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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잠

barokaki 1 759

낮    잠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남북으로 길게 누운 용마산의 동쪽 편이 완전히 보이는 꼭대기 층이다. 그는

거실의 밑바닥을 뚫을 듯이 솟아오르고 있는 메타스콰이어의 새로 난 잎사귀들과 이제 막 스러져 가는

벚꽃 잎들과 새 주둥이처럼 돋아나오는 단풍나무의 싹 들이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거칠고 딱딱한 묵

은 가지들과 서로 비벼대면서 내는 강바닥의 자갈이 쓸리는 것 같은 소리에 잠을 깼다. 하늘을 쳐다보니

검은 구름들이 회색구름과 뒤엉켜 있었고 그 광경이 붓을 씻은 수통에 물감이 휘돌아가는 것 같다고 그

는 하늘을 보면서 순간 생각했고, 필리핀 부근에서 상륙해오는 거대한 열대성 저기압의 위성사진 같다고

도 생각하면서 게으른 몸짓으로 겨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뒤 어기적거리며 걸어가 조금 벌어져 있는

 거실의 유리문을 마저 닫고는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자 강바닥의 자갈이 굴러가는 소리는 새의

지저귐으로 바뀌었다.


  잠시 후 그는 지극히 빈한하고 권태로운 손짓으로 루빈스타인이 연주하는 브람스 피아노4중주 3번이

 녹음된 음반을 C D 플레이어에 끼우고 막 잠에서 깬 그 소파에 보고 있던 소설책을 집어 들고 앉았으

나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읽던 곳이 어딘가, 전쟁을 상징하는 마르스의 불그스레한 눈동자로

 686 페이지를 찾아내기는 하였으나 10줄도 채 읽지 못하고 몸을 기울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 고명하고

 위대한 루빈스타인은 듣고 있지도 앉은 청중을 향해 연주를 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그건 결례가 아닌가

싶다. 그건 그렇고 그는 간간히 허공에 매달린 유리그릇을 튕겨대는 투명한 소리에 잠 속에 들어가지도

깨지도 못하면서 바이올린의 지저귐이 꼭 새가 지지배배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날고 있었다. 배

꽃이 하얗게 피어난 용마산의 한 자락이 멀리서 보면 옥양목을 펼친 것 같았는데 그는 새를 타고 꽃잎 위

를 미끄러지는가 하면, 미끄럼의 관성으로 공중제비를 돌면서 명치가 아뜩해지는 현기증을 맛보고 개살

구, 개복숭아, 늦은 진달래, 이른 철쭉들 사이로 새의 목을 꽉 쥔 채 어지러움으로 몸을 떨고 알라딘과 빗

자루를 떠올렸다. 그런 가운데 온화한 3악장이 봄바람같이 나풀나풀 대며 따뜻한 대기 속으로 그를 날

려 보내고 있었다. 따스한 대기 속에서 벚꽃이 화르르~르 호르르르르르르르…… 수평으로 날리다 하늘

로 치솟다 이윽고 길 위에 깔릴 때 그는 첼로가 내는 긴 저음에 맞추어 꿈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잠 속은 아름답고 황홀하였다. 나이와 종족이 구별되지 않는 어떤 여인이 살점이 모두 빠져나간 플라타

너츠 잎사귀 같은 드레스를 입고 편지를 한 장 그에게 던져 주었다. 그는 무려 천 페이지가 넘는 발신자

를 모르는 편지를 사진 찍듯 읽어낸 후 놀라운 사실에 흥분에 이르고 있었다기보다는 미칠 지경이었는

데, 자세히 보니 나이와 종족을 모르는 여인은 머리는 박쥐를 닮았고 발은 익룡을 닮았다. 편지의 내용

은 소위 ‘아담의 언어’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가득 차 있었다. 수도 없이 이어진 미로의 벽마다 거울속의

 거울이 그 거울을 비추고 또 비추듯 방들이 늘어서 있었고 방마다 비밀을 푸는 열쇠들이 가득 걸려 있었

다. 그 열쇠들은 휘황한 빛을 내면서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 열쇠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완벽한 팔등신

의 미인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가 열쇠를 들여다보는 순간 여인이 말을 건네었는데, 그 말은

 아담이 처음 뱉었다는 말과 똑 같았다. 그 말은 이 지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웠고 청아했으며 분명

했다. 열쇠로 된 여인이 말하였다. “*n@+/,.>  e 본@&쇠*..  k..f*J성j3@#,.gf,.” 옛날 희랍의 철학자들

은 말하곤 했다. 수(數) 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수는 이 세상을 가장 분명히 나누고 통합한다. 비례는

 아름답지 아니한가?  열쇠로 된 여인의 언어는 희랍의 철학자들이 말한 그런 수 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

녀의 말은 사물을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했으며 더 이상의 보탤 말도 뺄 말도 필요치 않았다. 그가 발

신자를 모르는 그 편지를 살점이 모두 빠져나간 플라타너츠 잎사귀 같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던 여인

에게 읽기를 마친 후 건네주자 그 때 까지 분명했던 모든 사물과 세상의 이치들이 예전처럼 흐려졌다. 그

는 더 이상 사물을 가리키는 횃불 같은 언어를 들을 수 없었고 세상을 열어주는 등대를 볼 수 없었다.
 
  그가 명징한 세상에서 빠져나오자 루빈스타인은 아직도 피아노 건반이 아닌 거꾸로 매달린 유리잔을

건드리고 있었고, 바람이 데리고 간 구름들 덕분에 거실엔 햇빛이 들어와 있었다. 


                                                        (2005. 4. 25)



*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담의 언어’는 종교적인 의미의 언어가 아니라, 진중권의 책 『미학오디세이』에서 말하고 있는 사물의 본성을 지칭하는 의미에서의 언어이다. 그가 꿈속에서  들은 그 말이 마치 사물의 본성을 나타내주는 것처럼 들렸기에(바라고 있었기에)  진중권의 ‘아담의 언어’를 차용(借用)하였다. 


1 Comments
서들비 2005.05.09 13:45  
  그동안 평안하셨어요!!
오랜만에 아주  꿈 같은 꿈 이야기를 올렺셨네요.
행복한 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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