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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잘 계시지요?

노을 10 1332

그의 눈썹은 유난히 짙었다.
살짝 치켜올라간 긴 속눈섭을 지닌 아름다운 눈과, 환하게 웃는 모습은 갸름하고 거므스레한 얼굴을 빛나게 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손과 체구를 지녔지만 성정은 급하고 불 같았다.
나는 그처럼 적당하고 보기좋은 손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그는 그 손으로 못하는 게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별나게 장미를 잘 가꾸던 그는 우리 아버지다.

오월!
동네에 빈 집이 한 채 있는데 음울한 침묵과 시나브로 사위어 가는 퇴락을 못견뎌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담 너머로 붉디붉은 장미꽃이 얼굴을 내밀었다.
초록 덤불에 뒤덮인 낡은 담이 금새 활기를 띤다.

흔히 화원에서 파는 장미꽃 말고 저렇게 피어나는 장미를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가 책을 좋아하고 문학적인 감수성이 풍부했던 반면 손으로 하는 일에 그리 섬세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가슴으로 느끼는 감성 대신에 손으로 하는 어떤 일에도 어려움을 몰랐으며 특히 꽃을 가꾸는 일은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지금 그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많은 꽃들이 자라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제일 공을 들여 가꾸던 장미꽃밭은 그 중 으뜸이었다.  요즘은 장미의 품종이 수없이 시도된 개량으로 그 색깔이며 모양이 다양해졌지만 그 시절에만 해도 주로 홍장미가 많았고 백장미는 참으로 귀했었다.
아버지가 피워낸 백장미의 그 순결하고 보드랍던 꽃잎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붉다 못해 검은 빛을 띤 흑장미도 참 고혹적이었다.
아버지의 장미 사랑은 각별해서 밤마다 꽃밭에 전깃불을 끌어내 불빛에 따라나온 진딧물을 잡아내는 일이 큰 일과였다. 꽃송이 송이마다 조심스럽게 잎을 벌려 속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있는 진딧물들을 나무젓가락으로 집어내시던 모습은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했다.

동네 어귀에 자리잡은 우리집에 장미꽃이 만발하면 동네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의 찬탄이 끊이지 않았다. 한 번은 우리 집 앞을 지나던 할머니 한 분이 문득 굽은 허리를 쭈욱 펴며 '하~ 고것참 이쁘구나' 하고 다시 구부정한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고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셨다. 
학교가 멀어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데 늦잠이라도 잔 날이면 지각을 각오해야 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한아름 장미꽃다발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내가 들고 간 풍성하고 화려한  장미꽃다발은 선생님의 꾸중을 감탄과 기쁨으로 바꾸어 놓는 마술 지팡이가 되리라는 걸 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일로 집안이 기울고 뜰도 없는 집에 살게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처마 밑에 나팔꽃을 심어 지붕위로 넝쿨을 올려 꽃을 피워내셨다. 나는 마음이 아파 속으로 생각했다. 얼른 돈을 많이 벌어 뜰이 넓은 집에서 살게 해드려야지.
그래서 옛날처럼 온갖 화초를 다 심고 장미꽃도 마음껏 가꾸며 사시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럴만큼 돈을 벌어본 적도 없지만 그럴 새도 없이 아버지는 그 급한 성격처럼 빨리 우리 곁을 떠나버리셨다. 

여기저기 담장 너머 초록 수풀 사이로 요요히 피어있는 붉은 장미는 내게 그리움이다.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를 어떻게 무장해제 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섯 자식 가운데 유난히 내 앞에서는 봄눈 녹아버리듯 누그러지던 아버지의 기억은 내게 늘 다사롭기만 했다.

아버지의 초상은 그리하여 내게 아름다운 눈웃음과 햐얀 이가 드러나는 환한 미소, 어느날인가 무엇때문인지 내게 대한 미안함으로 꼭 쥐어주던 따스한 손길로 남아 있다.
엄마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지만  나는 그럴 때조차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립고 엄마는 가슴 아프다.

오월, 모두 다투어 부모님의 좋은 기억을 얘기하기 바쁘고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인품으로 묘사한다.
우리 엄마, 아버지는 결점도 인간적인 실수도 많았던 분들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마음에 사무친다. 부모가 잘 나고 훌륭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공이가 많이 박힌 나무등걸이라도 그늘은 짙고 넓듯이 부모는 부모니까 좋은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눈물을 안습이라 한다 해서 어이없어 했는데 어쩐지 자꾸 안습이 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 엄마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해드린 적도 없는 딸이 고작 혼잣말을 해볼 뿐이다.     

거기서 잘 계시지요? 엄마, 아버지....         

10 Comments
김원용 2007.05.17 12:31  
  애틋하게 가슴에 와 닿는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이던가
어떤 이가 돌아가셨다고
온종일 모든 방송이 정규 방송은 끊고
온통 그분 얘기를 슬픈 목소리로 떠들어 대었지요.

너무 슬퍼서 한참이나 울다보니,
내가 왜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번쩍 정신이 들더군요.

내 어머니 아버지를 멀리 떠나 보낼 때도
이리 슬퍼 했었는지....
번쩍 정신이 들더군요.

더구나
요즈음 간혹
호상이라면서
웃고, 떠들고, 술 드시는 상가를 다녀 오면
번쩍 정신이 듭니다.

이건 아닌데 하고 말입니다.
김상언 2007.05.17 13:22  
  공허한 가슴에 시리도록 아픔과 그리움이 다가오는것은 저도 아버지가 일찍돌아가셔서 그렇습니다.약주를 좋아하셔서 집에오시면 노래부르시던 아버님과 더운여름저녁 평상에서 아버지와 같이 잠을 잘때면 잠버릇에 자꾸 땅 바닥에 떨어지면 안아서 다시 재워 주시던 아버님의 손길과 목소리가 그리워 집니다.
바다 2007.05.17 23:48  
  노을 언니!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노을언니의 부모님을 기리는 언니의 마음보다는
 아주 세련되면서도 순수하고 감동을 주는 언니 글 속에 빠져 버립니다.
 어쩌면  컴 앞에 앉아 단숨에 써 내려간 글...
 감히 존경스럽습니다.
노을 2007.05.18 09:06  
  김원용님, 김상언님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얼마 전에 종영된 '고맙습니다'라는 아름다운 드라마를 보고나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쓰고 싶어요.
부모님에 대한 생각과 기억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한없는 이야기꺼리가 되지요.
그리움이란 참 아름다운 감정입니다. 살아서 보듬어 주시고 떠나신 다음엔
그리움으로 남는 우리네 부모님들을 이 오월에 다시 모두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노을 2007.05.18 09:08  
  바다님
시인께서 주시는 칭찬이니 기쁨으로 받을께요.
바다님의 칭찬으로 아침을 열었으니 오늘 하루가 즐거울 것 같은 예감!!!
되도록이면 이번 가곡교실에 참석하여
바다님의 넓고 포근한 품에 또 한 번 안겨봐야 할텐데....
오경일 2007.05.18 15:39  
  저희 아버님도 화초를 너무 좋아 하셔서 화초 때문에 야단도 많이 맞았지요.
아파트로 이사 하기전 아버님을 위해서 공기 좋고 땅 넓은곳에서 분재를 땅에 심어 정원을 꾸며 드리고 싶은 꿈을 가져도 보았는데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아파트로 이사를 와서 못내 아십기도 합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저도 손해를 좀보았지만
제가 혼날때는 여동생이 말려 주곤 했지요.
노을님도  아버님이  따님이라 더 예뻐 하셨나봅니다.
가정의달 내마노 모든 회원님들  윗분들 아래분들 모두 행복하시길 빕니다.
장미숙 2007.05.18 19:00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거기서 잘 계실 것입니다.
매끄러이 흐르는 글을 따라 내려오니
어느새 제 가슴 속에 스며든 뜨거움으로
저도 거기서 잘 계실 우리 부모님 생각에 젖어있어요.
장미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슬퍼하시는
노을형님 사랑합니다~
해야로비 2007.05.18 21:54  
  글을 읽으면서...내내, 노을님은....어머니를 닮으셨나보다......유랑인님은, 어머니, 아버지....두분의 잘 하시는것을 모두 타고 나셨나보다는...생각을 했습니다.

노을님....전....아버지 얼굴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봉숭아나, 아름다운 꽃밭을 보면....웬지모르게, 아버지를 그려보게 됩니다.  꽃밭앞에서 흙손을 들고, 화단을 가꾸시는 사진속의 얼굴을 가진 내 아버지....
노을 2007.05.19 10:00  
  제 글이 장미숙님 마음 더 아프게 해드렸을 것 같아요.
아직 너무 생생한 시간들일텐데....
잘 추스리고 계시지요?

해야님,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잘 짚으시네...
이번에 그 낭랑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사회를 보신다니
바다님도 오신다니 필히 가곡교실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실은 그놈의 자이브 때문에 땀에 젖어 녹초 되는 바람에 한동안
빠지려 했는데... (시간이 어중간해서리~~)
얼굴도 생각나지 않을만큼 일찍 아버지를 떠나보내셨군요.
어쩐지 조숙했을 것 같은 짐작이 공연한 게 아니었어요. 
해야로비 2007.05.23 22:05  
  오늘 낮에 노을님 생각을 했어요.  월요일에 오시라고 전화를 드릴까?...하고....

가곡부르기에서 뵙고 반갑게 인사드릴께요~
근데....우리집 남편은 "철없는 아내"라는 닉네임을 제게 붙여 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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