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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 바리톤님의 글을 읽고...

노을 8 760

스물 서넛 시절에 그 사람을 봤지요.
서늘한 이마에 우수에 찬 눈빛, 물들인 군용점퍼를 입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학교 뒷뜰의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샛길을 지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사무실 창문으로 가끔 내다보며 그가 좋아졌어요.
순전히 마음이 몹시 끌리는 그림을 좋아하듯이 말입니다.
반정부 데모가 일상이던 시절, 언제나 선봉장이 되어
주먹 불끈 쥐고 구호 외치는 열정적 모습도
배구시합 때 강 스파이크를 내리꽂는 날렵한 모습도
멀리서 훔쳐보기만 하며 가슴 한 구석에 그냥 담아두었지요.
젊음이 그런 일을 가능케 했고 숨겨둔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든 것이겠지요. 
그가 졸업을 하고 나도 그곳을 떠난 얼마 후
먼발치로 우연히 봤을 때도 바바리 깃 올려 세우고
잡지 한 권 말아 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보암직한 모습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해 선거철에 길을 가다 벽보 하나 문득 눈에 들어 왔어요.
이름 석 자가 낯익어 그 사람의 약력을 꼼꼼하게 살펴봤어요.
그러자 유난히 깊은 눈빛을 지닌 순수하고 지적인 얼굴 하나.
기억 속에서 살아나옵니다.
반가움에 얼른 사진을 자세히 봅니다.
멋지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넥타이 단정히 맨 초로의 남자가
나와 마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력을 보면 분명 그가 맞는데
사진 속의 인물은 전연 그가 아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나이의 흔적이 너무 심하게 보인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 사람이 그란 말인가?'
내 마음을 뒤흔들던 그 눈빛을 우선 찾아봤습니다.
그 시절, 깊은 생각에 잠겨 시린 듯 우수가 서려있던 눈빛을 기억하면서...
그러나 사진 속에서 나를 보고 있는 그의 눈은
아무 의미 없이 탁해 보였습니다. 우수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요.
뿐만 아니라 조금쯤 흐트러져 반듯한 이마 위에 드리웠던 머리는
반짝 반짝 윤기까지 흘리며 올백으로 넘겨져 몹시 상투적으로 보였으며
얼굴 전체에 욕심과 거드름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되려고 자신의 사진을 화려한 약력과 함께 내건
그의 얼굴에서 출세와 영달을 추구하며 살아온 그의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때처럼 묻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옛날, 불의에 대항하여 데모를 하고 늘 사색에 잠겨 있던
허름한 잠바 차림의 아름다운 청년은 어디로 갔을까요?
돌아서는 발길이 조금 힘이 빠지더군요.
아무리 혼자 그 모습을 좋아했지만 그 사람의 달라진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보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마저 맛보면서..
그가 변한 게 무슨 큰 잘못도 아닌데...
내게 남겨진 그의 젊은 날의 초상이 뭐 그리 대수라고...
혼자 웃음이 났어요.
다 그놈의 무정한 세월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젊은 시절의 순수한 모습은 끝까지 지니지 못한다 해도
그런 식으로 변해버리면 안된다고 왜 자꾸 나무라는 마음이 드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조그만 일에도 마냥 설레이던  여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아련한 추억에 잠길 수 있었던 것은
팍팍하고 메마른 삶에 잠깐 신선한 바람이 되어주어 좋았습니다. 

8 Comments
바다 2007.02.06 19:28  
  세월...
 노을님 가슴으로 흐르는 세월은 그랬군요.
우리 젊은 날의 그대
 그냥 초록빛으로만 남아있기를...
바리톤 2007.02.06 19:47  
  노을 선생님께서는 정말 아름답게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 저도 노을 선생님의 세대가 되었을때 선생님 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
이종균 2007.02.07 06:10  
  추억이 없으면 100년을 살아도 오히려 짧은 인생이라 했던가요?
절절이 흐르는 추억이 제 가슴에도 전이 되는 듯 합니다.
지차체의 장이 되려는 이름 모를 그의 욕망은 그놈의 무정한 세월 탓이 아니라 그 옛날 허름한 잠바 속에서 자란 꿈의 씨앗 때문이 아닐른지요?
불의에 대항했던 정의로운 마음들이 사심없이 꽃으로 피어날 때, 세상은 조금씩 낳아질 것도 같습니다.
노을 2007.02.08 17:30  
  바다님, 젊은 날의 초상은 빛이 바래기 때문에 더 아쉬울 밖에요.
봄마다 다시 피어나는 초록빛 잎새로나 만족하렵니다.

바리톤님
송월당님이 그러시던데 그러신가요?(ㅎㅎㅎ 너무 요령부득이지요? 미루어 짐작하시기를) 왜 아는 척을 하냐면 다채로운 모습이 보기 좋아서요.

이종균 선생님
예리하시고 정확하십니다.
맞아요, 그놈의 무정한 세월 탓은 하지 말아야지요.
허름한 잠바 속에서 자란 꿈의 씨앗...
그렇게 표현해주심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386 정치인들에 생각이 미치네요.
사심없이 꽃으로 피어났던들 얼마나 좋았을까요. 
선생님의 댓글에서 본질을 궤뚫는 혜안이 어떤 것인지
좋은 가르침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산처녀 2007.02.09 11:40  
  노을님
첫사랑은 재회를 하지 않아야 그
신비함을 오래 간직 할 수있다는 말이 실감 납니다.
그래요 . 순수한 모습만 간직 하고 있던 꿈이 깨어 지는 순간 ,
모멸이 오는 때도 있어요. 경험에 의하면 ㅎㅎㅎ
노을 2007.02.10 10:12  
  반가워라! 산처녀님.^^*
오랜만이셔요.
봄이 오니 또 얼마나 바빠지실까요.
겨울동안 시심은  많이 키우셨지요?
봄꽃 피어나듯 또 아름다운 시 고대한답니다.
저요, 저 글 첫 사랑 아니야요.
멋진 그림 바라보듯 바라보았다니까요.
그 시절엔 왜 분위기에 껌뻑 죽잫아요.
그런데 그 멋지던 분위기가 비록 사진에서나마
형편없는 모리배처럼 보여서 얼마나 기분이 이상하던지요.
그래서 세월이 유죄인가 싶어서 전에 써놓았던 글
바리톤님 올리신 글 보다가 생각나서 올린 거랍니다.
올해는 기필코 목도강가를 가고 싶어요. 그날을 위하여
기를 모아 둘까 합니다.
심우훈 2007.02.12 18:12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 봅니다..
그 분이 세월이 흘러 세속적인 욕심이 느껴지는 외모가 되었고
그 욕심을 들어내는 선거 에 출마하였고
각종 경력을 과장되게 자랑삼아  나열 하였더라도..

외모가 망가지는건 세월에 의한 노화이고
세속적이 욕심으로 보이는건 선거라는 시스템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모했던 기억이  미화시킨 그사람에대한  추억이
손상되어 속 상하시겟지만...
어쪄면 그 분은  정말로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 해보려
노력하기 위해 선거에 출마 했을 수도 있습니다..
세월이 외모를 망가트리는건 어쪌수 없지만..
사진한장 보고 그 분의 영혼이 타락했다고 생각까지는
할 필요 없는것 입니다.
그 사람을 직접 겪어보고 타락을 확인한 후에
실망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정치에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면
그 후보가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긴 시간 아련한 그리움을 주었던 그 고마움으로
그 사람의 지금까지 이룩해 왔던 점을 찾아보려는 눈으로
그 사람을 다시 보시면
무너져 가는 외모 뒤에 그동안 새로 쌓아올린
성취가 아름답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점을 발견하시면
노을님도 더 행복해 지지 않을 까요??



노을 2007.02.13 09:52  
  ㅎㅎㅎ 심우훈 선생님
정말 우연히 그 순간 제가 느꼈던 실망감을
세월의 무서움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뿐이랍니다.
그 사람이 어떤 세월을 살아왔는지는 저는 전연 몰라요.
정당도 정치도 모르고 어떤 선입견은 더더욱 없었고
그저 제 느낌에 그 사람이 정치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날의 기상이나 고상한 정신이 다 변질되었구나 싶었을 뿐이지요.
그저 한 울타리 속에 있으면서 이름과 얼굴만 알았던 사람으로
젊었기에 순수하게 보였던 모습이 세월이 흘러 변한 것이
너나 할 것 없는 아쉬움으로 다가왔기에 그 안타까움을 표현해 본 것인데 개인적인 헐뜯기의 의도는 전연 없었어요.
저의 추론을 너무 비약시켜서 받아들이신 것 같아 한 말씀 변명처럼 드립니다.
저는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이 행복해 하며 살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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