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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의 난실

이종균 3 1738
우리 집의 난실

  언젠가 등산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기슭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찾아 헤매는 것을 보고 나는 호기심이 일어 그리로 가봤다.
  모두 손에는 쇠 갈고랑이를 들었는데 심산유곡도 아닌 이런 곳에 산삼이 있을 리도 없고, 알고 보니 야생춘란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구부정한 자세로 땅만을 살피며 잡초속의 춘란을 찾는 그들은 도시 그일 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 감히 말 한 마디 붙여보지 못할 눈치들이다.
  어쩌다 특이한 변이종이나 희귀종 하나만 발견하면 한 촉당 기백만 원에서 천만 원 이상을 받을 수 있다니 벌이치고는 큰 벌이이며 그러다보니 물욕이 생길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난을 사랑해왔다.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에 따른 매란국죽을 사군자라 하여 특별한 애착을 가져왔는데 이는 그들의 고고한 자태가 충절을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문벌 높은 선비들은 짙은 묵향을 맡으며 화선지 위에 사군자를 자주 그렸는데 이는 값진 예술작품을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을 하기 위해서였다니 우리 조상들이 정신적 내면생활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가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으며, 사군자 중에서도 난을 가장 즐겨 그렸다니 난을 사랑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나보다.
  다만 옛 어른들은 난을 그리며 마음을 다스린데 반하여 현대인은 이를 물질적 소득원으로 생각하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인간 가치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케 한다.
  고서화에 나타난  난의 그림을 보자! 한결같이 산야에 자생하거나 바위 기슭에 피어난 모습들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며 사랑했던 조상들의 정신과, 자연을 훼손해서라도 개인적인 소유욕을 채워야만 하는 현대인과의 인식차를 또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나 또한 사군자 중에서 유독 난을 좋아한다. 난 중에서도 무성하고 화려한 양란보다 가냘프고 단출한 동양란을 더 사랑하는데 그것은 고결하고 기품 있는 자태와 은은하게 풍기는 향 때문이다. 
  군자(君子)란 남성을 상징하는 낱말이나 나는 난을 볼 때 마다 여성으로 느껴진다. 동양란의 아담하고 청초한 자태는 청렴결백한 선비의 기개라기보다 달빛아래 비치는 교양미 넘치는 사대부집 아낙내의 모습이며, 올곧은 이파리는 충신의 우국충절이기보다 일부종사를 위해 목숨을 내걸던 춘향이의 정절 같기만 하다.
  내가 초급 봉급자이던 시절, 난에 매료되어 뜰 한쪽이 세평 남짓한 비닐하우스를 짓고 난을 모으기 시작했다.
  봉급이 나오기가 바쁘게 남대문 난 시장을 샅샅이 뒤져 송두리째 난으로 바꿔오기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매일 퇴근하는 대로 먼저 난을 살피는 것이 일과인 나는 난의 상태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물을 많이 줬네’ ‘환기를 안 시켰네’ 하며 아내에게 짜증스런 질책을 일삼으니 아내의 고충인들 오죽했으랴.
  그런 가운데도 세월은 흘러 난분은 작은 온실에 가득 채워졌다. 굶어도 배고프지 않을 것 같은 포만감을 느끼며 조석으로 난실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허약한 아내는 ‘당신은 내가 죽고 없어도 난을 돌보며 혼자서 잘 사실 거예요’ 뼈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그러던 4월 어느 날, 식목일을 넘긴 날씨가 너무나도 따사로워 난실의 비닐 막을 모두 벗겨버렸는데 그날 밤 공교롭게도 이상한파로 진눈개비가 내린 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그 싱싱하던  난 잎이 모두 새까맣게 멍들고 부러져 전쟁을 치른 폐허가 되어버렸다.
  온기 잃은 난실, 팔다리가 부러진 자식들을 바라보는 아픔으로 꺾인 난 잎을 매만지며 ‘아내의 고생이 사무쳐 춘삼월에 서릿발이 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그 뒤로 난을 기르지 못했으며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 흐르고 나는 일터를 따라 가족을 떠나 혼자 살게 되면서 그 숱한 날들, 마음 붙일 거리를 찾은 게 한국 난 석부 작 목부 작이다.
  매 휴일마다 명산을 찾아 오르고, 내려오는 길 산속에 나뒹구는 썩은 소나무 뿌리 하나씩을 배낭위에 매고 내려와 겉을 태운다음 쇠솔로 문질러 나이테가 나오도록 깔끔하게 다듬어 그 모양새에 따라 적당한 곳에 풍란, 석란 콩란 등을 붙여 수반위에 세워놓는다.
  때로 강가에 나가 모양 좋은 돌(수석)을 주어다가 역시 난을 붙인다. 나는 이 작업을 하면서 조각가가 조각을 하듯, 미술가가 그림을 그리 듯, 아름다움을 창조하가 위하여 이리보고 저리생각하며 온 정성을 다 기우리니 이는 나의 예술 활동이요 작품인 셈이다.
  이렇게 10년을 기른 것이 60점을 넘었다. 서울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모든 가재도구를 다 버리면서도 이것들을 싣고와 내 서재 옆에 조그마한 난실 하나를 드려 진열하고 창넘어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용 틀림처럼 휘고  꼬이고 뒤틀린 고목들이 정글을 이루고, 깎이고 패이고 구멍 뚫린 크고 작은 돌들은 흡사 해금강을 연상케 한다.
  이 괴목과 돌들의 허전한 곳에 붙어서, 수반에서 피어오르는 수분을 찾아 뻗어 내리는 싱싱한 뿌리들은 어린아이의 새하얀 손처럼 신선하다. 왜소한  이들 풍란의 모습은 갈색의 고목에 붙어 피어남으로 오히려 더 푸르르고, 메마른 돌에 붙어 자라므로 더더욱 생기 넘치니 나는 가끔 이들의 생태를 살피며 그 모질고 강한 생명력에 감탄하곤 한다.
  난의 재배기술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조직배양으로 양산되고 있으니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도 자연의 생태를 재연해 볼 수 있는 풍란의 목부 작, 석부 작을 뜻있는 회원님들께 권하고 싶다.   
 
 
3 Comments
장미숙 2006.09.29 19:05  
  선생님께서 정성을 들이신 난들의 모습이
하나 하나 정갈한 작품입니다.
이제는 사모님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정우동 2006.09.30 00:57  
  동기창은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하여 타고난 재능뿐만이 아니라
讀萬卷書 行萬里路 하여 배우는 일도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비단 그림뿐 아니라 인생살이 만사가 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의 난실에서 보는 괴목과 기암에 부친 난이 예술입니다.
향과 빛이 좋은 야생자연의 난을 분이나 난실로 옮겨와 가까이
두셨으니 부럽습니다. 윤기나는 잎이야 두고 두고 볼 수 있지만
꽃은 쉬 조락하고 향기도 따라 스러지고 마노니 그림에 그려
두거나 마음에 품어 두었더니 이 또한 즐겁습니다.
추사의 난과 석파의 난에다 이정이 검은 비단에 금물로 친
묵란이 볼만합니다. 그런데 돌에 붙었던 석란을 괴목에 붙이면
목란인지 석란인지 아리송합니다.

임희지처럼 "나에겐 꽃을 기를 동산이 없으니" 고인들의 묵란을
마음 밭에나 키워 볼 참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지워지지 않아)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초상화는 마음속에
그려 둔 초상화라고 하였습니다.
.
송월당 2006.09.30 10:50  
  선생님의 난실을 보니 어느 전문가의 난 재배실 같네요.
저처럼 잘 가꾸시는 정성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글과 사진에서 난의 아름다움을 감상 잘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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