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오늘아침 빛고을 광주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왔다.
그녀는 내게는 세살이 위인 언니같은 친구다.
그녀는 몰락한 양반집의 세째딸이였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그녀의 아버지는 양반의 이름만 목에건 무기력한 아버지였다 .
보처자도 못하는 아버지 덕분에 굶기를 먹기보다 더하는 그런 가정이였다.
그런 가정의 그녀의어머니는
그래도 양반의 체면을 손상 시키지 않으려고 많은 신고를 하면서 사는 분이였다 .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발로 밟아하는 솜틀 가게를 하였다.
발로 기계를 매일 덜컹 덜컹 밟는 일이였다
먼지를 먹지않으려고 무명수건으로 입을가리고 틀어낸 구름같은 솜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긴 막대로 두드려서는 먼지속에서 얇게 펴놓고는 하였다,
그런 그녀의 어머니는 과로로 인해서 생식기가 빠지는 불상사 까지 생겼었다
춘궁기 봄이 되면 아직 철 이른 보리를 베여다 가마솥에 들들 볶아서는 발로 찧는 디딜방아에 찌여서
키로 까불면 그옆에서 나는 날름날름 집어먹고는 하였다
쌀 되박이나 얻어 먹는집 딸이라서 못먹게도 못하고 지금 생각하면 그어른의 속이 얼마나 쓰렸을까?
그런집의세째딸인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남의 집에 아기보기로 들어갔다.
소년기 청년기를 그렇게 남의 집에서 보낸 그녀는 펜팔로 영광에 사는 청년과 사귀여서 결혼을하였다.
어려운집의 장남과 결혼을 한 그녀의 삶은 역시 고달펐다.
우체국에 근무를하는 남편을 따라 멀리는 제주도에서 영광 광주등 을 옮겨 다니면서 그녀는
삼남매의자식을두었다.
겸손하고 성실한 어머니를 닮아서 그녀의 자식들도 아주 성실한 자식들을 두었다
큰아들은 수산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의 장학금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였다.
그아들은 일본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또 그곳학교의 장학금으로 영국유학도 다녀왔다.
아주 예쁜 일본 여성과 결혼을하고 그아들은 일본에 체류하게 되였다.
나는 그친구에게 고생해서 자식을 키워 일본 여성에게 주어버리고 얼마나 서운하냐고하니까
"괞찮아 나는!
"이곳보다 그곳이 잘 살수있음 ,나는 내자식많큼 은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저만 잘살수있음"
그녀의 한 맻인 말을 듣는순간 나의 코끝은 찡하기만 하였다
한국의 대학으로 돌아오고 싶은 그아들은 한참 돈으로 교수를 임용하던때에 자기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모국에는 돌아오고 싶지않다고 일본에 주저앉아 버렸었다.
그런 그녀의 아들이 우리나라 특허청에 취업이 되여서 돌아오게 되였다고 하는 기쁜 전화였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나이 먹어가면서 아들을 가까이서 못보는 쓸쓸함을 나는 간혹 그녀의 얼굴에서
훔처볼수있었다
.아들 손자가 보고 싶으면 일년에 두어번 비행기 타고 일본을 오가는 그녀에게 자식 잘둬서
호강 한다고 추켜 주고는 하였었다.
큰딸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종합병원에 수간호사로 근무하고 작은 딸은병리학을
전공하고 병원의 병리검사실에 근무를한다.
옛날에 내 친정아버지께서 제사를 지낸 조기의 알을 꺼내 주시면서
"자야 이 다음에 커서 시집가면 ,
이 조기알 만큼 번성하거라" 하신 덕담을 지금도 잊지않고 참참이 내게 전화해 안부묻고 또
우리 친정아버님의 묘소도 찾아가고 그리 심덕이 고운 친구다
그런 그 친구의 아들이 그 어머니의 고생을 대신해서 한을 풀고 금의 환향 기쁜 소식을 듣고
나도 마음이 마냥 기쁘기만하다
오늘 아침 모처럼의 즐거운 소식에 내마음도 절로 노래가 나오고 흥겨워짐은 그녀의고생스러움에
나도 많이 안타까웠기 때문일것이다
"자야 언니 참 수고많으셨소. 이제 남은 많은 날은 매일이 하루갗이 즐거움만 갖고 사시오"
그녀는 내게는 세살이 위인 언니같은 친구다.
그녀는 몰락한 양반집의 세째딸이였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그녀의 아버지는 양반의 이름만 목에건 무기력한 아버지였다 .
보처자도 못하는 아버지 덕분에 굶기를 먹기보다 더하는 그런 가정이였다.
그런 가정의 그녀의어머니는
그래도 양반의 체면을 손상 시키지 않으려고 많은 신고를 하면서 사는 분이였다 .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발로 밟아하는 솜틀 가게를 하였다.
발로 기계를 매일 덜컹 덜컹 밟는 일이였다
먼지를 먹지않으려고 무명수건으로 입을가리고 틀어낸 구름같은 솜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긴 막대로 두드려서는 먼지속에서 얇게 펴놓고는 하였다,
그런 그녀의 어머니는 과로로 인해서 생식기가 빠지는 불상사 까지 생겼었다
춘궁기 봄이 되면 아직 철 이른 보리를 베여다 가마솥에 들들 볶아서는 발로 찧는 디딜방아에 찌여서
키로 까불면 그옆에서 나는 날름날름 집어먹고는 하였다
쌀 되박이나 얻어 먹는집 딸이라서 못먹게도 못하고 지금 생각하면 그어른의 속이 얼마나 쓰렸을까?
그런집의세째딸인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남의 집에 아기보기로 들어갔다.
소년기 청년기를 그렇게 남의 집에서 보낸 그녀는 펜팔로 영광에 사는 청년과 사귀여서 결혼을하였다.
어려운집의 장남과 결혼을 한 그녀의 삶은 역시 고달펐다.
우체국에 근무를하는 남편을 따라 멀리는 제주도에서 영광 광주등 을 옮겨 다니면서 그녀는
삼남매의자식을두었다.
겸손하고 성실한 어머니를 닮아서 그녀의 자식들도 아주 성실한 자식들을 두었다
큰아들은 수산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의 장학금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였다.
그아들은 일본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또 그곳학교의 장학금으로 영국유학도 다녀왔다.
아주 예쁜 일본 여성과 결혼을하고 그아들은 일본에 체류하게 되였다.
나는 그친구에게 고생해서 자식을 키워 일본 여성에게 주어버리고 얼마나 서운하냐고하니까
"괞찮아 나는!
"이곳보다 그곳이 잘 살수있음 ,나는 내자식많큼 은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저만 잘살수있음"
그녀의 한 맻인 말을 듣는순간 나의 코끝은 찡하기만 하였다
한국의 대학으로 돌아오고 싶은 그아들은 한참 돈으로 교수를 임용하던때에 자기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모국에는 돌아오고 싶지않다고 일본에 주저앉아 버렸었다.
그런 그녀의 아들이 우리나라 특허청에 취업이 되여서 돌아오게 되였다고 하는 기쁜 전화였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나이 먹어가면서 아들을 가까이서 못보는 쓸쓸함을 나는 간혹 그녀의 얼굴에서
훔처볼수있었다
.아들 손자가 보고 싶으면 일년에 두어번 비행기 타고 일본을 오가는 그녀에게 자식 잘둬서
호강 한다고 추켜 주고는 하였었다.
큰딸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종합병원에 수간호사로 근무하고 작은 딸은병리학을
전공하고 병원의 병리검사실에 근무를한다.
옛날에 내 친정아버지께서 제사를 지낸 조기의 알을 꺼내 주시면서
"자야 이 다음에 커서 시집가면 ,
이 조기알 만큼 번성하거라" 하신 덕담을 지금도 잊지않고 참참이 내게 전화해 안부묻고 또
우리 친정아버님의 묘소도 찾아가고 그리 심덕이 고운 친구다
그런 그 친구의 아들이 그 어머니의 고생을 대신해서 한을 풀고 금의 환향 기쁜 소식을 듣고
나도 마음이 마냥 기쁘기만하다
오늘 아침 모처럼의 즐거운 소식에 내마음도 절로 노래가 나오고 흥겨워짐은 그녀의고생스러움에
나도 많이 안타까웠기 때문일것이다
"자야 언니 참 수고많으셨소. 이제 남은 많은 날은 매일이 하루갗이 즐거움만 갖고 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