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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 소리

가객 7 1378
오늘 아침에는 날씨가 꽤 차갑게 느껴졌다.
행인들은 옷깃을 곧추 세운 채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고
그 얼굴 들에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게다가 날숨이 눈에 들어왔던 걸 보면 정말 쌀쌀했던가 보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용평의 기온이 영하 19도까지 내려갔다고 하는 걸 듣고서
이 곳은 그나마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삼한사온이라 했거늘 한이틀 있으면 이 추위도 풀리겠지.

아침에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걸어서 출근하는데
'원! 雨水가 지난지 얼만데... 이렇게 쌀쌀하지!
立春을 거꾸로 새웠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80년대초 직장선배가 했던 농담이 떠올랐다.

낭만이 깃든 멋진 거리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충무로에서
근무하던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퇴근 후에 충무로의 한 OB베어집에 가서 한 잔하고
귀가하는 것이 우리들의 정해진 코스였다.

雨水가 지난 후였으니까 이맘 때쯤이었을 게다.
그 날도 퇴근 후 둘이 극동빌딩 뒤에 있던 단골 선술집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는 막 나오는데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래서 내가 "아이고. 박대리님!
雨水도 지났는데 무슨 날씨가 이렇게 춥지요? "하고 말했더니
그 양반 하는 말이
"응? 아! 크리스마스가 가까와 오잖아~~" 라는 것이었다.

" 예? 뭐라고요? 크리스마스가 가까와... "
하고 내가 말을 받고 있는 중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둘이 한참을 웃고는 한 잔 더 걸쳐 추위를 떨친 후
전철을 탔던 기억이 떠 올랐었다.

그런데 오늘은 강의가 밤늦은 시각에 있는 날이라
저녁식사를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고 잠시 쉬고 있었다.
그 새를 못참고 집사람이 나더러 킴스클럽에 같이 가잔다.
요새 남편들이 어찌 집사람의 청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대문밖에 나서기가 무섭게
집사람은 20년 가까이 하던대로 내 팔짱을 끼었다.
밤바람이어서 더 차가웠는지 집사람은 얼마 걷지도 않아서
"왜 이렇게 쌀쌀하지요? 3월달인데..." 하면서 바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나는 그 농담을 한번 써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응~~? 에이! 그 것도 몰라!
올 크리스마스가 가까와 오잖아~~!" 하고
내가 이기기나 한듯 의기양양하게 잽싸게 말했더니,

집사람은 역시 기대했던 반응대로
"예? 크리스마스가...? 으응~~ 하여튼 당신은 허튼 소리는..."
하고 말하면서 둘이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는 쌀쌀함을 잊은 채 그 속을 걸어 갔다가 왔다.

허튼 소리이면 또 어쩌랴.
그 허튼 소리로 쌀쌀함을 녹이고 부부간의 거리도 좁힐 수 있다면
몇번이라도 반복해 줄 수도 있는 일이지.
그 게 값비싼 보약보다도 훨씬 더 금슬을 좋게 해줄텐데.



7 Comments
바다 2003.03.04 22:49  
  나는 부부간에 하는 일 중에 가끔 부러운게 하나 있다
 
신혼이건 중년이건 노년이건 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거나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을 보면
신기한 듯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저 사람들은 진짜부부일까?
요즘은 진짜부부는 팔짱을 안 끼고 가짜부부들이
팔장을 끼고 다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부부끼리 외출을 할 때 팔짱을 끼어 보거나 손을 잡고 걸어본 적이 거의 없다
어쩌다 장난으로 팔짱을 낄라치면 남편은 배시시 웃으며 남들이 본다고
 2~3m쯤 내 곁에서 떨어져 걷곤  한다.

 연애 시절 어느 날 .
갑자기 비가 쏟아져 우리는 비닐우산  하나만을 사 어깨가 스칠듯  말듯 
어색하게 걸었던 적이 있었다 
조그만 언덕길을 가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 하여 그 때 그이의 팔짱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껴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부부는 어떤 일을 하던 거리가 가까울 때 사랑이 더욱 다져지리라 생각하며
가객님의 부부간의 금실이 부럽기만하다

그러나
우리부부는 비록 외출할 때 보이는 손은 잡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뜨거운 사랑의 손을
언제나 잡고 있음을 이 순간 감사 드린다
음악친구 2003.03.04 23:16  
  부럽사옵니다~
^.^
평화 2003.03.04 23:19  
  새순이 돋고 아지랑이가 언땅 깊숙히 잠든 개구리의 단잠을
깨우는 봄이라지만 우리곁에 서성거리는 꽃샘 추위가 만만치가
않아 오늘은 다시금 장롱 깊숙히 넣어둔 내의와 두툼한 오리털파카를
꺼내입는 민첩함을 보였던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가객님의 진솔하고 정겨운 글을 읽으니 꽃샘 추위가 금새 다
녹아내릴것만 같아요.

지금 가객님 부부의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감동적인 영화의 한장면처럼
뇌리를 순식간에 스쳐고 지나갑니다.
열대의 꽃처럼 일순간 잠시 피었다가 시드는 사랑이 아닌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깊고 진해져 무르익은 사랑이 너무도 소중하고 의미있게
다가오네요.

가객님!
앞으로도 날마다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가정되시고 아리땁고 마음 고운
아내와 오래오래 아름다운 사랑 하늘만큼이나 높게 쌓아 나가시길 기원드립니다.
세월이 흘러 훗날 아내의 머리에 백발이 무성하여도 개념치 마시고 다정스레
주름진손 따스한 손으로 꼭 마주잡아 주실분이시라는걸 믿고싶습니다.*^-^*
수선화 2003.03.05 00:45  
  허튼소리라도..
부부간의 정을 더욱 돈독히 해주는 보약같은 말이라면
아끼지 말고 많이많이 나누세요.



유성-━☆ 2003.03.05 01:13  
  위의 글을 읽고 20년을 그랬던것 처럼 아내와 팔짱을 꼈다는 소릴들으니
 연인처럼 친구 처럼 알콩달콩 사시는  가객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20년을 산  부부라면  덤덤해서 실제로 그러기가 쉽진 않을 텐데요

제 경운 결혼생활 14년 밖에 안 됐는데도 그러질 못 하니 말이죠
어쩌다 밤에 외출할떼 장난으로 내쪽에서 팔짱를 끼려하면
어허 하곤 슬그머니 팔을 빼는 무드없는 남편이니..  그럼 난 자존심이 상해서
다시는 팔을 끼라고 해도 끼나봐라  하고  다짐을 하지요

가객님!
20년 후에도 " 50 년을 그랬던 것 처럼  팔짱을 .."  이렇게 글을 쓸수 있도록
농~익는 부부애를 켜켜이 쌓으시길 바랍니다
소렌 2003.03.05 02:29  
  '어찌 집사람의 청을 거역....' 운운하시기에  엄처시하~이신가~ 했죠^*^!~
'크리스마스가 ...' 허튼 한  말씀으로 찰떡부부임을  자~~랑 하셨네요~~ㅎㅎ~
아름다운 듀엣이십니다.
맑은눈동자 2003.03.05 08:51  
  어떤 화가가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고 집을 떠나 돌아다녔지요.
여기 저기를 돌아다녀도 가장아름다운 그림을 찾을수 없어 화가는 집으로 돌아올것을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석양을 뒤로하고 아이를안고 손을 흔드는 부인을 보고
그자리에서 화구통을 열었답니다 화가는 깨닭았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건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이란걸...  가객님의허튼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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