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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멸망과 지식인 역할(펌 추가)

아리랑 1 773
조선의 멸망이 오로지 일본에 의하여만 진행된 것일까.
물론 조선말기의 부정부패한 관료들과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부호들 및
기타 친일분자들이 매우 많은 활동을 하였겠지만,

계몽운동가 들은 당시 무슨 일을 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의 1차 목적은 일본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아닌 조선 조정(정부)의 전복이 목적이었다.

착취당하는 민중들을 구제하고 교육시켜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이상이었으며,
이는 조선의 근간을 부정하고 흔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동학의 후예에서 사회주의자가 상당수 배출)

특히 계몽운동가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천주교,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가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조선의 멸망이 필요했다.

그러나 계몽운동가 들은 일본과 같은 목적인 1차 목적이 성취된 후에 일본에 의해 토사구팽을 당하는 일들을 겪으면서, 다시 그들의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일본 정부(반도내의)의 전복을 목적으로 항일활동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계몽운동가는 애국자라는 등식과 함께 모두가 친일파라고 보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군주제가 민주주의제도로 바뀐 것을 매우 정당했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나,
우리 역사에서 현대의 민주주의와 같은 체제가 시행된 적은 없었다. 언제나 제정일치 또는 군주제가 통치의 기반이었고 수천 년을 그대로 살아왔었다.

조선 조정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며 나름대로 격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계몽운동가 들은 새나라 건설이 목적이었기에 조선 조정에 기회를 주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들이 민주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사분오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도
1차 목적인 민족의 독립이 최우선이었으므로 함께 일하기도 하였으나, 2차 목적은 모두 달랐기 때문에 1차 목적이 성립된 후 서로 간에 전투를 불사할 정도로 많은 사회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해 본다.>

1. 우리는 분재라고 안다. 큰 나무를 작은 화분에 미니어쳐와 같이 심는다.
  산에 가서 큰 나무를 쳐다보면 되지 뭐하러 작은 화분에 분재를 하는 가 ?

2. 일본이 왜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왜 대동아공영이라는 단어를 앞세웠는가 ?
  심심해서? 땅이 비좁아서?

3. 일본이 임진왜란 또는 그 이전부터 주변 나라들에서 약탈해간 금붙이 은붙이가
  총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

4. 한반도에서 나온 유물들의 개수와 대륙에서 나온 유물들의 개수를 비교해 보았는가 ?

5. 우리는 왜 여기서 왜곡된 역사를 왈가왈부하고 있는가 ?
  우리는 겨우 100년 전의 일도 잘 모르고 있다. 태백산맥의 줄기도 모르고 있었다.
(차령산맥이 없다고 이제 밝혀지지 않았나?)
그래서 우리는 바보인가?

6. 일본은 당시에 충분히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금을 동원했다.
  어디서 동원했겠는가 ?

7. 일본 정부가 지리라고 생각했으면 전쟁을 시작했겠는가. 한 사람 군인 말고..

8. 겨우 뉴딜정책으로 한 숨 돌린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iln D. Roosevelt) 대통령의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은 약소국 후진국이었으나 점차 연속된 전쟁승리와 2차 대    전 참전을 계기로 초강대국으로 올라선 것이다.


<아펜젤라 사진전을 보고>


이번에 배재학당 120주년 기념 아펠셀라 사진전이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무심코 지나갔으나, 유심히 살펴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느껴집니다. 님아, 직접 아펜셀라 사진전을 보세요. 인터넷에도 있을거예요.

첫째, 아펜셀라는 사진을 모으면서, "seoul" 지역에 속한 사진은 따로 보관했습니다.
둘째, 그 당시 궁궐은 "old palace" 라고 표시하여서 따로 분류했습니다. (왜일까요? seoul의 궁궐은 new palace인 것입니다.)
셋째, "east gate of seoul(동대문)" 1905년에 새롭게 지어졌습니다. (보수공사가 아닙니다. 아펜셀라는 establish 라고 기록했습니다.)
넷째, 아펜셀라가 찍은 혹은 구한 전체적인 seoul의 풍경을 보세요. 500년 조선의 도읍지라고 절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느낀점이 이것 외에도 많지만, 단지 제 느낌이니까 틀릴 수도 있겠지요. 저도 아무 생각 없이 볼때는 그냥 지나쳤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우리 배재학당은 처음부터 서울 정동에서 건물이 지어졌고 해방후까지 다른 곳으로 이전한 적이 없습니다. 서재필, 이승만, 주시경 등이 거쳐간 학교이며, 독립신문이 또한 우리 학교 지하실에서 인쇄되어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사진 속에서 보면, 건물이 최초 건물에서 나중에 바뀝니다. 학교 주위의 배경 또한 바뀝니다. 1917년(?)에 추가 증축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건물을 헐고 바꾸진 않았어요. 건물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모양이 달라요. 저도 예전에는 전혀 못느꼈었지요.

의심하면 안되는데... 우리 모교의 학교 역사까지 의심해야 하나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1 Comments
달마 2005.06.24 16:40  
  감사 합니다...

특별히 이런 좋은 공간에 정신적 보약을 주신 글 만날수 있는
기회 주심에 특별한 감사드립니다.
지식과 예지 우리 역사를 고찰함에 희망도
어려운 닥치면 헤쳐갈 자신도 가질수 있음이란 말씀공감하오며 .
청량한 바람소리 신선하듯 땀땀히 좋을 글 더부탁드려야겠습니다.
건안 건필을 기원하며 글 막음합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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