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얀 박꽃(수필)
하이얀 박꽃
뭉게구름(김형규)
붉게 물든 저녁노을, 초등학교 조그만 울타리엔 한 송이 하이얀 박꽃이 피었다. 공해에 찌든 회색도시에서 박꽃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침저녁 한가한 시간이 나면, 나는 아파트 옆 아담한 초등학교 담장 주위로 산책을 나선다. 그 곳엔 고사리 손들이 정성껏 가꾼 꽃들이 있어 더욱 정감이 감돈다.
연초록의 여린 덩굴 속에 하이얀 박꽃을 바라보면, 그리던 연인을 만난 듯 왠지 가슴이 설렌다. 어릴 적, 고향집 싸리울과 초가지붕도 아련히 떠오르고, 뒷동산 중턱에 떠올랐던 보름달도 그려진다. 밤하늘엔 은하수가 흐르고 모깃불 연기 따라 반딧불이 반짝일 때 가족들의 정다운 웃음꽃이 하이얀 박꽃 속에 피어났다. 뜨락으로 별빛이 쏟아지면, 수줍은 박꽃이 영롱한 이슬방울에 젖어 달빛 속에 아롱아롱 빛났다.
강남 갔던 제비가 물고 온 조그만 씨앗에서 이렇게도 예쁜 박꽃이 필 줄이야. 꿈꾸던 어린시절, 흥부와 놀부의 동화 속에서 나는 신비스런 하이얀 박꽃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자랐다.
이른 봄,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꽃과 꽃망울을 터뜨리는 하얀 목련화도 늘 정겹다.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숨어 피는 백합도, 찬 바람 맞으며 무서리 속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하얀 들국화도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고향집 초가지붕 위의 하이얀 박꽃은 나도 모르게 애틋한 사랑으로 마음속에 다가온다.
지저귀는 새들이 잠든 사이, 홀로 하얀 구름과 이슬방울을 박꽃에 아로새기며 몰래 피어나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열적인 색깔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지 못하고 다소곳이 피어나는 애처로움 때문인가.
적막이 밀려오는 밤, 피어나는 보드라운 박꽃은 눈이 시리도록 하얗다. 수줍음이 많은 사랑하는 연인처럼 쳐다만 보아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찬란한 태양이 숨져버린 캄캄한 그믐밤, 순결한 하이얀 박꽃은 소복이 쌓인 함박눈 속의 꽃등불처럼 어둔 밤길을 훤히 밝혀준다.
사람 가까이에서 자라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피어나는 하이얀 박꽃!
이른 봄, 씨앗에서 새싹이 트면 차츰 나뭇가지를 붙들고 위로 올라갈 여린 손을 내민다. 이내 덩굴손을 뻗어 칭칭 감고 높은 곳으로 기어오른다. 박꽃은 연약한 덩굴을 타고 별빛을 먹고 자라면서 달빛 보고 웃음 피우며 둥근 박을 맺는다.
박은 자라나면 초가지붕을 죄다 덮을 정도로 두엄만 넉넉하게 주면 제 스스로 자라준다. 뿌리가 사방으로 몇 발씩 뻗어 거름을 빨아드리고 좀처럼 잔병이라곤 모르게 자란다. 큰 박은 꼭지 부분을 도려내고 속을 파내어 바가지를 만든다. 덜 익어 털이 뽀송뽀송한 연한 박은 회 무침을 하고, 겉은 썰어 나물이나 박고지를 해먹는다.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박나물에는 달빛 향기가 가득 담겨져 있다.
논밭에 새참을 이고 나갈 땐 바가지가 밥그릇도 되고 국그릇도 된다. 바가지로 막 떠올린 샘물이 너무 차 행여 체할까봐 버드나무 잎을 띄워 주던 갓 시집온 새색시가 아련히 떠오른다. 바가지로 만든 탈을 쓰고 사물놀이 패에 끼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동네 어른들의 흥겨운 모습도 잊을 수 없다. 형제간에 어울려 잘 여문 둥근 박을 슬금슬금 톱질하면서 박 속에서 금은보화만 쏟아지길 기원했었다.
한 여름이 떠나고 가을이 머무는 이 곳, 둥근 박이 영글어가고 있다. 하이얀 박꽃은 누구에게나 순결한 마음으로 고향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박꽃이 저렇게도 아름답구나! 어여쁜 선녀같이.”
휘영청 달 밝은 밤, 아버지와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마지막 한마디.
호박꽃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하이얀 박꽃이 아름답기만 하다. 솔바람도 사르르 잠든 새벽, 그대의 그리움만 더해 한없이 외롭기만 하다. 가슴에 담아둔 그대와의 사랑이 한 겹 한 겹 옷을 벗을 때면, 초록별 내려 몸 씻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소박하면서도 순결한 삶의 소망을 꿈꾸는 하이얀 박꽃처럼 인간미 가득한 그러한 세상과 사랑은 없을까. 흙 담장도 설 자리가 없고 초가지붕도 사라진 이 척박한 땅에 박꽃인들 어디서 편안히 꽃 피울 수 있을 것인가.
순백의 그윽한 향내 풍기는 하이얀 박꽃이여! 그리운 내 사랑아!
<수필세계> 가을호(2006년)
뭉게구름(김형규)
붉게 물든 저녁노을, 초등학교 조그만 울타리엔 한 송이 하이얀 박꽃이 피었다. 공해에 찌든 회색도시에서 박꽃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침저녁 한가한 시간이 나면, 나는 아파트 옆 아담한 초등학교 담장 주위로 산책을 나선다. 그 곳엔 고사리 손들이 정성껏 가꾼 꽃들이 있어 더욱 정감이 감돈다.
연초록의 여린 덩굴 속에 하이얀 박꽃을 바라보면, 그리던 연인을 만난 듯 왠지 가슴이 설렌다. 어릴 적, 고향집 싸리울과 초가지붕도 아련히 떠오르고, 뒷동산 중턱에 떠올랐던 보름달도 그려진다. 밤하늘엔 은하수가 흐르고 모깃불 연기 따라 반딧불이 반짝일 때 가족들의 정다운 웃음꽃이 하이얀 박꽃 속에 피어났다. 뜨락으로 별빛이 쏟아지면, 수줍은 박꽃이 영롱한 이슬방울에 젖어 달빛 속에 아롱아롱 빛났다.
강남 갔던 제비가 물고 온 조그만 씨앗에서 이렇게도 예쁜 박꽃이 필 줄이야. 꿈꾸던 어린시절, 흥부와 놀부의 동화 속에서 나는 신비스런 하이얀 박꽃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자랐다.
이른 봄,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꽃과 꽃망울을 터뜨리는 하얀 목련화도 늘 정겹다.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숨어 피는 백합도, 찬 바람 맞으며 무서리 속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하얀 들국화도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고향집 초가지붕 위의 하이얀 박꽃은 나도 모르게 애틋한 사랑으로 마음속에 다가온다.
지저귀는 새들이 잠든 사이, 홀로 하얀 구름과 이슬방울을 박꽃에 아로새기며 몰래 피어나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열적인 색깔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지 못하고 다소곳이 피어나는 애처로움 때문인가.
적막이 밀려오는 밤, 피어나는 보드라운 박꽃은 눈이 시리도록 하얗다. 수줍음이 많은 사랑하는 연인처럼 쳐다만 보아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찬란한 태양이 숨져버린 캄캄한 그믐밤, 순결한 하이얀 박꽃은 소복이 쌓인 함박눈 속의 꽃등불처럼 어둔 밤길을 훤히 밝혀준다.
사람 가까이에서 자라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피어나는 하이얀 박꽃!
이른 봄, 씨앗에서 새싹이 트면 차츰 나뭇가지를 붙들고 위로 올라갈 여린 손을 내민다. 이내 덩굴손을 뻗어 칭칭 감고 높은 곳으로 기어오른다. 박꽃은 연약한 덩굴을 타고 별빛을 먹고 자라면서 달빛 보고 웃음 피우며 둥근 박을 맺는다.
박은 자라나면 초가지붕을 죄다 덮을 정도로 두엄만 넉넉하게 주면 제 스스로 자라준다. 뿌리가 사방으로 몇 발씩 뻗어 거름을 빨아드리고 좀처럼 잔병이라곤 모르게 자란다. 큰 박은 꼭지 부분을 도려내고 속을 파내어 바가지를 만든다. 덜 익어 털이 뽀송뽀송한 연한 박은 회 무침을 하고, 겉은 썰어 나물이나 박고지를 해먹는다.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박나물에는 달빛 향기가 가득 담겨져 있다.
논밭에 새참을 이고 나갈 땐 바가지가 밥그릇도 되고 국그릇도 된다. 바가지로 막 떠올린 샘물이 너무 차 행여 체할까봐 버드나무 잎을 띄워 주던 갓 시집온 새색시가 아련히 떠오른다. 바가지로 만든 탈을 쓰고 사물놀이 패에 끼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동네 어른들의 흥겨운 모습도 잊을 수 없다. 형제간에 어울려 잘 여문 둥근 박을 슬금슬금 톱질하면서 박 속에서 금은보화만 쏟아지길 기원했었다.
한 여름이 떠나고 가을이 머무는 이 곳, 둥근 박이 영글어가고 있다. 하이얀 박꽃은 누구에게나 순결한 마음으로 고향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박꽃이 저렇게도 아름답구나! 어여쁜 선녀같이.”
휘영청 달 밝은 밤, 아버지와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마지막 한마디.
호박꽃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하이얀 박꽃이 아름답기만 하다. 솔바람도 사르르 잠든 새벽, 그대의 그리움만 더해 한없이 외롭기만 하다. 가슴에 담아둔 그대와의 사랑이 한 겹 한 겹 옷을 벗을 때면, 초록별 내려 몸 씻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소박하면서도 순결한 삶의 소망을 꿈꾸는 하이얀 박꽃처럼 인간미 가득한 그러한 세상과 사랑은 없을까. 흙 담장도 설 자리가 없고 초가지붕도 사라진 이 척박한 땅에 박꽃인들 어디서 편안히 꽃 피울 수 있을 것인가.
순백의 그윽한 향내 풍기는 하이얀 박꽃이여! 그리운 내 사랑아!
<수필세계> 가을호(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