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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습작> 엄마의 붉은 치맛자락 中 악마의 유혹 <3>

별헤아림 0 1777
2003. 12. 25. 목요일.

3. 크리스마스.
 대한민국의 대부분 역사(驛舍)가 초현대식으로 그 웅장함을 더해 간다. 수원역이
그러하고 서울역이 그러하고 동대구역이 그러하다. 2004년 1월1일에는 서울역에서
정부의 높은 분이 참석한 가운데 중대한 행사가 있을 모양이다.
 그 옛날 지린내 풍기는 공중화장실과 땟국에 절은 노숙자와 호객행위하는 파싹한
염색머리의 여인네들로 연상되던 역 근처의 풍경에 비하면 참으로 쾌적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잠시 저돌적이던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다. 동대구역에서 빤히 보이는 수협
근처 화물트럭 옆에 자신의 차를 주차시켰지만 기차 시간이 불안하여 택시를 탔다.
모퉁이를 우회전하여 동대구역 입구에 내리는 거리는 불과 오백 미터 정도나 될까.
요금은 물론 기본요금 1500원이다.
 나이도 적당히 있어 보이는 택시 기사가

  "이래 가지고서 택시 기사 해 먹겠어요?"
  "...... ?"

무슨 말인가 대답을 않고 멀뚱하니 있는데, 또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이래 가지고 택시기사 해 먹겠어요. 네?"
 부가적인 묻는 말에  약간 거슬린다는 투로 '남자가 되어 가지고 얄밉게 낭창하
긴...... .'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도 그 남자의 어투에 맞추어 감정을 배제한 같은 어
조로 대꾸한다.

 "그럼 택시기사 하시지 말고 실업자 하시면 되겠네요. 집에서 노시든가요."
 "...... ."

 한 번 찔러 보았다가 녹녹치 않은 직선적 반격에 꼬리를 내린 기사는 공손하게 잔
돈을 거슬러 그녀에게 내민다. 자리를 찾아 앉은 그녀는 그리 신경 쓸 것도 아니지
만 기분 좋은 것도 아니란 생각에 잠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곧바로 그
녀는 악마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에 가슴이 벅차 오름을 느낀다.
 호텔에서 머물고 있다는 악마는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하더니 피곤하단
다. 상경하는 그녀에게 도로 호텔로 오란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거리엔 캐롤 송도 들리지 않는다. 요란한 크리스마스 트리도 눈
에 띄질 않는다. 교회로 성당으로 향하는 발길들만 서두를 뿐. 어디에고 풍요로움은
없다. 오늘 같은 날은 손님이 더욱 없다는 택시 기사의 말이 성가실 뿐이다.
 좁은 복도를 지나 호실을 확인하고 벨을 누르자 악마가 문을 연다. 피곤하다면서
비둘기가슴털마냥 보드랍고 가라앉은 회색의 목소리다. 기운 없이 싱글침대에 눕는
다. 그녀도 악마의 곁에 엎드렸다. 악마의 니트 자켓에서 갓 세탁한 향기가 난다.
악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악마가
그녀의 가녀린 손을 잡았다. 건조한 손끝으로 악마의 전류가 흐른다. 그것은 그리
강해서도 아니고 단지 닿는 그 순간부터 그녀를 마비시키고 당기는 장치이다. 그
순간 악마가 그녀에게 무엇을 지시해도 그녀에게 악마는 더 이상 악마가 아니다.
그녀는 그 이상을 준비하고 애견하기 때문이다. 악마의 두껍고 건조한 살갗을 통해
악마의 전류가 가녀린 그녀의 손에 흐른다. 악마는 그녀에게 흐르는 뜨거운 전류를,
그 떨림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지, 아니면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꼭 잡고 떨지 못 하게 잡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잠시 악마는 벌떡 일어났다.
가자고.
 악마는 그녀에게 아침 겸 점심을 대접했었고, 그녀는 악마와 함께 서울역으로 향
했다. 공항처럼 변모한 맞이방에서 잠시 기다렸다. 에스카레이트를 내려가며 다정한
친구의 안부 전화를 받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악마는 소리 없이 감싸 안는다.
 객실에 들어서자 좌석은 드문드문 겨우 3분의 1 정도의 승객들이 않아 있을 뿐이
었다.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도 악마는 말이 없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악마의 모
습이 기운이 좀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다아나믹한 악마의 열정은 간 곳이 없다.
그녀는 악마를 향하여 옆으로 돌아앉았다. 그리곤 편하게 손이 닿는 악마의 배 위
에 왼손을 얹었다. 오른손으론 악마의 왼손을 더듬어 잡으면서 눈을 감는다.
 그녀가 묻는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남쪽으로."
 "고래 잡으려고?"
 "...... ."

 악마는 기운이 없는 듯 대답이 없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또 입을 뗀다.

 "오늘이 12월 25일. 나 결혼기념일이야."
 "...... ."
 "17년 되었어. 악마는?"
 "결혼한 지? ...... , 37년."
 "난 17이란 숫자가 좋아."
 "왜?...... ."
 "대학 졸업하고, 매월 17일만 되면 봉급을 받으니까."
 "...... ."

 악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나갔다. 서녘 하늘에 붉은 노을이 강렬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그녀의 얼굴에 반사된 노을이 아픔처럼 악마의 눈동자에 어른거린
다. 걷어 젖힌 차창으로 낙동강의 광활한 모래사장이 그녀의 시야를 스치우는가 하
면 이내 사라져 시간 속으로 멀어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꿈을 향하던 그들에게 이별의 시간은 다가온다. 그들에게 주어
진 6시간의 만남과 300마일의 거리. 그들에게 주어진 시공(時空)을 초월한 만남은
이제 아쉬움으로 남는다. 악마는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서 통로를 따라 나
간다. '안~뇽~'이란 외마디의 인사말 한 마디와 그녀를 혼자 남겨 두고. 그녀는 잘
가라는 뜻으로 악마에게 손을 가벼이 들었지만 일어서서 배웅하진 않았다.
 이제 그녀는 혼자다. 악마와 인생을 꿈 꿀 수는 없다.
 그녀는 혼자서 남쪽나라로 갔다. 해 뜨는 나라.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파도가 일
렁인다. 남쪽바다의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부서진 후에야 듣는다. 스치는 찬 기운에
몸을 사리며 옷깃을 높이 세웠다.
 악마가 태어나서 어머니를 여의고 찾아온 곳. 악마는 건강한 신체에 깃들 수가 없
다. 아파서 고통받는 병약한 신체에 파고든다. 그리고는 고통을 없애고 헌신적으로
힘을 불어넣는다. 상대로 하여금 건강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힘찬 사랑을 느끼게
한다. 악마의 손에 한 번 몸이 닿기만 하면 그 전류는 육체를 마비시키고, 순식간에
영혼마저 중독 된 사랑에 가두어 버린다. 중독 된 영혼에게서 악마는 더 이상 악마
가 아닌 것이다. 신에게 갈구하던 구원의 손길이 신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악
마의 손질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때 이미 악마는 더 이상 악마가 아니고 신은 더 이
상 구원자가 아니다. 신을 만나러 교회를 찾았고, 아픈 가슴을 쓸어안고 성당으로
발길을 돌리던 그녀에게 그리도 찾아오지 않던 구원의 손길이란 것이 악마를 통해
전달되리라곤 꿈에라도 생각하지 못 했었다.
 그녀는 남쪽 바닷가에서 해뜨는 동녘을 향해 저물도록 앉아 있었다. 해변에 하나
둘 불이 켜지는 저녁 무렵 겨우 자리에서 더딘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등 
뒤로 하나 둘 켜지는 불빛을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다. 어둠이 내리며
흐느끼는 바다를 통해서. 그녀의 등뒤에서 켜지는 붉고 푸른 불빛은 그 하나하나가
그대로 바닷가 사람들의 삶이고 고단함이고 드러냄이다. 돌아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불빛과 늘 놀아 주는 친구는 바다다. 때로는 성난 파도로 심기를 불편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물결 잔잔함으로 위로를 주기도 한다. 그 어떤 감정의 변화보다도
선행하는 것은 존재론이다. 늘 지켜 봐 준다는 것, 결코 적은 아니라는 사실보다 더
큰 위안이 어디 있으랴.
  그녀의 두 눈에도 하나 둘 켜지는 불빛이 붉게붉게 어리운다. 한 방울 두 방울
불이 켜지는 쪽쪽 차디찬 모래 바닥 속으로 스민다. 불빛은 인공적이다.
 하늘을 올려다봐도 자연의 별은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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