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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

송인자 4 1549
인생은 아름다워!
                             
                                                   
  무더웠던 8월의 금요일 저녁, 어머님의 고희연(古稀宴)을 맞아 아들, 딸, 사위..며느리. 손자들까지 왁자하게 들이닥치니 신발장이 넘쳐나고 현관앞도 벗어놓은 신발로 빼곡하다. 서울, 여수, 계룡, 경주, 광주에서 효성스러운 자식들이 모두 모였다. ‘세상은 넓고 사건과 사연은 많기도 하여라!’ 사람이 많으니 몇 끼 안 되는 밥 먹고 치우는 것도 전쟁이다. 어느 한 놈, 안 먹고 구석에 쳐 박혀 자도 모를 일이다.

  잔칫날인 토요일, 우리는 꽃단장을 하고서 행사장인 웨딩홀을 향해 12시쯤 집을 나섰다. 9년 전 회갑연(回甲宴)을 크게 했으니 고희연은 가까운 사촌끼리 모여 식사나 하자고 한 자리였는데, 친인척과 자식친구들이 모여드니 100여명이 넘었다. 목사님을 모시고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큰 자식인 우리 부부를 시작으로 차례대로 어머님께 절을 올렸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모두들 화기애애한데 막내 도련님이 많은 생각들로 감정이 격해진 듯 눈물을 훔친다. 그 모습을 보자 회갑연 때 누구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눈물을 찍어대던 생각이 났다. 어머님의 회갑연은 초가을, 근사한 별장식 식당에서 치루었다. 너른 정원에는 은행나무와 잘 가꿔진 향나무가 즐비했고 잔디 가장자리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향기를 뿜는 화창한 날이었다. 어머님과 집안 여자들이 아리따운 한복을 차려입고 격식에 맞게 손님을 접대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10월의 여린 해살이 기웃하고 바람이 살랑대는 늦은 오후가 되자 대개의 손님들은 떠나고 친인척만 남게 됐다. 그러자 남편은 한복 입은 어머님을 들쳐 업은 채 “울지도 말아라. 내일일은...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노래를 부르며 꺼이꺼이 울었다. ‘왜 저렇게 슬픈 노래를 부를까.’속으로는 책망하면서도 그 심정을 알기에 나도 삐죽삐죽 눈물이 나왔다. 둘러서 있던 가족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날의 쓸쓸하고 처연했던 분위기를 아직껏 잊지 못한다.

  회갑 이태 전, 큰 아들인 남편은 아버님이 남긴 많은 재산을 없애고 수십억 부도를 냈다. 남편은 원래 법학 전공자로 몇 번 도전한 사법고시에서 낙방을 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주변의 권유로 고시를 그만두고 ‘엔지니어링’과 ‘건설설비’회사 2개를 연이어 설립했던 것이다. 회사가 처음부터 내리막길을 간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몇 천 만원의 수입이 생겼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경험미숙과 IMF라는 시대적 상황까지 겹쳐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박처럼 나쁜 짓을 하다 그리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심하게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현실은 냉정했다. 그 부도에는 형제들까지 얽혀 집안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그런 상황이 되면 쓰러져 눕고 매일 슬피 울어서 자식들 가슴을 짓이겼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도 쉬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이지적인 어머님은 강했다. 가장 먼저 현실을 받아들이셨다. 평생 주변으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받으며 사셨던 분이니 얼마나 참담하셨을까. 어머니가 그렇게 버티고 계시는 동안 시댁 형제들은 최고의 우애를 보이며 보란 듯이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부도를 극복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이 넘었다. 가장 크게 고생을 한 이는 셋째 시동생이다. 치과 의사라는 직업은 금융업계에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는 형님의 부동산등을 부채와 함께 안아야 했다. 부담스러웠으나 은행의 강권과 회유에 못 이겨 사인을 했고 긴 세월동안 그 빚에 시달려야했던 것이다. 그때는 시동생 병원이 우리 건물 3층에 있었는데, 빚쟁이들이 수시로 올라가서 행패를 부려 정말 괴로웠다. 어떤 이들은 진료 중에도 들어가서 멱살을 잡고 난리를 피웠다. 본인이 쓴 것도 아닌 형님의 빚인데 동생이 무슨 죄라고,

  지금도 시동생을 쳐다보면 우리가 서울로 떠나오기 전 섣달 그믐날 밤이 생각난다. 그날 그는 형제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007가방을 가져와서는 내용물을 마룻바닥에 들이부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개수의 통장들이었다. 그는 그걸 부어놓고 통곡을 했다. 절망감으로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도 가슴 막히는 일이었다.

  그는 본인 몫의 유산을 모두 팔고, 아이의 우유 값도 아껴 그때까지 갚은 돈이 수억 원이라고 했다. 모두들 숙연해져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는가. 위로란 그저 돈 뭉치를 턱 안기는 것 말고는 없었다. 큰형이 재기할 때까지 조금만 더 참으라는 어머님이나 형님 말도 야속했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는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라고 폭탄선언을 하더니 통장을 챙겨 나가 버렸다. 시동생이 사라진 현관은 어두웠다.

  그리고 거의 5년 이상 모든 왕래가 끊겼다. 그는 대학 다닐 때도 조카들 생일 하나 잊지 않고 선물을 챙겼던 사람이다. 집안의 대소사를 누구보다도 정성스럽게 챙겼던 그가 아버님 제사 때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행동에 대해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그는 장인의 도움으로 순천에 개업을 했고 실력을 인정받아 번창해 차근차근 빚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시간은 힘이 셌다. 이제는 모든 빚이 청산되었단다. 아울러 상처받았던 마음도 차츰 아물게 된 것 같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특히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뎌준 셋째 동서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미안하고 감사하다.

  시동생들 자랑을 하려면 이뿐 아니다. 방학 때면 조카들에게 예쁜 선물을 챙겨주는 동서나, 명절에 식구 많은 형님네를 위해 자신의 봉고차를 넘겨주고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둘째 시동생, 때마다 조카들 공부를 지도해주고 용돈도 챙겨주는 막내 도련님 등, 내가 친정에서건 어디서건 시댁 얘기를 하면 모두들 신기해한다. “세상에! 정말 그런 형제들이 있느냐”고 되묻기도 한다.

  동생들이 지탱해주는 동안 남편도 열심을 다해 살았다. 이제는 수입도 많아졌고 놀라울 정도로 자제력이 생겼다. 남편만이 아니라 형제들 모두 비슷하다. 부잣집 자식으로만 살아왔다면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이해심과 관용심, 진실성 등의 덕목을 보인다. 별 굴곡 없는 평온한 삶이 왜 좋지 않을까만은 인생 전체로 볼 때 깊은 시련도 결코 나쁘지 만은 않은 것 같다. 불운도 인간의 의지 앞에서는 무력해진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삶이란 게 사랑의 순환작용이니 한마음으로 슬기를 모아 대처해 나가면 극복하지 못할 게 없는 것이다.

  우리는 회갑연 때와는 달리 사진도 많이 찍고 유쾌하게 떠들며 춤도 췄다. 어머님 친구들과 시이모님 등 나이 드신 분들이 더 잘 노신다. 손자들에게는 마이크 넘어갈 새가 없다. 그날 저녁, 어머님은 늘 응접실 한 켠을 지키고 있던 15년 된 인삼주를 따셨다. 인삼의 진한향이 실내에 확 퍼졌다. 자잘한 인삼뿌리가 가득 든 대형 병은 작은 아가씨가 ‘금산’ 살 때 갖다 준 것이다. 어머님과 함께 살 때 ‘저걸 언제 따시려나?’ 싶었는데 벼르던 날이 오늘이었나 보다.

  남편의 4형제는 모두 ‘순천고’ 출신이다. 나는 올해의 체육대회 집행기수인 셋째 시동생이 자랑스러워 망설이다 이 글을 쓴다.
                                                           

  <2011년도 ‘순천고등학교’ 회보에 실린 글>                          수필가 송인자
4 Comments
송인자 2012.03.20 21:49  
오랜만에 들러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습니다.
정다운 이름들이 보이니 반갑습니다.^^
들른 김에 글 한 점 남깁니다.
자주 찾도록 하겠습니다.^^
열무꽃 2012.03.21 07:35  
송인자님의 따뜻한 글을 다시 접하니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궁지에 내몰린 남편을 잘 보필하여
잘 이겨내고 계시는 님을 이야기에
박수 보냅니다.
장미숙 2012.03.31 14:43  
차분하게 풀어내신 사랑의 고백이 감동스럽습니다.
아픔을 딛고 일어서셨으니..
기운차게 희망의 나날을 걸어가소서~~
폴틸리 2012.04.16 22:01  
고난이있었지만 행복한 가문입니다.
고난은 싫지만 이기고 나면 정상에 오른 대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기고나면 ....
그 이기는 힘은 가족의 사랑이고 정인 것같습니다.
작은 어려움에도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는 가정도 많은데
그 어려움을 이긴 당신의 시동생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훌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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