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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를 통해서 본 드라마 작가의 덕.(문학저널)

송인자 4 1371
“로즈마리”를 통해서 본 드라마 작가의 “덕”

월간 문학저널 제 39호 (2006년 11월호)
송 인 자
균형감각 있게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드라마는 사회의식을 변화시키는 최고의 매개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토요일 근무 중에 짬짬이 송지나 작가의 드라마 “로즈마리”(어린 남매를 둔 평범한 여자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휴먼드라마) 대본을 들여다봤다. 그것은 일을 마치고 가봐야 할 사촌 여동생의 죽음 앞에 보다 초연하고 싶어서였다. 극의 마지막 회 부분을 보면서 눈물을 쏟고 또 쏟았지만 많은 위안이 되는 걸 느낀다.

나는 영안실에 가서 검은 띠가 둘러진 사촌동생의 사진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내 슬픔은 둘째 치고 작은엄마의 망가진 얼굴을 대할 자신이 없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다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사촌동생은 “로즈마리”속 여주인공처럼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이나 주어졌었을까? 그렇게 급속도로 병이 진행되는 경우는 그 문제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전히 가족들의 몫인데. 내가 아는 바 작은 아버지는 그것까지 생각할 어른이 아니시다.

사촌동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본인이 불치의 병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작은 엄마에게까지도 비밀이었고 가족 중에는 오로지 작은 아버지와 남동생만이 알고 있었단다. 전혀 준비 없이 딸의 죽음을 맞아야했던 작은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왜 본인에게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못했는지,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가 자신의 생을 대신해서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부모라도 대신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내가 청천병력과 같은 소리를 듣고 언니와 함께 대학 병원을 찾았을 때 작은 아버지는 휴게실 한쪽 벽에 기대어 넋을 놓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며 뭐라고 위로해야할지 말을 찾지 못했다. 도대체 20년이나 어린 사촌동생의 사망선고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병문안 갔을 때만 해도 사촌동생은 생동감이 넘쳤다. 가기 전 병원에 근무하는 남동생을 통해서 도저히 치유 불가능한 위암이라는 말을 듣고 갔지만. “죽음” 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피부는 말갛고 눈에도 총기가 있었다. 비록 환자복을 입고 있으나 활달하게 잘 웃고, 할말 없어서 어색해하는 우리를 위안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게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사촌동생은 이제 겨우 서른두 살이며 일곱 살 난 딸애의 엄마다, 멀리 사는 관계로 잦은 왕래는 없었지만 지금 박사과정을 밟으며 어느 학교에 강의도 나간다고 들었다. 병이 발견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었단다. 어느 날부턴가 등과 허리가 아프고 힘이 없어서 살고 있던 대전에서 병원을 다녔단다. 그런데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점점 숨이 가빠오며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종합검사를 해본 결과 암인 것 같다는 진단을 받고서야 서울로 온 것이다. 정밀검사를 해본 결과 암 세포가 위벽을 싸고 퍼져있었다는 데 그러한 경우는 내시경으로도 발견이 쉽지 않다고 한다.

나는 바쁜 회사 업무 때문에 그 뒤로 병원을 찾지 못했다. 이따금 궁금했지만 그 말갛던 얼굴을 상기하며 설마... 행여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사망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듣자 사촌동생처럼 어린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떠야했던 젊은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로즈마리”가 생각났다. 그리고 연이어 국문과 재학 중인 딸애의 과제물 제목이었던 <드라마 작가의 “덕”>이 생각났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 나서 한동안은 절규하며 몸부림치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다량의 진통제를 먹어가면서 살아오는 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둘러보며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을 가족과 함께 소중하게 보낸다. 특히 유치원생 딸아이에게는 배고플 때 해먹으라면서 달걀 요리하는 것과 밥 볶는 법, 세탁기 사용법도 가르치고, 살면서 궁금한 것은 책 속에 다 들어있으니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는 당부도 한다. 또 아이들의 치과 치료며, 남편에게 통장 비밀번호를 외우게 하기까지 남아있는 자들이 엄마 없이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법을 훈련시킨다.

여주인공이 죽기 며칠 전 아이들을 옆에 끼고서 말한다. 하늘나라에는 과일과 초콜렛도 나무에서 주렁주렁 열리고 콜라와 우유의 시냇물도 흐른다고. 환상적인 그곳의 얘기를 들은 아이들은 자기네도 가고 싶다고 떼를 쓴다. 엄마는 아이들을 더 깊이 안아주며 그곳은 아무나 가는 게 아니고 엄마처럼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한 사람만 갈수 있다고 말해준다. 천사가 찾아와서 차표를 주며 엄마 할 일은 아빠를 만나고 너희들처럼 착하고 멋진 아이들 낳고 키우는 것이었다고 한다. 엄마와 헤어져야하는 어린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이 얘기가 쉰이 넘은 나에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었다. 내세가 있으니 영원한 이 별은 아니라는 그 숱한 성경구절을 읽으면서도 얻을 수 없었던 위안을 얻은 것이다.

아아, 이 부분에서 목이 메었다. 만약 내가 지금 세상을 떠야 한다면 내 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줘야 할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는 걸 느낀다. 어떤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지, 사람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충고하는 법은, 남편감은 어떤 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지, 또 미움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 사람을 사랑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지 등등 다 나열할 수도 없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달리 사촌동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단다. 딸의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작은아버지는 여기저기 대학병원을 두드리며 새로이 발견된 임상 실험용이라도 좋으니 방법이 없겠느냐며 통사정을 하고 다녔단다. 그래서 남편과도 하나뿐인 딸과도 좋은 시간은커녕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갔단다. 부모의 심정이야 백번 이해하지만 그것이 과연 최상의 방법이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렴풋한 내 예감으로는 사촌동생이 자신의 병을 정확히 알았다면 그렇게 병원 침대에서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그 일이 대화의 중심에 올랐다. 그런데 하나같이 본인이 모르고 가는 게 낫다는 것이다. 아무리 불치의 병이라 해도 미리 포기하게 하는 것 보다는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 모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는 게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것은 남아있는 자들의 이기심이라는 생각이다. 그 엄청난 사실을 인정하는 게 두렵고 전해주는 괴로움을 피하고 싶은 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본인에게서 삶을 정리할 권한을 빼앗으면 안 될 것 같다. 더구나 사촌동생 같은 경우는 처음 진단 시부터 사망선고를 한 보기 드문 악성 세포였다. 뭔가 이상을 느낀 시점을 따지더라도 고작 5개월이었으니 말이다.

사무실의 그 누구도 “본인에게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드라마 “로즈마리”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나도 예전 드라마를 보기 전에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러한 일에 대해 정답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순간 주변 분들의 인식에 따른 상황 대처가 있을 뿐이다.

나에게 죽음을 보다 슬프지 않게, 단지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드라마. 그 역할이 바로 “드라마 작가의 덕”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덧붙여 작가가 어디에선가 얘기한 말이 생각난다. “책은 보려는 의지를 가진 자만이 보는 것이지만, 드라마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더 책임감 있게 만들어야한다.”
4 Comments
별헤아림 2006.11.26 05:18  
  지난 주 토요일 예식장엘 갔다가, 딸 결혼식 하루전일 17일 금요일 밤에 저 세상으로 떠난 저희보다 4세 정도 많았던 복학한 남학생의 부음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정년도 8년 정도 남은 교사였는데 말이지요. 하필이면 딸 결혼식 하루 전에 그런 일이 생기다니요.

송인자님.
사무실의 그 누구도 '본인에게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님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하셨다지만 저는 동의합니다.
가족 중에서 말 한 마디 나누지 못 하고 사고로 죽어 버릴 겨우, 살아 있는 가족들은 평생 한이 맺힌다고들 하더군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이 세상과의 작별할 시간을 갖지 못함을 한으로 안고 떠났을지도 모르지요. 그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
정우동 2006.11.26 11:42  
 
스콧트 니어링처럼
일생을 명징한 의식속에서 살다 죽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세상만사를 다 의식하고 살수야 없겠지만 사람으로서 가능한한
모든 일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에 알릴 것은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장미숙 2006.11.26 13:10  
  무슨 말을 이어드려야할지 난감합니다.
앞서 가신 사촌동생분의 남은 꿈이 천국에서 이루어지길 빌며
송인자 작가님의 슬픔을 위로합니다.
죽음은.. 분명..끝이 아니라고 믿고싶습니다.
이 세상과 하직해야하는 사실을 모르고 가신
동생분의 고별이 못내 안타깝지만
우리가 아는 '정리'라는 것도 어디까지가 '정리'일지 막연하기만 합니다.



송인자 2006.11.27 20:50  
  사촌 동생은 최근에 사망한 게 아닙니다.
얼마 전에  사망 1주년이 지났습니다.
이 글은 작년에 써 놨던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얽힌  이 문제는  한 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어서
조금 다듬어서 이번에 문학저널에 제출해봤습니다.
따뜻한 마음 전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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