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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나의 나 된 것은

사은 1 2001
나의 나 된 것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피어나듯 죄로 물든 내 심령에서 신비하게도 복음의 꽃이 피어났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게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절망의 나락에서 나를 끌어올리신 신의 은총이 나를 온통 감격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런 영광스런 날을 맞이하는 것은 감격 그 자체였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내게 있구나 싶어서 마음 속으로 감사 기도를 드렸다. “오! 주여 당신은 나 같은 탕자를 만나 주시고 이젠 복음 전도자로 당신의 몸 된 교회로 나를 부르시는군요. 나 같은 미천한 종이 당신의 영광스러운 교회의 양 무리에게 간증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여셨군요!”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여는 광주 평안교회 첫 집회는 감격 그 자체였다.
 
  내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눈에 익은 비행장 활주로에는 겨울 바람이 차갑게 불었다. 구름 층을 뚫고 하강하는 비행기 동체가 비포장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처럼 덜컹거렸을 때 눈을 감고 있기에는 나의 상상력이 너무 극단으로 치달았다. 즉시 나는 눈을 떴다. 행여나 이 비행기가 추락한 다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그래도 살만큼 살았으니 여한은 없지만 여기서 끝장이 난다면 그리운 사람들을 세상에 두고 혼자 가는 길이 조금은 쓸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내 불안함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매섭게 불었어도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10여분 빨리 도착한 것을 알았다. 평안교회 장로님이 나를 픽업하러 나온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황송하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내 젊은 시절 방황하며 헤맸던 광주! 그 절망의 도시 광주에 내가 복음전도자가 되어 새로운 나의 삶을 만든 하나님의 기적을 전하기 위해 지금 광주에 입성하는 것이다. 2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나는 복음 전도자요, 목사요, 음악가요, 시인이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재주를 동원하여 오직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내 고향 광주에 도착한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에서 짐을 찾아 나오는 나에게 “짐 확인 잘 하셨죠?”라는 그 짧고도 불유쾌한 질문만 아니었어도 나는 오직 마중 나오는 장로님을 기다리느라 무료했을 것이다. 오후 1시에 도착 할 거라는 내 말에 두암동에서 공항까지 달려 올 평안교회 장로님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여행용 바퀴 달린 가방과 15년 넘은 가죽 책가방 그리고 카메라 가방까지 가졌으니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올망졸망 들고 나오는 나에게 짐 확인을 잘 했느냐고 묻는 공항직원의 의중이 심히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수상했나?” 그러나 나에게 그 말을 한 직원은 교대하고 다음 근무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그 궁금증을 풀 길이 없었다. 부흥회 인도하러 오는 목사에게 짐 확인을 했느냐? 고 묻는데 왜 그랬을까? 나는 내심 내 인상에 대해 상념에 잠긴 것이다. 그들이 승객의 짐 관리를 하기 위해 때로는 기분상하는 질문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에 대해 나는 불쾌함을 금할 수가 없었지만 일단 다음 근무자에게 대충 얘기를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내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목사님 ! 어디 계세요?” 나를 픽업 나온 평안교회 장로님이었다. 자녀들과 셋이서 나를 마중 나온 것이다. 나는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그의 승용차에 몸을 싣고서 우리는 평안 교회를 향해 막힘 없이 달렸다.
 
  1977년 내 생에 놀라운 사건이 두 가지나 있었다. 하나는 결혼이고 그리고 하나는 신학교 입학이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말았다. 결혼을 통해 한 여자를 만나고 그것이 또 나를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하나의 운명적인 만남이 된 것이다.
 
  종교 개혁자 칼빈이 제네바에서 파렐을 만나 역사적인 제네바 종교개혁을 이루는데 공헌 한 칼빈을 파렐이 “당신이 이 일을 피하여 도망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거다.”는 엄포로 그를 붙잡아서 칼빈을 제네바에 머물게 한 것처럼 나의 아내는 개망나니 같은 나를 붙잡아 신학교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동생을 잃고 깊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나보다 4살 아래 동생이 중 2학년 때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하다가 풍으로 쓰러져 반신 불수가 되었던 것이다. 착하기 이를데 없었던 내 아우 광연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방황할 때 홀어머니를 위로하는 것은 동생의 몫이었다. 동생은 학비를 벌기 위해 숭의 중학교를 중단하고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다. 숭의 중은 미션 스쿨로써 학동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도 시골에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우리를 미션 스쿨로 전학을 시켰던 것이다. 광주에 반듯한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했으니 나만 성실하게 공부를 했어도 모두 다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사는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가수공부를 한답시고 곶감을 빼먹듯이 가산을 축내기 시작했고 동생은 급기야 학교 등록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중국집 보이로 일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불행해졌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우리 삼 형제가 광주로 이사와서 어머니는 우리 모두 훌륭하게 커주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동생은 중풍으로 쓰러져 15세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버렸고 큰아들은 방황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집 팔아 달라고 술 먹고 난동을 부릴 때마다 예배당으로 달려가 밤새워 기도를 하셨다. 그럴 때면 광주대성교회 사모님은 추운 겨울 초라한 형색으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는 어머니 등에 담요를 덮어 주면서 “방집사님! 화준이도 정신차리면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 탕자 어거스틴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로 아들이 성어거스틴이 됐데요. 방집사님 기도를 하나님이 꼭 응답하실 겁니다”라고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함께 기도 하셨다.
 
  이 시절 애꿎은 셋째만 수없이 배를 골았다. 그 때 나보다 8살 어린 동생은 그렇게 정처 없는 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유난히도 눈이 큰 아이! 석이가 불쌍했다. 집 팔아내라는 나의 성화를 못이기고 한때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집에 버려 두고 집을 나가셨다.
 
  며칠을 굶은 우리는 동네 쌀가게에서 외상으로 쌀을 사다가 밥을 해먹고 재봉틀, 문짝,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이 될만한 가재도구는 모두 중고품가게에 내다 팔아서 먹고살았다. “형! 배고파!”하고 보채는 동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구차하게 가재도구를 팔아다가 동생을 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대책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 때 나는 꿈을 잃어버렸다. 살아갈 의욕도 없었다. 동생을 잃고도 정신을 못 차린 내가 결정적으로 변화를 받고 새사람이 된 것은 광주대성교회 부흥회 때 이옥식강사라는 여자 전도님사님이 인도하는 부흥 성회에서 은혜를 받고 변화된 것이다.

  나는 은혜를 받기 전에 나를 자학하면서 황금동 어느 술집에서 무전취식을 하며 행패를 부렸었다. 그 목적은 교도소에 가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 어리석은 방법을 택함으로 하나님께 반항했던 것이다. 교도소에서 몇 개월 푹 썩다 나오면 뭔가 달라지려나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머니도 안 계신 집에 동생 하나 남겨 놓고 나는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고 붉은 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나는 김수연 부장 판사로부터 정상을 참작하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2개월만에 출소하여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것이다.

  “뒤에는 애굽 병 앞에는 홍해 내 갈길 가로 막혀 막막할 때에 모세의 능력의 지팡이를 내게도 주옵소서 주시옵소서”
 
  지금도 이 부흥성가를 부르면 눈물이 난다. 얼마나 부르고 또 부르며 울었던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나는 통회하는 심정으로 예배당을 떠나지 않았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나에게 그 집회는 내게 소망을 주었던 것이다. 동생을 떠나 보내고 그것이 내 탓이라 생각하며 나는 그 집회에서 철저하게 회개했던 것이다. “엄니!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마당을 시멘트로 고칠게요.”했던 동생! 나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엄니! 형이 맘 잡으면 잘 할거라”고 홀어머니를 위로했던 그 동생! 지금은 무덤마저 흔적 없이 사라진 나의 동생 광연이! 밤이면 별빛 내리는 효천 공동묘지에 앙상한 뼈만 하얗게 땅속에 남아있을 나의 동생. 나는 효천 공동 묘지에 동생을 묻었고 1980년 가을에는 이질 아메바로 죽은 딸아이를 그 곳에 또 묻었었다. 이 시절 나에게는 모든 것이 불행의 연속이었다.
 
  자동차가 두암동 평안 교회당 앞에 도착했다. 배 목사님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 주었다. 25년 전 모습보다 더 연륜이 묻어 나는 50대 사나이와 나는 힘찬 포옹을 했다. 가슴이 따듯했다. 그는 나를 진정으로 반기고 있었다. 광주 신학교 시절 나에게 “김전도사는 한국의 스펄죤이 될 거라”고 덕담을 했던 그의 한마디는 25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말이 씨가 되어 나는 부흥강사가 되어 그의 품에 안긴 것이다. 여기에 오기까지 그 긴 세월이 걸린 것이다. 꿈이 이루어 진 것이다.
 
  그는 예배당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었다. 입당 후 처음으로 집회를 하는데 25년 전 신학교에서 같이 꿈을 키웠던 나를 강사로 초청한 것이다. 그는 성실하게 목회를 했다. 20년 전 개척하여 조립식 가건물에서 어엿한 예배당으로 부흥한 것이다. 목회학 박사과정도 마치고 학위를 취득한 그가 아름답게 보였다.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서 새삼스럽게 옛날 일들을 간증하는데 눈물이 났다.꿈만 같았다. 내가 작사 작곡한 찬양과 자작시 그리고 수필과 지금까지 지나 온 간증을 할 때 모든 성도들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나는 지나 온 날들을 달관이나 한 듯이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한 인간이 방탕한 생활에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신의 은총을 입은 것은 참으로 기적 중에 기적이다.
 
  세 째 날 저녁에는 축복처럼 눈이 하얗게 내렸다. 난 생 처음 3박 4일의 긴 집회를 한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반주를 하며 찬양하는 내 모습이 강단 뒤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꿈같이 투영되었다. 교도소에서 톰 존즈의 “딜라일라”를 불러서 감방 장 곁에 앉는 특혜를 누렸던 내가 회개하고 목사가 되어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당당하게 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25년 전에 깡패요, 개망나니였던 내가 그 험한 세월을 견디고 당당하게 목사 시인이 되어 이렇게 아름다운 강단에서 집회를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눌 울어도 눈물로써 갚을 길 없는 이 은혜 감사하여 나의 몸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 호를 사은(謝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느 수필가가 나의 졸작수필 “어느 아름답고 모호했던 청년”이라는 수필을 읽고 울먹이며“목사님! 목사님! 사은 목사님 주안에서 사랑합니다!” 고 고백한 말이 생각난다. 물론 리플을 통해 한 말이지만 그녀는 문예지에 내 수필을 싣게 해 달라는 전화를 하면서 그렇게 울먹였던 것이다. 나를 만드시고 오랫동안 기다려 주셨던 주님이 그렇게 나를 바라보신다는 생각이 들어 황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




2004년 2월 6일 금요일 늘 푸른 제주에서 사은 김광선 시인목사
1 Comments
시와사랑 2004.03.26 14:13  
  좋은 글 담담히 잘 읽었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자신의 정체를 망각하고
주변적인 것에 얽메여 사는지.....
저 자신도 나의 존재의미를 망각하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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