-

송인자 2 1385
남아있는 나날 -영화이야기-
(중, 노년의 사랑이야기)

사무실 내 책상 옆 전화선을 덮은 청테이프가 더러워지고 찢겨져서 보기 흉해졌다. 이건 얼마 전부터 그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나나 직원들 모두 모른 채 묵묵히 밟고 다닌다.
작년에 사무실을 개조하면서 전화선을 새로 깔게 되었는데, 한 선이 잘못 설치되어 부랴부랴 수정하느라고 그냥 바닥을 가로질러 설치하게 되었다. 원래는 그 위에 쫄대를 덮었는데 왔다 갔다 하면서 하도 밟아대서 짜부러지자 아예 뜯어내고 청 테이프를 붙여놓았던 것인데, 그게 또 그 모양이 됐다. 

그것을 회사의 주인인 최이사가 점심을 먹다가 본 것이다. 좀 화가 나는지 본인이 직접 테이프를 뜯어내고는 끈적이는 주변을 화장지로 닦고서 새 테이프를 찾는다. 난 방 책임자로서 좀 민망했다. 그래서 그 과정에 껴들어서 이것저것 도와줬는데 그러면서 최이사와 비슷한 내 시어머니를 떠올렸다.

우리가 시골 살 때(그러니까 애들 아빠 사업이 잘못되기 전) 어머님은 따로 목욕탕과, 여관을 하셨다. 그래서 집에는 언제나 밥 먹는 남의 식구가 바글댔었다.
지하에 세를 내준 다방과 식당까지 있었던 그 건물은 수시 때때로 속을 썩였다. 어디 배관이 막혔다거나, 아님 터졌다거나, 방이 난방이 안 된다거나, 화장실 물이 안내려간다거나, 문이 고장이라거나, 보일러실에 이상이 있다거나 ... 전체에서 뭔가 끊임없이 문제가 생겼다.
당연히 종업원 여럿을 두고서 일하셨는데, 그들을 보며 시어머님이 늘 상 하시는 말씀은 “주인이 보는 문제점을 종업원은 보지 못한다.”였다.

예전 젊었을 땐 그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으나, 지금 나이 먹고서, 또 내가 월급을 받는 입장이 되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씀이다. 지금 내 앞의 상황을 봐도 그렇다. 그들은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못 본체 하는 거다.

그러자 그것과 연관해서 “집사”가 주인공이었던 영화 <남아있는 나날>이 떠오른다.

악세사리를 전혀 걸치지 않은 여자는 아주 당당해 보이거나 아님 초라해 보이는 양극적인 현상을 보인다. 어찌 보면 “집사”라는 직업이 그러한 것 같다.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 집사 “리” 가 “새뮤얼”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옮겨본다.
(난 얼마 전까지 이 책을 많은 분들께 읽어주려고 타자했었다.)

“하인이라는 것이 천대를 받게 된 연유를 나는 모르겠어요.
그것은 철학자의 피신처고 게으른 자의 창고이고 잘만하면 권력과 심지어는 사랑마저 다룰 수 있는 지위이죠.
좋은 하인만 되면 주인의 호의 때문이 아니라 관습과 나태 때문에 절대적인 안전을 얻을 수 있죠. 사람이란 향료를 바꾼다든지 자신의 양말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란 힘든 일이죠.
사람은 습관을 바꾸기보다는 오히려 나쁜 하인을 그대로 두게 마련이죠.
나도 훌륭한 하인이긴 하지만, 좋은 하인은 주인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생각할 것을 말해 주기도 하고, 훈련을 시켜 공포심을 갖게도 행복을 나누어 주기도 하지요.
내가 원하기만 했었다면 주인에게서 물건을 훔칠 수도 있었고, 주인의 껍데기를 벗길 수도 있었죠.
선생님은 일을 하고도 걱정을 해야 하죠.
나는 일을 덜하고도 걱정을 덜합니다. 그러고도 나는 훌륭한 하인입니다.
나쁜 하인은 일도 하지 않고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식주를 해결 받고 보호를 받습니다.”

이 영화엔 명배우 안소니 홉킨스와 내가 광적으로 좋아하는 엠마톰슨이 나온다.

<안소니 홉킨스>
“양들의 침묵”에서는 인육을 먹는 렉터 박사로 “가을의 전설”에서는 세 아들의 굴곡진 삶을 지켜보는 아버지로, 그리고 “하워즈 엔드” 에서는 한 여인을 애끓게 하는 중후한 신사로, 그리고 “남아있는 나날”에서는 영국 귀족 가문의 충직한 집사로... 그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다.
그가 출연했다는 50여 편의 영화 중 국내에 소개된 것이 내가 알기로도 반 이상은 되는 줄 안다.

<엠마톰슨>
“센스 센서빌리티” “하워즈 엔드” 등에서는 다정다감하고 수줍고 지성적인 노처녀의 역을, “러브 엑츄얼리”에서는 읽어버린 사랑을 속으로 삭이는 중년여성을, 그리고 “남아있는 나날”등 그녀는 하나같이 지적이고 품위 있는 역할을 해내는 배우다. 아니 그녀가 맡으면 아무리 하찮은 역이라도 격이 높아지게 된다.
난 “캐서린 햅번” 이후 이만한 배우를 본 적이 없다.
그녀의 차분한 눈빛,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소리 나지 않게 정겹게 웃는 모습,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영국 귀족의 품위가 느껴진다. 그러니 굳이 국적을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녀의 얼굴이 국적이니. 

“남아있는 나날”은 영화만큼이나 책도 유명하다.
이 전형적인 영국 풍 영화의 원작은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일본 작가의 작품이다.
하기야 6세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하니, 그의 혈통이 일본인이라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 훌륭한 집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이란 탁월한 하인관리 계획을 구상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 누구든 제한된 상황에 몰두해 있으면, 어떤 외부자극에 눈 뜨게 될 때까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자신이 침잠해있는 상황의 오류를 좀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막상 떠난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제게 관심을 가져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 황량한 세상에 그냥 내팽개쳐질 것 같은 공포감에 시달렸답니다. 그게 바로 제가 내세웠던 고결한 이상과 원칙의 숨겨진 얼굴이었던 거예요.

* 내가 짐작컨 데, 어느 누구라도 회고를 빙자해 자기 인생에서 소위 '전환점'이란 걸 조금만 눈여겨 찾으려만 한다면, 그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누구하고 그처럼 긴긴 나날을 함께 지내다보면, 어느새 그 사람에게 익숙해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가 봅니다.
-이상은 책 속의 내용입니다 -.

한마디로 이 영화는 대단한 수작이다.
내가 본 영화 중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정말 비판을 하고 싶게 만드는 아쉬운 면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영화였다.
그림의 원근법처럼 열쇠 구멍을 통해 보이는 복도가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 장면은 영화 전편에 계속해서 등장하며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묘한 역할도 한다.
배경 음악도 약간 늘어진 듯한 느낌으로..... 긴 여운을 남기며 먼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를 비롯하여, 모든 예술 행위에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좌우 하는 것은 역시 음악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하다가 인생을 후회하는 어느 옹고집장이의 인생 실패담이다.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한 그 작중 인물은, 어느 고성을 지키는 옛 귀족가문의 집사장이다.
자부심이 가득하고 오랫동안 절제된 생활이 몸에 밴 그를, 새로 들어온 마음씨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는 여인에게 내색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떠나보낸다.

그리고 은퇴할 무렵이 되어서야 황량한 고독을 느끼고 이 여인을 찾아보았으나, 그 여인은 이미 할머니가 되어 있고, 자신의 애틋한 감정을 전달할 처지가 되지 못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이 인생을 헛산 것을 깨닫는다.
뭔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가 인생에서 참으로 고귀한 것을 놓쳐 버리는 사람은 이 집사장 뿐만이 아니다.
지금 내게서 그 모습을 본다.

2 Comments
달마 2006.05.29 12:58  
  솔 의 인자 함야 고금도 아는지라

우리가 시러펴는 중년살이 글 고와라

나이를 뒤집어 보는맞 한 재치야  여인아
송인자 2006.05.29 14:38  
  인터넷에 글 올리는 일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디에선가 좋은 글이 있어서 퍼다 나르는 것이야.
누가 읽든 말든 신경 쓰이지 않는 일이지만.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등 진솔한 내용의 글은 남들에게 내놓고 나면 신경이 쓰입니다.
때론 흐뭇하기도 하고,.....때론 괜히 올렸나? 싶어서 부끄럽기도 하고...
"달마"님 꼬리글로 힘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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