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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유월에...

노을 5 1328
요즘 가곡사이트에 들어오면 박판길의 '유월나비'랑 정회갑의 '두고온 산하' 그리고 장일남의 '비목'과 변훈 작곡 '귀향의 날'이 계속 들려온다.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비감해지는 곡들이다.

그렇구나 유월이구나. 유월이라는 그 부드러운 어감에도 불구하고 유월은 우리들에게 먼저 그렇게 비장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하기는 이제 우리, 그리고 우리보다 약간 더 젊은 50대 후반 정도의 세대가 다 세상을 뜨고 나면 그 유월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그때를 노래한 가곡들도 뭐가 이렇게 우울해 하며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세대들에게는 육이오에 대한 이야기보다 6.10 항쟁이 어떻고,  민주화가 어떻고 하는 담론이 더 실감나고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육이오를 다섯 살 때인가 겪었다. 너무 어려서인지 앞 뒤가 끊어진 몇 몇 장면만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달구지 뒷 꽁무니에 앉아 다리를 길 위로 늘어뜨리고 소풍이나 가는 듯 신나서 흔들던 그 하얀 신작로는 뙤약볕 아래 유난히 희게 빛났었다.
삐그덕 삐그덕 들려오던 바퀴소리와  등뒤에 가득 쌓여있던 피난 보따리도 기억에 선명하다.
우리가 갔던 그 시골집은 마당이 넓었고 장독대 가장자리에 무섭도록 검붉은 자줏빛 맨드라미가 피어 있었다.
피난살이라 해봐야 그저 시골나들이 정도로 우리는 넉넉하게 살았다. 그 집이 누구네 집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버지 신세를 많이 졌던 분의 집이라 했다. 
그러나 그 휴가같은 피난살이를 나는 길게 누리지 못하고 아버지와 둘이 전주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갑자기 목이 쉬고 컹컹거리는 수상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초등학교 일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박혜경이네 집은 전주에서 유명한 박소아과였고  그곳에서 법정전염병 '디프테리아'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모두 피난을 가고 텅빈 도심에 그 병원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니 정말 혜경이네 아버지는 훌륭한 의사이셨던 것 같다.
지금은 사라져서 그 병명조차 낯선 디프테리아는 호흡기 질환으로 매우 위험한 병이었다고 한다. 마침 치료약도 딱 한 사람 분만 남아 있었다. 
폭격이 잦은 위험한 날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때부터 빈 집에서 나를 돌보며 치료를 시작하셨다.
안방 책상에는 온집안의 이불이란 이불을 모두 쌓아 올려놓고 제일 큰 이불로 책상 아래까지 덮어씌운 다음 폭격이 있는 날은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시가지 쪽을 유심히 살피시던 아버지가 벼란간 '숨어라' 하고 외치면 나는 북북 기어서 책상 밑으로 숨어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편대를 지어서 날아오는 폭격기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웅웅거리며 들려오면 으례 아버지는 대청 마루에 서서 향방을 살피곤 했는데 우리 집은 교외에 있어서 한 번도 그 폭격의 타겟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하다.
 시가지에 퍼붓는 폭격 장면을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요란한 굉음과 시뻘건 불길, 그리고 구름처럼 피어나는 연기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덜덜 떨릴만큼 무서운데 거기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싶었다.
병원에 가는 날은 누군가 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병원 가는 길에도 몇 번인가 소위 기총소사가 있었다. 나를 데리고 가던 그 아저씨는 날렵하게 나를 안고 언덕 아래 구덩이 같은 곳으로 숨곤 했다.
콩밭 이랑으로 몸을 숨겼을 때 코를 찌르던 풋내와 붉은 흙덩이, 그리고 콩잎에 스쳐 따끔거리던 느낌만 기억에 남을 뿐 무서웠다거나 하는 기억이 없는 건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아저씨가 내 생명의 은인인 것을 나는 다 자라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분도 무언가 아버지께 신세를 져 그렇게 위험을 자처하고 내 병원행을 도왔다고 나중에 들었지만 웬일인지 큰 감동을 받진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 은혜를 모르거나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내가 살아 존재하게 된 데에는 그렇게 세 사람의 손길이 숨어있었다. 물론 그 후의 삶 전반에 걸쳐서도 내가 모르는 사이 많은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 깊은 상흔은 어린 눈에도 도처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 심부름가는 언니를 따라 어딘가를 가고 있었는데 길가 무덤 옆이며 논두렁 할 것 없이 여기 저기에 아직도 연고를 찾지 못한 이름없는 주검들을 보고 혼비백산했던 기억과 무섬증은 지금도 생생하다.
피난 전이었나 후였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민군 부대가 우리집에 떼지어 몰려와 군장을 풀었던 기억은 정말 아슬아슬하다.
자기 키보다 더 큰 장총을 멘 소년병이 어린 눈에 무척 신기했다. 한 끼 정도 밥을 해먹은 다음 다행히 그들은 떠났다. 우리 집을 끝으로 동네 앞은 논과 밭 천지여서 도저히 비행기 정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게 이유였다.
안 그랬으면 그 후 벌어진 원한과 복수, 밀고와 린치의 몸서리치는 소용돌이에 우리도 휩쓸렸을 것이다.
낮과 밤이면 인공기와 태극기가 번갈아 걸리던 흉흉한 시절, 해묵은 감정이나 원한을 풀기 위해 한 동네 사람끼리 고발과 증언으로 죽고 죽이는 일이 날마다 벌어졌다.
높은 언덕받이에 있던 어느 집 마당에 사람들이 몰려가 그 집 주인을 때려죽이는 모습도 낮은 지대에 살던 내 어린 눈에까지 환히 보이던 끔찍한 시절이었다.
어른들의 수근거림으로 알게 되었던 그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던 혼란과 두려움이 지금도 이런저런 사람살이에서 문득문득 보일 때면 이상한 좌절감을 맛보곤 한다.
다시 또 유월이 왔다.
귀향의 날이나 비목이나 두고온 산하를 들으며 어린 날 겪었던 육이오를 떠올려 본다. 그러나 내 기억은 수많은 원통한 죽음과 이별을 겪은 그 시절의 영혼들 앞에 그저 한낱 감상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5 Comments
김원용 2007.06.12 18:04  
  읽다 보니 전주 하숙집 할머니 이야기 생각이 납니다.
할머니 고향은 만경평야 어드메쯤인데, 아래 위 동네가 남북으로 갈려
오늘 이쪽 사람이 죽어 나가면, 내일은 저쪽 사람이 죽어 나가고,
이렇게 동네 사람 반 이상이 없어지고 서야 끝났다는데 아직도 서먹서먹한 아래 윗 동네라하면서 목메어 하셨지요.
사실 내 고향은 지금 공항이 들어서서 복잡하지만 그때는 섬이어서
국군이나 북쪽 군인들은 쳐다도 안 보았지요.
코앞이 인천인데 상륙작전 전에 합포 사격은 볼만 했었다지요.
어른들은 불안하시기는 했겠지만, 피난도 안가고 소 돼지 잡아가며 잔치하듯 육이오를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전쟁이 잦아들 즈음 대학 다니시던 제 맏형님이 전쟁터에서 유골이 되어 오시고
어머님이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유월의 아픔은
얼마나 더 가야 끝날까요?

노을님 글 잘 읽고 갑니다.
해야로비 2007.06.12 21:18  
  기회가 되어, 금강산과, 개성을 이번 5월과 6월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육이오를 몸으로 체험 하지 못했던 저로서는...실로, 가슴에 와 닿지 않던 북한의 실상을 눈으로만 보면서 예전에 빨갱이...빨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길...곳곳에 빨간 글씨...산의 큰 바위, 바위마다...빨간글씨....
헐벗고 굶주린다고 하여도...그저 먼나라의 일같이 느껴졌던것이 실상을 보면서 가슴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젊은 청소년, 대학생들이....가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정영숙 2007.06.13 09:25  
  6.25를 생각하면 가슴에서 또 전쟁을 합니다. 내가 초등4학년때 경남함양에서 격었던 그 전쟁 말로다 표현을 못하지요. 요즘 젊은이들 그 전쟁을 안 격어봐서 간 큰 소리 지르고 하지만 우린 아니지요. 유월이 오면 생각나는 그 전쟁!
노을 2007.06.13 10:32  
  김원용님의 육이오는
저의 단편적인 기억에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었군요.
조금만 더 버티었더라면 싶은 절절한 아쉬움까지
그 아픔에 더했을 것 같아요.
어머님의 소리없는 눈물이 통곡보다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해야님
역시 명사라니까~~
어떻게 니북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가셨을까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쩌구 더쩌구 하는 세상 모르는 젊은이들은 두 말 없이
니북에 가 살게 해야 된다고....

정영숙님
너무 어려서 멋모르고 겪은 전쟁 이야기를 올린 것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그때 일을 영 잊은 것 같아서입니다 .
어린 눈에도 사람들이 미쳐날뛰게 되는 그 이유가 어렴풋 느껴졌는데
살면서 보니 그런 일 있으면 더하면 더했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요. 
자 연 2007.06.15 21:33  
  노을 빛 수줍더라  바람소리 이르는데

유월 꽃 정원에서  날 봐달라 하는구나

유우 월  이제는 지쳐서 고만붉어 졌으라


존 글에
근대 역사실록이 책장처럼 넘겼집니다
존 글길 밝혀 주심
고맙습니다...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