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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얀 박꽃(수필)

뭉게구름 14 2362
                          하이얀 박꽃

                                          뭉게구름(김형규)

  붉게 물든 저녁노을, 초등학교 조그만 울타리엔 한 송이 하이얀 박꽃이 피었다. 공해에 찌든 회색도시에서 박꽃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침저녁 한가한 시간이 나면, 나는 아파트 옆 아담한 초등학교 담장 주위로 산책을 나선다. 그 곳엔 고사리 손들이 정성껏 가꾼 꽃들이 있어 더욱 정감이 감돈다.
  연초록의 여린 덩굴 속에 하이얀 박꽃을 바라보면, 그리던 연인을 만난 듯 왠지 가슴이 설렌다. 어릴 적, 고향집 싸리울과 초가지붕도 아련히 떠오르고, 뒷동산 중턱에 떠올랐던 보름달도 그려진다. 밤하늘엔 은하수가 흐르고 모깃불 연기 따라 반딧불이 반짝일 때 가족들의 정다운 웃음꽃이 하이얀 박꽃 속에 피어났다. 뜨락으로 별빛이 쏟아지면, 수줍은 박꽃이 영롱한 이슬방울에 젖어 달빛 속에 아롱아롱 빛났다.
  강남 갔던 제비가 물고 온 조그만 씨앗에서 이렇게도 예쁜 박꽃이 필 줄이야. 꿈꾸던 어린시절, 흥부와 놀부의 동화 속에서 나는  신비스런 하이얀 박꽃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자랐다.
  이른 봄,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꽃과 꽃망울을 터뜨리는 하얀 목련화도 늘 정겹다.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숨어 피는 백합도, 찬 바람 맞으며 무서리 속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하얀 들국화도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고향집 초가지붕 위의 하이얀 박꽃은 나도 모르게 애틋한 사랑으로 마음속에 다가온다.
  지저귀는 새들이 잠든 사이, 홀로 하얀 구름과 이슬방울을 박꽃에 아로새기며 몰래 피어나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열적인 색깔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지 못하고 다소곳이 피어나는 애처로움 때문인가. 
  적막이 밀려오는 밤, 피어나는 보드라운 박꽃은 눈이 시리도록 하얗다. 수줍음이 많은 사랑하는 연인처럼 쳐다만 보아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찬란한 태양이 숨져버린 캄캄한 그믐밤, 순결한 하이얀 박꽃은 소복이 쌓인 함박눈 속의 꽃등불처럼 어둔 밤길을 훤히 밝혀준다.
  사람 가까이에서 자라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피어나는 하이얀 박꽃!
  이른 봄, 씨앗에서 새싹이 트면 차츰 나뭇가지를 붙들고 위로 올라갈 여린 손을 내민다. 이내 덩굴손을 뻗어 칭칭 감고 높은 곳으로 기어오른다. 박꽃은 연약한 덩굴을 타고 별빛을 먹고 자라면서 달빛 보고 웃음 피우며 둥근 박을 맺는다.
  박은 자라나면 초가지붕을 죄다 덮을 정도로 두엄만 넉넉하게 주면 제 스스로 자라준다. 뿌리가 사방으로 몇 발씩 뻗어 거름을 빨아드리고 좀처럼 잔병이라곤 모르게 자란다. 큰 박은 꼭지 부분을 도려내고 속을 파내어 바가지를 만든다. 덜 익어 털이 뽀송뽀송한 연한 박은 회 무침을 하고, 겉은 썰어 나물이나 박고지를 해먹는다.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박나물에는 달빛 향기가 가득 담겨져 있다.
  논밭에 새참을 이고 나갈 땐 바가지가 밥그릇도 되고 국그릇도 된다. 바가지로 막 떠올린 샘물이 너무 차 행여 체할까봐 버드나무 잎을 띄워 주던 갓 시집온 새색시가 아련히 떠오른다. 바가지로 만든 탈을 쓰고 사물놀이 패에 끼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동네 어른들의 흥겨운 모습도 잊을 수 없다. 형제간에 어울려 잘 여문 둥근 박을 슬금슬금 톱질하면서 박 속에서 금은보화만 쏟아지길 기원했었다.
  한 여름이 떠나고 가을이 머무는 이 곳, 둥근 박이 영글어가고 있다. 하이얀 박꽃은 누구에게나 순결한 마음으로 고향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박꽃이 저렇게도 아름답구나!  어여쁜 선녀같이.”
  휘영청 달 밝은 밤, 아버지와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마지막 한마디.
  호박꽃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하이얀 박꽃이 아름답기만 하다. 솔바람도 사르르 잠든 새벽, 그대의 그리움만 더해 한없이 외롭기만 하다. 가슴에 담아둔 그대와의 사랑이 한 겹 한 겹 옷을 벗을 때면, 초록별 내려 몸 씻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소박하면서도 순결한 삶의 소망을 꿈꾸는 하이얀 박꽃처럼 인간미 가득한 그러한 세상과 사랑은 없을까. 흙 담장도 설 자리가 없고 초가지붕도 사라진 이 척박한 땅에 박꽃인들 어디서 편안히 꽃 피울 수 있을 것인가. 
 순백의 그윽한 향내 풍기는 하이얀 박꽃이여! 그리운 내 사랑아!
                                                          <수필세계> 가을호(2006년)
14 Comments
별헤아림 2006.09.01 17:00  
  김형규 교수님
수필'하이얀 박꽃'. 좋은 글 올려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교수님께선 참 여유롭고, 깨끗한 정서로 사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교수님보다 나이는 훨씬 아래이면서도 세상풍파에 찌들어
순박한 정서라곤 찾아보기 힘들 만큼 여유없는 피곤한 삶을 이어갑니다만...ㅎ.ㅎㅎ.

잠시 '아득히 먼 날 먼 곳에'를 작시하던 정서로 돌아갑니다.
대학 2-3학 년 쯤이었나 봅니다.
제가 무척 좋아했던 남자 친구와 '허리케인'이라는 영화를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1절을 적었습니다. 2절에 나오는 '박꽃' 얘기는 제 맘 대로 쓴 것이구요.
지금도 억울한 것은 그 남자친구와 '둘이서 손이나 잡고 영화를 봤으면 영화가 훨씬 더 재미가 있었을 텐데...... .' 하는 아쉬움입니다. ^^*
바다 2006.09.01 17:33  
  김형규 교수님!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박꽃을 이리도 아름답게 표현해 주시다니요.
읽어내려가면서 내내 가벼운 전율을 느낍니다
.
시골에서 자랐기에 박에 대한 추억이 많이 있지요.
박속 나물 된장에 무쳐먹으면 왜 그리 맛이 있었는지요.
 둥그렇게 익은 박을 타서 가마솥에 삶아 말리던 어머니도 생각나고
 초가지붕 기와지붕 담벼락에 주렁주렁 열린 박.
장종지기도 하고 쌀됫박도 하고 물바가지도 하고...
어렸을 적 집안 제사에 제물로 친척들이 저마다 성의껏
바가지에 쌀을 담아오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저도 박꽃이라는 시를 오래전에 즉흥적으로 써놓은 것이 있는데
교수님의 글을 보니  다시 다듬어야겠습니다.

  이 사이트에서 교수님의 수필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뭉게구름 2006.09.01 23:51  
  별헤아림님!
부족한 글 칭찬해 주시니 어린아이 마냥  좋네요.
가을이 오는 길목인지 여러 곳에서 원고 청탁이 와서 시간에 쫓겨 쓴 글입니다.
소재를  찾느라 고민을 하던 중,  별헤아림(권선옥) 작시  임긍수 작곡인
<아득히 먼 날 먼 곳에>란 신작 가곡을 배우게 되었고, 조그마한 무대에서 독창(바리톤)도 했습니다.
    작곡은 물론, 작시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그 내용(2절) 중에
  "가녀린 달빛으로 말없이 피고 지는 한송이 순결한 하이얀 박꽃이여" 를
노래하면서 감격하여 수필로 엮어 보았습니다. 물론 초등학교의 박꽃과 어릴적 고향집 박꽃도 떠 올랐습니다.
 귀한 소재를 주신 권시인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뭉게구름 2006.09.02 00:50  
  바다님!
모자라는 글 격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는 전공이 경제학이라 문학에 관한 깊은 전문적 식견은 없지만, 수필도 시로 표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시인님들의 아름다운 시를 많이 감상하고, 가곡의 작사자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것을 지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신작가곡을 특히 좋아합니다. 내용을 깊이 음미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행복감에 빠져 듭니다.
저는 시와 음악(가곡)과 그림(유화)이 수필을 엮어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퇴임 후에 이런 분야에 많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하이얀 박꽃>은 이성간의 사랑, 친구간의 우정은 물론,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맑고 깨끗한 순수성을 지닌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야 겠다는 염원을 담아 본 것이 불과합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를 바랍니다.
송인자 2006.09.02 08:38  
  김형규교수님,
경제학 전공이시라고요? 이궁...그런데 어쩜 이리도 섬세하고 고운 수필을 쓰실까요? 저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살면서 많은 걸 잊고 살고 있답니다. 박나물은 울 엄마가 좋아하셔서 자주 밥상에 올리셨는데...이 글을 보니 물컹거리는 느낌 때문에 먹기 싫다고 투정했었던 생각이 납니다. ^^
물망초 2006.09.02 09:18  
  김형규 교수님~
무심코 지나치는 작은 박꽃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릴적 시골에 가서 할머니에게 이 꽃이 뭐냐면서 여쭤보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예쁘다며 꽃을 떼서 무척 혼난 기억도 다시 나구요^^ 지금은 박나물이 참 맛있다는 생각만 하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교수님의 순수한 마음과 세심함이 미물에 대한 관심에 찬사를 보냅니다.  좋은 글 읽었습니다.
화지 2006.09.02 10:24  
  박속 나물...아마 먹어본 사람 드물겁니다. 저는 어려서 많이 먹어봤거든요.  박속이 얼마나 하얗고 예쁜지 박속처럼 하얀살이라고도 하고 예쁘다고도 하잖아요. 오랫만에 박꽃과 박 나물 떠올리며 할머니도 함께 그리워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뭉게구름 2006.09.02 11:26  
  송인자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곳에서 뵙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저는 한국수필문학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런 모임에서 뵐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영국의 켐브리치 대학의 케인즈(J. M. Keynes)는 명 문장가이며 다방면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천재였습니다.
 저도 이제서야 흉내 좀 내어보려고 하는데 어렵습니다.
 가곡 감상하시면서 좋은 글 남겨 주십시요. 

물망초님!
귀한 시간을 내셔서 부족한 글 읽으시고  글 올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지켜 봐 주시기 바랍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글 쓰는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화지님!
귀한 이 곳에서 글로써 뵙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대구의 성악가 박범철(테너)님에게 1주일에 2시간 가곡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가곡의 선율 속에 흐르는 아름다운 시에 매력을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의 글 읽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송인자 2006.09.02 14:07  
  넵, 교수님 이다음에는  협회에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
장미숙 2006.09.02 22:05  
  박꽃과 달빛은 천생연분이라 생각됩니다.
그 어우름의 이야기 속에 어릴 때 먹어보았던
박나물의 맛도 기억하게 해 주시니 감사해요.
뭉게구름 2006.09.02 23:32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 생각납니다. 이 곳에서도 조수미님이 애창했던 고향을 들을 수 있지요.
연어가 태어나서 왜 그 먼 베링해까지 가느지. 그리고 어떻게 고향의 강물로 찾아오는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귀소 본능이 아닐까요.
송인자님과 장미숙님 더욱 건필을 빌며 좋은 인연의 시간 갖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자 연 2006.09.03 12:19  
  하늘이 덧 없더니 무심히 찾아주심

오늘야 인사 올림 못내도 멎적은 맘

술길 곳 어딘가 두리번 민망함이 웃네요


참 많이
선생님 글 부러히 읽던 시절 있었습니다...

건안하세요
그져 반갑고
高 맙습니다 ~~~
뭉게구름 2006.09.03 20:54  
  자연님!
<가을> 시 잘 감상했습니다.
 가을과 박꽃은 인연이 많지요.
 좋은 시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파문이 일게 하소서.
민영맘 2006.09.05 12:44  
  뭉게구름님의 글을 읽으니 어릴적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박나물이 생각나는군요...
그땐 박꽃이 무슨색인지 잎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참기름에 볶아 단맛나고 고소한 기억만이 있네요.

지금은 흔히 볼 수도 없고 민영이에게 보여줄 수도 없지만 뭉게구름의 글을 함께 읽으며 시골 초가 지붕에 햐얗게 피었던 박꽃을 상상할 수는 있겠죠?

항상 마음이 픙요로워지는 글들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드리구요...항상 건강하세요.
오늘따라 어머니가 해주신 박나물이 무지 먹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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