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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산수부-(향로봉)

이종균 2 1683
소백산 산수부(山水賦) - (향로봉)


  소백산 국망봉(1,421m)이 상월봉(1,394m)을 거쳐 북서로 방향을 바꾸며 슬쩍 머리를 들어 신선봉(1,389m)을 이루고, 나아가 등을 움츠려 민봉(1,362m)을 세운 다음, 보발재(일명;고드넘어재)에서 잠시 숨을 들이 쉬고 날아가듯 솟구쳐 오른 곳, 그곳이 바로 향로봉(865m)이다.
  여기서 속도를 늦추어 스르르 기어내리더니 마지막 성산(城山)에서 잠시  똬리를 틀다가 이무기처럼 남한강에 머리를 처박아 푸른 강물을 꿀컥꿀컥 들이마신다.
  이 산줄기를 소백산 영춘 지맥이라 부른다.

  나야 어차피 평일과 휴일이 따로 없는 낭인인데도 닷새 동안의 추석연휴가 어쩐지 지루하게 느껴지는데 마침 산악회의 연락이 있어 얼른 따라 나섰다.
  연휴 둘째 날도 고속도로는 귀성차량으로 가득 차있다.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정든 고향을 찾아가는 그들만큼이나 들뜬 마음으로 나는 내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차창에 비치는 수려한 산세만으로도 금방 단양 땅임을 알 수 있었다.

  59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가곡면(佳谷面) 보발리 협곡으로 접어드니 좌우에 골골이 뻗어 내린 산줄기들이 천수보살의 팔보다도 더 매끈해 보인다.
  한 치의 빈 땅도 보이지 않는 검푸른 수림으로 덮인 산, 아직 붉은 잎은  보이지 않아도 나무 끝에 가을 기운이 첫서리처럼 살짝 내려앉았다.
  산이 높고 크면 큰 만큼 골이 깊고, 나무가 무성하면 무성한 만큼 물도 맑고 수량도 많은가 보다.

  하늘은 이미 자동차의 천정으로 가려있고 단 50미터 앞도 바로 볼 수 없는 꼬불꼬불한 구절양장, 그 신비의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 이 아름다운 골짜기를 가곡(佳谷)이라 불렀는가.

  드디어 보발재에 이르렀다. 이 고개 너머에 천태종의 총본산인 구인사(救仁寺)가 있다.
  상월원각대조사가 1945년 칡넝쿨을 얽어 삼 칸 초막을 짓고 수행 끝에 창건했다는데, 오늘날 5층 대법당을 비롯하여 무려 50여동의 건물을 갖춘 큰 가람으로 발전했다니 실로 조사의 수행과 염원이 헛되지 않았음이다.
  이 산문에 드는 자 먼저 하심(下心)을 갖아야한다는데 마음속의 아만(我慢)을 비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채우는 것이 하심의 본뜻이라 했다.
  자연의 섭리를 깨치는 것, 빈 가슴에 산심(山心)을 채우는 건 마땅히 산 꾼의 하심 아니랴.
  이 고갯마루에 나무 전망대가 있다. 수직으로 뚝 떨어지는 흡사 말티재 같은 저 길 넘어 지척에 명찰을 두고 돌아서는 마음이 아쉽기도 하다.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몹시 가팔랐다. 아니 가팔랐다기보다 어쩌면 몸이 채 풀리기 전의 오름길이 나이 들어가는 내게 힘겨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건드레 취객마냥 어우러진 잡목림을 지나니 굴참나무가 무성하고, 하늘 높이 치솟은 낙엽송 군락지를 빠져나니 아름드리 노송들이 울울창창하다.
 
  이 숲의 터널을 뚫고 힘들여 오른 30여평의 잡초 우거진 정수리엔 “향로봉(865m)”이란 작은 돌기둥 하나가 서있고, 산림감시초소였던 듯 한 각 철재 잔해에 “계명산(충북986산악회)”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언제 누가 왜 계명산이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자칫 황량한 느낌으로 실망하고 지나칠 수 있는 이 봉우리에서 허리를 펴 뒤돌아보니 형제봉(1,177m)에서 비로봉(1,440m)을 거쳐 연화봉(1,383m)에 이르는 소백산줄기가 도도하다.

  그 너른 가슴에 안긴 이른바 구봉팔문(九峰八門)을 비롯하여 이곳저곳에 솟아오른 수많은 봉우리와 그 사이사이에 깊숙이 파인 계곡들, 소백산을 직접 오를 때 보지 못했던 숫한 비경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마디로 이곳은 소백산의 오장육부를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요충지로  여기에도 시계를 가리는 잡목을 넘어설 전망대 하나 있으면 어떨까.

  문득 중국 당나라 말기의 화가 형호(荊浩)의 산수부(山水賦)가 떠오른다.
  무릇 산수를 그림에 있어는 뜻이 붓보다 앞서야한다고 전제한 그는, 「뾰족하고 가파른 곳이 봉우리(峰)요, 평탄한 곳이 등성이(嶺)이며, 가파른 벽은 벼랑(崖)이다.
  또 구멍이 있는 것을 산굴(岫)이라 하고, 돌이 매달린 것을 바위(岩)이라하며, 형체가 둥근 것은 작은 산(巒)이요,
  양쪽에 산을 끼고 있는 길이 골(壑)이고, 양쪽에 산을 끼고 있는 물이 산골물(澗)이며, 물이 내로 흘러들어가는 곳이 시내(溪)이고, 샘물이 내로 통하는 곳이 곧 골짜기(谷)이다.
  그리고 길이 지나가는 작은 흙산을 고개(坡)라 하고, 눈에 보이는 끝까지 평탄한 곳을 비탈(坂)이라한다.」 하였던 전문등산가도 아닌 한 화가의 자연을 꿰뚫어 살피는 경탄할 안목, 지금 나는 그 현장을 보고 있다.

  내려가는 길은 기복이 심하지 않는 평탄한 길이었다.
  참나무가 많아서인지 도토리가 땅위에 뒹굴어 있고 멧돼지들이 주워 먹노라 그랬는지 여기저기 생땅을 후벼놓았다.
  그 바쁜 발걸음 중에도 부지런한 회원은 도토리를 주워 배낭을 채우고 또 어떤 회원은 자연의 산물을 자연에 돌리지 않고 인간이 가져간다고 핀잔을 준다.

  세 시간 남짓 걸렸을까, 어느새 온달산성이 있는 성산(城山)에 도착했다.
  납작납작한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길이 1.5킬로, 높이 8.5미터, 너비 3.6미터의 테뫼식 산성은 구비치는 강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서울 아차산성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온달장군은 아무래도 강을 이용한 작전에 뛰어났던 모양이다.

  한 때 번성했다던 봄이 긴 고을, 영춘현(永春縣)의 진산인 성산 아래 석굴이 있는데 높이와 넓이가 10여척이고, 깊숙이 들어가 끝이 없고, 물이 철철 나와 깊이가 무릎에 닿는데 맑고 차기가 어름 같다. 사람들이 횃불 열 자루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구멍이 끝나지 않아 홰가 다함에 돌아왔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쓰여 있다.
  천연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된 온달동굴은 4억5천만 년 전에 형성된 석회암 천연동굴로 총연장 800미터, 다섯 갈래의 곁굴, 여섯 군데의 공간이 있으며, 사계절 섭씨 16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평강공주가 이곳에 찾아와 장군과 함께 있었다는 공주굴은 찾지 못했으나, 마지막 온달동굴을 구경했으니 오늘 등반은 동굴에서 시작하여 동굴에서 끝난 셈이다.
 
2 Comments
자 연 2007.10.01 01:23  
  산 이가 구름보고 잘가라 하다가도

가을 산  푸른하늘 보고 가끔 울며불며

잘 살라 산 무던히 사랑 아무나 못할레라


회장님 글은 암만봐도
크게도 반하겠습니다
얼굴동근 처녀 맘에 반하듯

건안하세요
이종균 2007.10.02 22:20  
  자연 선생님!

서툰 글도 맘에 든다하심은
선생님 가슴속에 山心이 자리함이라
여겨집니다.
실은 둥근 얼굴보다 갸름한 얼굴이
더 예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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