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연주.감상후기, 등업요청, 질문, 제안, 유머, 창작 노랫말, 공연초대와 일상적 이야기 등 주제와 형식,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회원문단은 자유게시판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스무해만에 문 연 비경 (남설악 흘림골)

이종균 6 1530
우리나라 1.500미터를 넘는 고산을 모두 오르고, 가리봉(1.518m)은 사실상 독립된 산이지만 설악산의 연봉처럼 느껴져 뒷전에 밀렸는데 마침 산 벗의 권유가 있어 토요산행에 신청을 했다.
 금요일부터 뇌성벽력을 치며 쏟아진 우박으로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번 비는 토요일까지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는데도, 우천을 가리지 않고 강행한다는 산악회의 강경한 입장에 지례 겁을 먹고 새벽 5시부터 행장을 갖추고 출발장소인 잠실로 가는데 사정상 취소를 한다는 연락이 온다.
 마음이 뒤틀렸지만 화를 내봐야 사람만 옹졸해질 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꾹 참았다.
 잠실역 주변 길가에 늘어선 관광버스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남설악 흘림 골행 버스가 있어 동승할 수 있는가 물었더니 반색을 한다.
 좌석의 반에 못 미치는 회원, 대장이란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예약을 해놓고 이렇게 안 나오면 산악회는 적자를 어떻게 메우느냐” 며 사뭇 훈계조의 열변을 토한다. 버스를 탄 사람이야 무슨 잘못이 있는가?
 어쨌든 내게는 꿩 대신 닭이다.
 흘림 골! 점봉산(1.424m)을 정점으로 한 남설악권의 비경을 몽땅 숨겨놓은 곳, 1985년 자연휴식년제 실시이후 20년 동안 발길이 막혔다가 지난해에  풀렸다니 원시생태가 그대로 보존되지 않았을까싶어 뭉클 호기심이 인다.
 인제군과 양양군, 내설악과 외설악의 살피를 이룬 해발 920미터의 한계령, 옛날에는 오색령이라 했다는데, 이 고개를 넘어 양양 쪽 2킬로쯤 되는 곳에 흘림 골 매표소가 있다.
 산길로 들어서니 이름 모를 야생화가 만발하여 향을 내 뿜고 아직은 연록색인 이파리들이 하늘을 가렸다.
 양양도호부 서북쪽 50리에 있는 매우 높고 가파른 진산(鎭山), 8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여름이 되어 녹는 까닭으로 설악(雪岳)이라 했다더니 중하의 날씨에도 냉기가 감돈다.
 가파른 길목을 가로막아 선 거대한 주목 한그루, 하늘을 찔러 선 곧은 기상이 아직 청춘인데 내장이 비어 보호수의 표찰을 달고 있다.
 왼편으로 비켜난 길을 따라 오르다 두 아름쯤 되어 보이는 또 하나의 거수를 만났다.
 산 약초와 수목에 관심이 많다는 일행 한 분이 이렇게 큰 엄나무는 처음 본다며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노거수로 지정할만한데 그거야 당국자의 몫 아니랴.
 바로 그 위쪽에 높은 바위에서 가냘픈 실 폭포가 길게 떨어지고 있는데 현판에 한글로 ‘여심폭포’라 쓰여 있다.
  어떤 자료에는 여신(女腎), 또 어떤 자료엔 여심(女深)이라 하였던데, 이 폭포 뒤 바위에 움푹 파인 모습이 여성의 깊은 곳을 닮았다하여 부르는 이름이란다. 두 낱말 모두 어떤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어쨌든 산 꾼들의 카메라는 잇달아 그 곳을 겨냥하고 있다.
 요즘이야 여성들이 권투, 씨름 등 격렬한 운동도 다하는 판국이니 약한 자가  여성의 대명사일 수는 없으되 이 폭포의 가냘프고 섬세한 모습이 어쩐지 여성적으로 느껴지니 여심(女心)폭포라 한들 어떠랴.
 한참 가파른 길을 기어올라 비좁은 고개에 이르니 왼편으로 등선 대(登仙臺)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있다.
 그 들목에 하얀 후박나무 꽃이 활짝 피어있다.
 이른 봄 춘신을 안고 오는 흰 목련을 품위를 갖춘 어진 왕후에 비길 수 있다면 초여름의 싱그러운 후박나무 꽃은 미모의 공주에 비길 수 있지 않으랴.
 1.100미터 높이의 등선 대, 필시 신선들이 하늘로 오른 곳일지라. 하늘을 그리는 산 꾼들이 장터처럼 모여들어 이미 질서를 잃었다.
 뾰족한 바위덩이 저 위에서 설사 내가 신선이 된다 해도 꽃잎 같은 얇삭한 입술 쭉 내밀고 뽀뽀하러 달려드는 손녀들을 못 잊어 어찌 하늘로 오른단 말이냐? 아서라! 이 어귀에서 둘레나 한번 살펴보고 내려가자.
 북동으로 언제 보아도 우람한 대청봉이, 남으로 점봉산의 부드러운 모습이 바라다 보이고, 서북으로 송곳 같은 침봉들, 그중에 칠형제 봉이 두드러진다.
 옛날 불제자 일곱 형제가 목욕하는 선녀들을 훔쳐보다가 모두 바위로 굳어졌다 전하는데, 저 너머 깊숙한 계곡 아래 있는 선녀탕이 여기서 보였을까? 수도자는 오로지 득도에 정진하라는 메시지 일게다.
 발길을 되돌려 내려오는 계곡엔 폭포도 많다.
 등선 대 폭포를 지나니 무명폭포가 나온다. 폭포가 하도 많아 이름을 다 붙이지 못한 것일까. 비스듬한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하얀 물살이 어쩌면  무명베를 널어놓은 듯도 하다.
 주전폭포를 스쳐 십이 폭포에 이르니 흐르는 물도 풍성하다.
 쏴 쏴 떨어져 부서지는 어기찬 울음, 내게도 한 때 저런 복받치던 설움이 있지 않았으랴.
 시내길 굽이굽이 돌고 떨어지는 저 물길을 열두 폭 병풍에 담아 규방을 가린들 어떠며, 한 많은 여인의 치마폭에 묵화로 그려본들 어떠랴.
 남설악 점봉산의 서편 기슭에서 선녀탕을 거쳐 오색약수터에 이르는 깊은 골짜기, 조선조 때 도적들이 이곳에서 엽전을 위조 했다고도 하고, 용소폭포 들목 시루떡바위가 마치 엽전을 쌓아놓은 듯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는 주전(鑄錢)골!
 사연이야 어떻든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계곡의 흐느낌도 가라앉는다.
 맑은 물이 잔잔하게 고인 선녀탕, 지금은 탐방객들이 줄을 이어 선녀인들 옷 벗고 목욕할 형편이 못되지만 이 계곡에 도롱뇽, 산천어, 쌀미꾸리 등이 서식한다니 어족탕이 된 셈이다. 이제 선녀들은 어디서 목욕을 할꼬...
 옛날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피었다하여 오색리(五色里)라 부르는 곳, 조선조 중엽에 오색석사란 절이 있었는데 이 곳 스님 한 분이 암반 틈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발견했다하며, 이 물은 철분이 많아 위장병, 신경쇠약, 빈혈 등에 효험이 있는 약수로 알려지고 있다.
 산길이 경내를 통하여 나있는 성국 사(城國寺), 행여 옛 오색석사가 아닐까 살펴본다.
 뜰 가운데 완자철책에 갇힌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하나 보물49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이끼 낀 얼굴에서 긴 세월이 느껴지고, 노천에 모셔진 금빛 찬란한 삼존불앞에 놓인 보시함은 입을 떡 벌리고 있는데 어디 독경소리 한 마디 들을 수 없다.
 주차장에 이르러 뒤돌아본 주전 골! 뾰족뾰족한 암 봉들 밑으로 깊고 길게 뻗은 계곡, 오늘 내게는 닭 대신 꿩이었다.
 
 
6 Comments
바 위 2006.09.18 14:57  
  선생님 ~

글 빛이 이리곱습니까 ?
머리속 활동사진
돌리며 세번을 읽습니다.
반갑고 좋아서요 !
心垢水不洗 라 했다지요...
(마음에 때는 물로 못씻으니)
선생님 존 글로 씻겠습니다.
땀땀히 시러 펴주시기 바랍니다.

박흥보 불러다가
주전골에서 돈타령해야겠습니다...
건안 하십 기원합니다 !!!

고맙습니다 @@@
이종균 2006.09.19 06:10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글에선 늘 산심처럼 깊고 포근함을 느낍니다.
짧은 코멘트 한마디도 곧 시이고 철학인 것을...
요들 2006.09.19 14:45  
  정말 오랫만에 산행을 한 기분입니다.
ㅎㅎ..  정말 저의 옛날?생각에 잠겨서
산행기에 행복한 시간을 보냄에 감사드립니다.
임승천 2006.09.21 06:10  
  이종균님의 글 잘 감상했습니다. 실제 산에 오르는 느낌입니다. 너무 좋은 글입니다. 종종 좋은 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우리 신작 가곡도 많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삭제 | 09.21
노을 2006.09.21 09:08  
  선생님, 요즘 보내주신 책 읽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같은 마음(자연을 닮은)으로 산다면
세상이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 해보았습니다.
귀에 선 단어가 참 많아요. 츠렁바위니 너설이니
모두 산악용어인가봐요.
어제 환경스페셜에서 보여준 산이 점봉산이 아닌가 싶어요.
하늘정원이라 하더군요. 자연의 신비와 오묘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그 작고 작은 생물들의 엄연한 삶의 법칙에
사람살이 같은 군더더기도 없으며
생과 멸이 극명하여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늘 산과 더불어 사시는 모습 부럽습니다.
보내주신 책 너무 감사하구요. 건강하세요.
송월당 2006.09.29 01:02  
  선생님 오늘 만나 뵙고 좋은 글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안와 본 방에 와서 선생님의 세밀하게 묘사하신 산행글 감동적으로 잘 읽었어요.
늘 건강하시어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감사드려요.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